140화
그는 <슈퍼 버프 커피>의 음료를 마시고 스르륵 잠든 것이 기억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자신이 괴물 나뭇가지에게 잡아먹힐 위기였다는 사정을 듣고 그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원조 버프 커피 사장님의 큰 뜻을 몰라 뵈었습니다!”
“아니요, 저한테 사과하실 건 없는데, 아하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제부터 저는 평생 <카페 리을> 단골 하겠습니다.”
평생까진 좀 부담스러운데…….
부담스러운 맹세를 한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맞다! 저는 피즈치자라고 불러 주세요.”
“왜 다들 닉네임을 쓰는 거죠? 어, 역시 저도 닉네임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요?”
분위기를 맞추겠다며 이유미가 닉네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 본명 대신 닉네임을 사용하는 헌터, 지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음, 크흠.”
아까 호쾌하게 활약을 어필할 때는 언제고, 어색하게 눈을 피한다. 내가 쳐다보자 슬그머니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나는 (지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동생 김지나의 지인인 데다가 이런저런 사건도 있었으니 어색한 듯했다.
이렇게 어수선해서 좀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힘든 분위기.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게 뭘까?
“여러분, 커피 드실래요?”
바로 커피다.
“커피요? 우와, 좋죠!”
“저한테도 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힝행홍과 피즈치자가 곧장 환영했다.
“어, 던전 안인데 커피라고요? 그야 마시고 싶긴 한데요.”
이유미도 당황하기는 했지만 찬성이다.
“……커피라 뭐, 뭐어.”
지존은 애매한 반응을 보였지만 반대는 아니니까 찬성이라고 치자.
그럼 결정이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인벤토리에서 간단 커피 제조 키트를 꺼냈다.
스킬을 써서 바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도 되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모카포트로 추출하기로 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카포트에 물과 원두가루를 담고, 크투가의 반지로 불을 붙인 판 위에 올렸다.
곧 치익 하는 끓는 소리와 함께 진한 커피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냄새였다.
“하아……. 냄새 좋네요.”
이유미가 가볍게 감탄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커피를 만드는 것도 어쩐지 오랜만이란 느낌이다.
요 며칠은 카페를 일찍 닫고 위장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고, 지금은 보다시피 사람들을 구하려다 던전 안이다.
이상하다. 분명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를 차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
으음, 생각하지 말자. 처음부터 내 진로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것 같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커피나 만들자.
모카포트가 적당히 끓어오른 뒤 불을 껐다. 잠시 뒤 에스프레소 추출이 완료되었다.
그럼 뭘 만들까.
나는 레시피 리스트를 띄워 놓고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 인벤토리를 제때제때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료는 충분했다.
굳이 고르자면 진하고 묵직한 맛이 마시고 싶다. 하지만 지금 만들 수 있는 메뉴 중에서 확 끌리는 것이 없었다.
“으음……. 아, 맞다.”
내가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도 가능했었지.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기능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좋아, 그걸 만들자.
나는 밀크피쳐에 생크림과 우유, 헤이즐넛 시럽을 넣고 잘 섞었다. 컵에 이 우유를 붓고 위에 에스프레소를 따르면 완성이었다. 진하고 묵직한 우유 위에서 에스프레소가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었다.
커피를 완성하자 곧장 띠링 소리와 함께 알림 창이 떴다.
[축하합니다! 직접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이 음료를 나만의 레시피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등록해 주세요.
이름 : ]
적당히 크림라테라고 이름을 입력하고 가격을 설정하니 상태 창이 나타났다.
[아이템: 크림라테(★★★☆☆)
상태: 좋음 (남은 시간: 00:30:00)
효과: 한 시간 동안 스킬 위력이 100% 강화됩니다.]
던전을 헤매는 중인 지금 도움이 될 법한 효과가 붙어 있었다.
고소한 유지방, 쌉싸름한 커피, 그리고 향긋한 시럽이 어우러져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완성된 커피를 일행들에게 한 잔씩 건넸다.
“와, 감사합니다. 던전 안에서 이런 본격적인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너무 좋네요.”
이유미가 잔을 받아들며 활짝 웃었다.
“크흐흑, 어리석은 저한테도 이렇게 커피를 주시고…….”
“이 자식아, 평생 단골로 보답해라.”
“옙!”
이건 피즈치자와 힝행홍의 반응.
모두 커피를 아주 좋아했고 머리 위로 가득 찬 만족도 막대를 띄웠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인 지존은…….
마치 관심 없는 척, 기대하지 않는 척하면서 이쪽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분의 커피 잔을 향한 채다.
하하…….
나는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를 더 추출하여 내 몫과 지존 몫의 커피를 만들었다.
“자, 지존 헌터도 드세요.”
“……감사함다.”
머쓱해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지존이 잔을 받았다.
“그 커피, 한번 상태 창을 보세요.”
“상태 창이요? 어?”
지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약간이지만 지존에게 준 커피에는 커스텀을 했다. 시럽을 설탕으로 바꿨을 뿐이지만 이름을 새로 입력하라는 창이 뜨길래 이렇게 입력한 것이다.
[아이템: 지존 라테(★★★☆☆)
상태: 좋음 (남은 시간 : 00:30:00)
효과: 한 시간 동안 스킬 위력이 100% 강화됩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만난 일과 검은 점액질 사건에서 마주친 것 외에 나랑 직접적인 안면은 없다시피 하지만.
김지나의 가족인데 계속 어색한 채인 것도 그렇잖아.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려는 제스쳐라고 할까.
