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네, 저 맞아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를 알고 있어?’
‘저는 전부 알고 있어요. 언니가 우리 오빠를 도와준 일도. 언니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도요. 전부 봤으니까요.’
‘…….’
괴물 나뭇가지가 다시 소녀를 단단하게 옥죄었고, 고통에 찬 신음이 대화를 끊었다. 최세드릭은 검을 들고 자리를 지킨 채 핏발이 선 눈으로 로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을 느낀 듯, 로나의 어조가 빨라졌다.
‘언니, 크투가의 반지 가지고 있죠.’
‘……응.’
‘영겁의 불꽃을 사용하세요. 그 불꽃의 힘으로 이 꽃을 태우는 거예요.’
‘……!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아니요. 오직 그 힘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요. 언니가, 크투가의 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언니만이 할 수 있어요.’
“…….”
내 표정이 나빠졌기 때문일까. 옆에서 기유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로나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기억하고 있죠.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려 주셨던 일.’
‘……!’
그제야 나는 아직 로나의 머리맡에 푸른 세라에노꽃 화분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 이초록의 농원에서 부활시켰던 그 꽃이다.
‘푸른 세라에노꽃의 힘은 부활. 나도 같아요. 지금이라면 나 역시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부활할 수 있어요.’
나는 예전에 어떻게 푸른 세라에노꽃을 살렸는지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나는 꽃을 부활시키기 위해 태웠다. 그녀도 같다니, 그때와 같은 일을 하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네가…….’
‘마도서의 힘이 내게 완전히 융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틈새에 세피로트 가지의 꽃이 자라난 거예요. 반지의 힘을 쓰면, 마도서가 내게 융화되어 이 나뭇가지를 없앨 수 있어요.’
뿌리가 다시 로나를 공격했다. 침대 위로 핏방울이 떨어진다.
‘괜찮…… 읏!’
‘로나야! ……로나야?’
대화가 끊겼다. 소리 내어 불러 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로나는 실신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로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지만, 불을 사용하는 일이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데다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로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다. 로나의 말을 믿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세드릭, 나한테…… 로나를 도울 방법이 있어.”
붉게 충혈된 눈이 크게 흔들린다. 최세드릭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검을 내리고 내게 길을 열어 주었다. 다른 낯선 사람들과는 달리, 나라면 로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란 신뢰가 느껴졌다.
신뢰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이상하잖아. 오랫동안 아프던 애가 나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크투가의 반지를 사용하라는 이야기를 하다니.
사실은 내가 나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알 바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서 환청을 들은 거면 어쩌지?
은빛 나뭇가지에 완전히 뒤덮인 침대 앞. 망설임에 차마 힘을 쓰지 못하는데.
문득 손에 감도는 불꽃의 힘이 부드럽게 달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느낀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래, 모두가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결말일 거라고 믿자.
화르르.
거세게 피어오른 영겁의 불꽃이 세피로트 가지를 태웠다. 하얀 재가 공기 중에 나풀거렸다.
고통은 느끼지 않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로나가 스르륵 쓰러지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머리맡을 지키던 푸른 세라에노꽃이 로나를 되살렸다.
푸른 별빛을 받아 소녀가 눈뜨는 과정은 무척 신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로나야……!”
“세드릭, 아직 안 된다!”
큰아버지가 최세드릭을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아직 다 타지 않은 나뭇가지의 잔해가 다시 로나를 공격하려 했다. 세드릭은 검을 휘두르려다 늦을 것 같자 몸을 앞으로 던졌다.
“……세드릭!”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최세드릭의 가슴께를 파고들었다.
* * *
최세드릭은 눈을 떴다.
“어……?”
따뜻한 햇볕이 드는 방이었다. 가구가 눈에 익숙하다. 아. 오래전, 로나가 병에 걸리기 전에 살던 집이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 방금까지 로나의 병실 안에 있었는데. 의아해하는 그때, 앞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오빠, 왜 그러고 서 있어?”
“……!”
로나였다.
최세드릭은 온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여동생은 생긋 미소 짓고 있다. 비명과 신음이 아닌 목소리를 들은 것이 얼마 만인가.
“오늘 나랑 외식하기로 했잖아. 거기 인기 많아서 빨리 안 가면 자리 없어.”
“어, 어어…….”
로나는 실제보다 어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환상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로나의 미소에서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세드릭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로나의 손을 붙잡았다.
일상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최세드릭은 로나와 함께 외식을 하고 쇼핑을 즐겼다.
세계는 평화로웠고, 던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고민거리라고는 로나가 소파 뒤에 숨긴 학습지 따위가 전부였다.
이따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느낌. 알람시계를 끄고 늦잠을 잔 날의 거북함과 비슷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알람시계 따위는 없어서, 최세드릭은 위화감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날도 그는 로나와 함께 소풍을 갔다. 날씨는 좋았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최세드릭은 도통 소풍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위화감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자꾸만 멍하니 있자 결국 로나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어? 어, 어어…….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괴로운 얼굴 하지 마. 오빠 잘못이 아니잖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피크닉 매트 위에서 로나가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주위의 풍경은 더 이상 햇볕이 비치는 공원이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 상냥한 말이 이어졌다.
“그래. 오빠는 이세인 언니에게 속았을 뿐이니까.”
“……!”
