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던전 보스는 이미 사망했으니 위험은 없다. 거기다 최이찬은 강하니까 무사하다고 믿지만…….
어떻게 된 거지? 같이 빨려 들어온 게 아닌가?
으음……. 그래도 여기서 나가면 만날 수 있겠지?
이제는 정말로 한시라도 빨리 이 던전에서 나가고 싶었다. 지친 데다가 여전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보스가 죽었으니 나갈 수 있는 거죠?”
지친 목소리로 힝행홍이 물었다.
“일단은 그렇기는 한데요.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문제라고요?”
기유현의 말에 달린 단서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어진 그의 말은 이랬다. 흔히 던전화라고 불리는 현상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세계의 침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세계가 현재 우리 세계를 침식하려는 것.
“SF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외계인의 침공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합니다.”
어쩐지 던전이 SF 풍으로 생겼더라니 비유도 그쪽이 나왔다.
“던전 보스…… 다른 세계의 왕은 처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 즉 근원은 남아 있어요.”
“근원이라고요?”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를 말합니다.”
나는 머릿속에서 기유현의 말과 시스템을 통해 얻은 정보를 연결해 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를 침공하러 온 세계수인가.
터무니없이 스케일이 커져서 잘 와 닿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이름 앞에 ‘거짓된 세계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거였나.
그때, 불쑥 힝행홍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죠?”
“그건…….”
“맞다! 그보다, 아까 보니 엄청 세 보이던데요.”
힝행홍은 그다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 듯했다. 아까의 전투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기유현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하……. 그냥, 이 일에 휘말린 헌터 중 한 사람입니다.”
기유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스킬도 막, 어디서 본 거 같았는데! 그, 유명한…… 그 뭐냐, 있잖아요.”
“…….”
“…….”
“어? 왜 다들 가만히 저를 쳐다보세요?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나는 힝행홍이 정답에 도달하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괴물 나뭇가지는 이미 전부 처치했어요. 여기, 피즈치자 씨를 마지막으로요.”
“글쎄요…….”
확신은 없는 듯, 기유현이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어딘가에 본체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군요.”
“……또요?”
무슨 뽑아도 뽑아도 무한 증식하는 여름철 잡초도 아니고! 이제 식물형 몬스터라면 지긋지긋했다.
“본체라면…… 으아앗!”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쿠구궁-
갑자기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홀의 벽과 기둥이 움직이며 공간이 형태를 바꾼다. 거센 에테르의 파도가 우리를 뒤덮고 빨아 당겼다.
“아스, 조심해……!”
나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먼저 아스를 돌아보았다. 아스는 마왕 숭배교 <황혼>의 할아버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하고 있었다. 어느 집 아르바이트생인지 참 잘 컸다.
“으아앗!”
“……리을 씨!”
비틀거리는 나를 기유현이 붙잡았다.
쿠구구궁, 쿵, 쿵-
잠시 뒤 흔들림이 멈추고 정신을 차리자.
주위는 다시 낯선 공간이었다. 아까 에테르의 파도가 우리를 이동시킨 것 같았다.
[‘던전: 거짓된 세계의 신전’의 최심부(最深部)에 도착했습니다.]
[던전의 근원을 파괴하여 거짓된 세계의 침식을 저지합시다.]
“…….”
“…….”
이 던전 대체 몇 겹으로 되어 있는 거야. 마트료시카 던전이라고 개명하는 건 어떨까.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신전이라기보다는 병원에 가까웠다. 하얀 벽으로 된 복도 끝에 문이 있었다.
이상하다. 여기가 던전의 최심부라고? 하지만 이곳은 던전이라기에는 정말로 평범해 보인다. 꼭 전혀 다른 두 개의 건물을 이어 붙인 것만 같다.
“왜 갑자기 병원이 나온 걸까요?”
기유현은 복도 끝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기이한 힘이 느껴집니다. 뭔가 있어요.”
“그게 던전의 근원인 걸까요?”
“아마도요. 보스를 해치우면서 아까의 던전이 힘을 잃고 무너졌고, 그 근원이 이곳으로 우리를 끌어당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기가…… 끝이겠네요.”
‘진짜_최종_마지막_final_끝’이었으면 좋겠다.
앞에는 새로운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노년층과 장년층의 일반인이 많은 마왕 숭배교 <황혼> 사람들은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몬스터가 나타날 위험에 대비해서 피즈치자와 이유미가 옆에 남았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교주 할아버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나가면 다음에 가게에 놀러 오세요. 우리 아스를 돌봐 주신 분들이시니깐.”
