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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141/192)

141화

주변은 다시 SF풍에서 판타지풍의 공간으로 바뀐 상태였다. 무도회라도 열릴 듯한 화려한 홀. 정면에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이 달렸고, 성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또 나 혼자만 어딘가 낯선 곳으로 정신만 빨려 들어온 모양이다.

“이런 짓을 하려면 예고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다음번에는 신경 쓰도록 하죠.】

“나를 왜 부른 거야?”

【차갑기도 하셔라. 꼭 용건이 있어야만 부를 수 있나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남이잖아. 이런 판타지풍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가족을 둔 기억은 없다.

“너는 나를 아무 때나 부를 수 있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니에요. 세계에 간섭하는 데는 나름대로 힘이 필요해서요. 공간과 공간이 연결되는 틈새, 혹은, 이미 멸망한 세계라든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말 한마디 걸기도 힘들답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부르려고 한답니다. 모처럼이니까요.】

눈앞에서 성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쨌거나 성녀는 나를 살려 주었고, 시스템은 나를 도와주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이토록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걸까.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에게 느끼는 거리감? 아니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적격자여.】

“그 적격자라는 건 대체 뭐야?”

미음이는 시스템이 직접 선택한 각성자가 적격자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성녀가 나를 선택했다면, 그녀는 내게 무얼 바라는 걸까.

그러나 성녀는 대답 대신 예기치 못한 말을 꺼냈다.

【당신의 할머니는 요정안의 힘으로 운명을 거스르려 했기에 사망했습니다.】

“……!”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나?

아니, 말도 안 된다. 병원에 입원하셨던 날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나야말로 그대의 할머니가 오래 살아남기를 바랐는걸요.】

【하지만 그녀는 운명을 뒤틀고자 했고, 인과율을 거스른 대가로 수명을 잃었어요.】

“그 인과율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나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성녀는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이자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운명의 연쇄.】

【씨앗을 뿌렸기에 꽃이 피어나는 것. 물줄기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음으로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거스른 인과율이라는 건…… 어떤 거지?”

【…….】

말없이 성녀가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썹이 일그러진다.

이제껏 보이던 그림 같은 미소와 달리 인간적인 표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모습에 나는 불안해졌다. 계속 무의식에서 의심하고 있던 답이 바로 가까이 있었다.

“말해 줘. 부탁이야.”

성녀는 슬픔이 어린 표정으로 한참을 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

【…….】

【그대를 살렸어요.】

숨이 턱 막힌다. 귀를 막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성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리에 직접 전달되었다. 나는 진실을 거부할 수 없다.

【20년 전 최초의 균열. 그대는 원래 그날 그대의 부모와 함께 죽을 운명이었어요.】

【그대의 할머니는 그대를 살리려고 했어요. 그 여파로 남은 수명의 절반을 잃었죠. 그리고 살아난 그대에게 부여된 새로운 운명……. 그것이 적격자예요.】

【회귀, 각성, 그대의 능력…… 그 밖의 모든 것이. 그대의 할머니가 안배한 운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랍니다.】

지지직-

노이즈가 낀 텔레비전 화면처럼 주위 풍경이 흐려졌다. 희뿌연 빛이 공간을 삼키고 무너뜨린다.

나는 직감적으로 성녀와의 대화가 여기서 끝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더 정보를 얻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지금 이런 사실을 알려 주는 거지? 나를 할머니께서 살려 주셨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그리움에 말을 잃은 채 그저 넋을 놓고 선 내게 성녀가 말했다.

【잊지 마세요. 이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

【당신은 문 너머에 도달할 것입니다.】

의식이 유지된 것은 거기까지였다. 눈이 감기고,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 * *

“으…… 큽, 헉, 허억!”

“리을 씨, 괜찮으세요? 리을 씨!”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했다. 아직 몸의 감각이 전부 다 돌아오지 않았다. 숨쉬기가 버겁다.

겨우 눈을 뜨자 나는 이유미에게 비스듬히 기대선 채였다. 식은땀에 이마가 축축했다.

“문을 여는데 갑자기 비틀거리셨어요.”

전과 같다. 성녀를 만난 것은 현실에서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코 허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생생함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잠깐 현기증이 났나 봐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쉬었다 갈까요? 사장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힝행홍이 사람 좋게 말해 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아요. 가요. 얼른 다른 사람들이랑 합류하고 싶어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쉬는 것보단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2층. 문 너머에는 1층의 넓은 홀로 이어지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아래에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크투가를 소환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는 아니었다. 그냥, 지금 크투가를 소환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크투가는 오랫동안 할머니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다. 그런 그에게 할머니가 나를 살리기 위해 수명을 바쳤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

가슴이 갑갑했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를 만나서 묻고 싶었다. 특별히 멋진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닌 나를 살리기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하지만 만날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묵묵히 걸었다.