상태 창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본 지존은 크게 감격했다.
“헌터계의 지존이 되겠다는 제 큰 뜻을 알아주시는군요!”
그러더니 지존은 이제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딱히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두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지난 사건으로 지존에게 내려진 처분은 헌터 등록 6개월 정지.
얼핏 듣기에는 별일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길드에 가입할 수 없고 헌터로서 수익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꽤 무거운 징계다.
헌터 등록이 정지된 동안 지존은 무보수로 균열 처리에 앞장서거나 봉사 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힘을 지닌 헌터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후훗…….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죠.”
그건 참 대단한 일이긴 한데.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의문은 남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들어오신 거예요?”
“위기가 있는 곳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죠!”
“네?”
“지금이 바로, 영웅 지존이 눈을 뜰 때!”
“……네?”
그의 이야기인즉슨 이러했다.
어젯밤, 보람찬 봉사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지존.
그런데 동생 김지나는 집에 없고, 텔레비전에서는 사람들이 괴물 나뭇가지가 되었다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그렇게 큰 위기가 발생했다면 헌터계의 지존이 될 예정인 지존이 나설 차례!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나아지겠지. 목표는 크게…… 그래, 20××년 올해의 헌터 자리를 노리자.
지존은 곧장 뉴스에 나온 사건 장소, <슈퍼 버프 커피>의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괴물 나뭇가지를 해치운 상태였다. 이래서는 자신이 활약할 틈이 없다. 뭐 도울 일이 없나 주변을 휘 둘러보다가 그대로……. 눈을 뜨니 던전 안이었다고 한다.
순수한 선의와 영웅 심리가 반반 섞인 듯한 이야기였다.
사람이 변한 듯도 하고, 근본적인 부분에서 별로 변하지 않은 듯도 하고…….
어쨌건 사람을 돕겠다는 의지로 움직였다는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머쓱함을 완전히 떨쳐 버린 지존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핫! 김지나 친구라고 하셨죠? 전에는 본의 아니게 안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나 신생 지존만 믿으십쇼!”
그리고 호탕한 동작으로 손에 든 지존 라테를 마신다. 꿀꺽, 꿀꺽…….
“크하하, 이름만큼이나 완벽한 커피로군요, 사장님!”
띠링. 그가 잔을 전부 비운 그때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대상이 당신의 커피를 아주 좋아합니다.
커피로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 이 알림은 설마…….
호기심을 참기 어려웠다. 나는 당장 그 스킬을 써 보았다.
‘커피 한 잔의 인연.’
[커피 한 잔의 인연(B)
상세: (Lv.1) 궁극의 커피를 마신 상대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다. (00:05:00)
쿨 타임: 24:00:00
사용 가능 대상: 최이찬, 김태운, 지존]
역시.
사용 가능 대상에 지존이 추가되었다.
스킬이 업데이트된 김에 나는 지존의 스킬을 살짝만 살펴보기로 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지존검법과 지존의 아이언 팡이 어떤 스킬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격 (C)
(Lv.1) 검으로 두 번 벤다. 일정 확률(0.5%)로 세 번 벤다.]
[주먹 휘두르기 (C)
(Lv.1) 일반 공격의 두 배 위력으로 적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일정 확률(0.5%)로 세 배의 위력이 된다.]
엥, 없잖아?
아무리 스킬 리스트를 봐도 ‘지존’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저, 지존 헌터. 아까 사용한 지존검법과 지존의 아이언 팡은 스킬명인가요?”
내 질문이 어딘가 잘못된 걸까. 지존은 크게 당황했다.
“그건, 그러니까, 그게 있잖슴까.”
“네.”
“기합이라고 할까. 내가 개발한 검법인 지존검법을 널리 알리겠다는 뜻을 담아 파이팅 넘치게 어필하는…… 뭐, 그런 거죠, 으하핫!”
‘그냥 외치는 거였나…….’
그런데 지존의 스킬 리스트에는 미습득 스킬 페이지가 있었다. 나는 당장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참 잘했어요(B) /미습득/
(Lv.1) 5초 동안 시간을 정지한다.
※ 아직 습득하지 않은 스킬입니다.
습득 방법: 착한 일을 100번 한다. (현재 달성 수: 78)]
이건 굳이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영웅이 되기 위해 봉사 활동에 열심이라니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스킬을 얻을 테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커피 잔이 다 비었다. 적당히 휴식도 취했으니 우리는 다시 이 던전을 탐험하기로 했다.
“와! 커피 효과 덕분에 탐지 마법 범위가 늘어났어요!”
다시 탐지 마법을 쓴 이유미가 갈림길 중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이에요! 이쪽에 여러 사람이 있어요.”
후다닥.
우리는 당장 이유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통로를 달리자 끝에 문이 있었다. 드디어 기나긴 복도를 빠져나온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합류할 수 있다. 집에 갈 수 있다!
기유현과 최이찬, 아스는 무사하겠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여기까지 함께 온 일행들도 무척 좋은 사람들이지만, 역시 그들과 떨어지니 내심 불안했었다.
얼른 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나는 당장 문을 열었다.
“윽……?!”
그러나 문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어느새 방금 달려온 통로도 바닥도 보이지 않게 되더니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설마, 이 느낌은…….
어딘가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눈을 뜨자.
낯선 공간이 펼쳐졌다.
【드디어 여기까지 도달했군요, 적격자여.】
“……또 너구나.”
【조금쯤 반가워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황금빛 머리카락, 판타지풍 RPG 게임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차림.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던 사람이 앞에 있었다.
바로 성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