아스는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잠시 전열을 가다듬고 우리는 복도 끝의 문 앞에 도달했다.
“열어도 될까요?”
“잠시만요. 제가 한번 살펴볼게요.”
기유현이 문 너머를 확인하려는 그때.
달칵, 문이 열렸다.
“……어?”
“조카야……?”
최세드릭과 큰아버지, 그리고 전에 우리 카페에 왔던 힐러가 나왔다.
여러분이 왜 거기서 나와요……?
* * *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락이 안 되었는지 등등…….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하나도 묻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병실 안, 침대 위에 가냘픈 소녀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몸에는 거대한 은빛 꽃이 돋아났다. 그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의 답이 되었다. 아, 저거다. 저것이 던전의 근원이며 이 상황을 일으킨 원인이다.
처음에는 이제껏 처치한 괴물 나뭇가지와 같은 줄 알았다. 아니, 저건 다르다. 훨씬 강하고 압도적인 힘을 지녔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흐, 아, 으읏……!”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틀었다. 괴로워 보인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 주고 싶은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표피 아래에서 혈관처럼 식물의 뿌리가 뻗었다. 이것은 소녀의 몸과 완전히 융합되어 분리가 어려워 보였다.
“저건……. 대체 뭐야?”
최세드릭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로나야…….”
로나? 이 이름 들어 본 적이 있다. 분명……. 그래, 최세드릭의 아픈 여동생이 그런 이름이었다.
“흣, 아악, 으아악……!”
로나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쥐어뜯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최세드릭이 로나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거대한 은빛 식물은 더욱 크게 자라나더니 최세드릭을 밀어냈다.
“비켜! 이익……. 우리 로나를 놓아줘!”
스릉-
최세드릭이 손에 검을 들었다.
“잠깐! 그만두거라!”
큰아버지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늦었다. 최세드릭은 가차 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식물을 베어냈다.
툭, 꽃이 떨어지고.
“아아아악!”
그 순간, 로나는 마치 자기 몸이 베인 것처럼 아파했다.
“아, 안 돼…….”
하얗게 질린 최세드릭이 검을 멈췄다. 베인 자리에 금방 새 꽃송이가 자라났다.
“젠장, 설마 이런 함정을 감춰 뒀을 줄이야…….”
“어떻게 된 겁니까?”
기유현이 큰아버지에게 물었다. 큰아버지는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간의 사정을 짧게 설명했다.
큰아버지는 원래 어떤 영약으로 로나를 치료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로나에게 저 꽃이 돋아났고, 이 병실 자체가 던전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다.
꽃이 달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 소녀의 몸에 돋아난 것은 괴물 나뭇가지와 같아 보인다. 계속 잠들어 있던 저 소녀가 <슈퍼 버프 커피>의 커피를 마셨을 리는 없다. 그런데 왜 로나의 몸에서 저 나무가 움텄을까.
내 의문에 큰아버지가 짧게 대답했다.
“마도서다.”
“……마도서라고요?”
<진달래 전당포>의 주인이 말한 그 책이다. 그 책이 지금 이 상황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사정을 말하자면 길지만……. 저 소녀는 마도서를 보관하고 있다. 그건 황금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이계의 존재를 끌어당긴다.”
세피로트 가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로나의 몸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식물이 자라는 데 흙과 빛, 양분이 필요하듯.
소녀의 존재, 마도서, 영약이 갖춰짐으로써 저것이 뿌리내릴 환경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저 꽃이 괴물 나뭇가지와 같은 종류라면 진저에일을 활용할 수는 없냐고 물었지만 큰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세피로트 가지는 꿈을 먹고 자라난다. 그리고 모든 꿈을 남김없이 먹어 치운 뒤에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개화가 시작되면 어떤 약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나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 꽃은…… 던전의 근원. 저것이 완전히 피어나면 그때는…….”
큰아버지는 차마 전부 말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생략된 뒷말을 이은 이는 기유현이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질 겁니다. 이 던전을 통로로 수많은 몬스터가 나타나 우리 세계를 공격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띠링. 그때 다시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이번에 뜬 알림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다.
[던전의 근원을 파괴하여 거짓된 세계의 침식을 저지합시다.]
설마, 이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악, 흐아악……!”
로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표피 아래로 더욱 깊이 파고든 뿌리가 꿈틀거렸다. 차마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그때, 내 생각을 부정하려는 듯 재차 시스템 알림이 떴다.
[던전의 근원을 파괴하지 않을 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납니다.]
[거짓된 세계의 주민들이 이 세계를 노리고 있습니다. 던전의 근원을 파괴하여 저지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