“저기! 저쪽에 사람들이 있어요.”

일행 중 누군가가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난간 아래를 보았다.

홀의 중앙 부근에 아스와 마왕 숭배교 <황혼>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이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왔구나.

그런데 그들의 앞에 붕대로 몸을 칭칭 감고 망토를 뒤집어 쓴 기괴하게 생긴 자가 있었다.

저자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인가.

“헉! 싸우는 중이에요!”

힝행홍이 홀의 어느 한곳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기유현이 서 있었다. 그는 혼자서 저주의 왕과 싸우는 중이었다.

전투가 한창이지만 긴박감은 없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기유현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공중에 나타난 너른 빛의 장막이 저주의 왕을 감쌌다. 붕대에 휘감긴 팔이 빛에 닿으면서 서서히 해체되어 사라졌다. 더러운 붕대만이 공중에 나부낀다.

【그르륵……. 네 녀석……!】

몸의 상당 부분이 먼지로 변한 저주의 왕이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못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이제 끝이구나.

정적인 전투의 막바지. 승리가 목전이구나 싶은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큭……?”

갑자기 기유현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유현 씨!”

“……리을 씨?”

나를 올려다본 검은 눈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괴로워 보인다. 그는 거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기고 있었는데 왜 저렇게 아파하는 거지?

파스스, 빛의 장막이 흩어졌다.

【그르륵……. 역시 그 힘은 오래 사용하지 못하는군. 역시 신에 준하는 나를 인간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휘리릭- 나풀나풀 휘날리던 붕대가 감기며 다시 팔다리의 형체를 이뤘다.

저주의 왕이 낫을 손에 쥔다. 보통 사람의 몸집만큼 커다란 낫이 가차 없이 기유현을 베려 했다.

“안 돼……!”

막아야 해.

그런 생각만으로 달렸지만 거리가 멀다. 닿지 않는다.

“……!”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나는 재빨리 스킬을 사용했다.

‘커피 한 잔의 인연!’

[대상: ‘지존’을 선택했습니다.]

[스킬: 참 잘했어요(B)를 사용합니다.]

[5초 동안 시간을 정지합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춘다.

5초.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힘으로 저 저주의 왕을 공격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손을 뻗어 크투가의 반지를 사용했다.

화르르!

붉은 불꽃이 붕대에 감싸인 몸을 활활 태웠다. 거의 동시에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누구냐! 누가 인간 주제에 영겁의 불꽃을……!】

불꽃에 집어삼켜진 저주의 왕이 나를 발견하고 낫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기유현이 더 빨랐다.

“섭섭한데요. 이쪽을 잊은 건 아니시겠죠.”

그 짧은 시간에 고통을 이겨낸 기유현이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반투명한 막이 저주의 왕을 붙잡았다. 그는 몸을 버둥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소름끼치는 정적이 이어지고.

저벅저벅. 기유현이 저주의 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끝을 직감한 저주의 왕이 잔뜩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르륵…….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멸망할 수는……!】

【들어라, 인간들아! 우리 세계는 □□에 의해 끝을 맞이했다. 네 녀석들도 분명 같은 꼴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파아앗-

단단하게 적을 감싼 빛의 막이 파편이 되어 비산했다.

다음 순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스: 악의에 물든 저주의 왕을 처치했습니다.]

…….

…….

한 박자 늦게 시스템 알림이 뜨면서 퀘스트 창이 업데이트되었다. 하도 여러 번 당한 만큼 작은 글씨까지 꼼꼼히 읽었지만 수상한 내용은 없다.

정말로 끝났구나. 이제 이 던전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얼른 달려가 다른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마왕 숭배교 <황혼>의 대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 아스를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 인간들을 돌봐 준 거거든!”

“아스,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내가 이 할아버지를 돌봐 드린 거거든!”

얼른 고쳐서 말한 아스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다.

다음으로 나는 기유현을 보았다. 막 말을 걸려 하는데, 옆에서 지존이 떨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기, 그, 설마, 에이, 말도 안 돼……. 하지만 이 지존도 놀랄 정도의 능력이라면…….”

기유현은 짧은 단어를 쏟아 내다가 입만 벙긋거리는 지존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손을 가로로 휙 긋는다.

대충, 떠들고 다니면 몸이 성치 않을 거란 뜻인 건 알겠지만……. 저게 통하나?

“……예, 옙!”

창백하게 질린 지존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통하는구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기유현에게 소곤거렸다.

“유현 씨, 괜찮아요? 아까 아파했잖아요.”

“괜찮습니다. 잠시 과부하가 걸렸을 뿐이에요.”

그때 아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말 기억해 둬.”

“왜? 유현 씨한테 무슨 말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홀에 모인 사람들을 아무리 봐도 최이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찬이는 못 봤어요?”

기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미가 탐지 마법을 사용했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흔적은 탐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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