그제야 최세드릭은 자신을 괴롭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꿈이다. 현실은 이토록 아늑하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아무것도 몰랐지. 이세인 언니를 믿고, 언니가 하라는 대로만 행동했잖아.”
“…….”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부 다 오빠를 속인 사람들이 나빠.”
다정한 말이다.
그러나 그 다정함이 바늘처럼 가슴께를 찔렀다. 찔린 상처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아픔이 그를 꿈에서 깨게 했다.
일이 이렇게 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몰랐던 것은 맞다. 그저 이세인을 믿고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다.
로나는 그의 앞에서 생긋 웃고 있다.
최세드릭은 병에 걸리기 전 자신의 여동생이 어떠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시시콜콜한 일까지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지. 그러니 진짜 로나라면 오히려 그가 잘못했다며 등짝을 때릴 테다.
“…….”
“……오빠?”
최세드릭은 검을 꺼내 들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대로 내리그었다.
파아앗-
환상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깔렸다. 그 순간, 어떤 강렬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쿨럭, 쿨럭!”
생강 냄새가 났다. 최세드릭은 반사적으로 입 안에 든 액체를 뱉어 내려 했다. 그러나 옆에서 누군가가 전부 마시라며 턱을 꽉 붙잡았다.
얼결에 생강 맛이 나는 액체를 전부 삼켰다. 꿀꺽, 마지막 모금이 목을 넘어가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빠, 정신이 들어?”
눈앞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가짜가 아닌 진짜 로나다.
진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내 동생.
로나가 눈을 뜨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는데, 막상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꾹 눌러 삼켰던 그리움이 울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어떡하지. 눈물 때문에 앞이 흐렸다. 똑바로 얼굴을 보고 싶은데.
최세드릭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생각했다.
이제껏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자신의 잘못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렇지?
* * *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최로나라고 합니다.”
바닥에서부터 약 10㎝ 위, 공중에 소녀가 떠 있었다.
머리카락은 푸르스름한 은빛이었고, 주위에는 은은한 빛이 반짝거렸다. 얼핏 봐도 평범한 상태는 아니다.
“흑, 흐엉, 로나야, 염색한 거도 잘 어울린다……. 오빠가 염색하고도 갈 수 있는 학교 찾아볼게…….”
눈이 퉁퉁 부은 채 동생을 부둥켜안느라 정신없는 최세드릭은 아직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거나 기뻐하는 걸 보니 잘됐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조금 전.
지긋지긋한 괴물 나뭇가지의 잔해가 최세드릭을 공격했고, 최세드릭은 쓰러졌다.
괴물 나뭇가지는 원래 숙주인 최로나의 몸을 잃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다행히 진저에일로 치료가 가능했다. 최세드릭이 자꾸만 뱉으려 해서 억지로 턱을 붙잡고 다 먹였다.
문제는 푸른 세라에노꽃의 힘으로 부활한 이 소녀, 최로나.
그녀는 자신이 마도서와 완전히 융화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서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며, 외형이 변했다고도.
“어, 어떻게 그 힘과 융화한 거냐?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큰아버지가 당황해서 물었다.
“마도서를 먹었어요.”
“……뭐?”
허공에 뜬 채 한 바퀴 빙그르르 돈 다음, 최로나가 다시 말했다.
“뜯어서 하루에 한 장씩이요. 진짜 맛없었어요.”
“…….”
“너무 맛이 없어서, 나중에는 붕어빵이랑 같이 먹었어요.”
“정말 그걸 다 먹었다고?”
“저도 먹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들키지 않고 마도서를 숨길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요. 책이라는 형태가 중요한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아무튼 두 번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에요.”
“허, 허어어…….”
대범한 성격인 큰아버지가 저렇게 얼이 빠진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충격적인 방법인 듯했다.
최로나는 설명을 마치고 이번에는 나를 보았다.
“드디어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언니.”
“나를 알고 있다고 했지.”
“네. 제 몸은 여기서 쭉 잠이 들어 있었지만, 제 의식은 자유롭게 깨어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니까요.”
“…….”
“그래서 저는 전부 봤어요. 예를 들어, 우리 오빠가 로미오와 줄리엣에 자신을…….”
“으, 으허엉, 로나야, 으허어어어엉!”
로나는 울면서 자신의 말을 끊으려고 애쓰는 최세드릭을 밀어냈다.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것도 그 마도서의 힘이야?”
“아니요. 이건 제 눈의 힘.”
“눈?”
로나는 그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역시 직접 만나는 쪽이 좋네요. 그렇죠?
“으흑, 으허어엉……. 맞아, 이렇게 다시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흑…….”
“오빠, 나 지금 완전 의미심장한 신비의 소녀 콘셉트 잡고 있으니까 좀 떨어져 봐.”
“흑, 진짜 로나구나. 역시 아까 그건 가짜였어, 어흐흑…….”
“그래, 진짜 로나 맞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뚝.”
그렇게 말하면서도 로나는 최세드릭의 손을 쥔 채 눈시울을 붉혔다. 이 소녀 나름대로 쑥스러움을 감추는 방식 같았다.
“여러분, 저랑 우리 오빠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나는 차분하게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훑어보았다. 힐러와 큰아버지를 지나, 아스를 보고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고, 나와 기유현을 향했다. 그녀가 다시 입술을 떼려는 그때.
띠링. 알림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축하합니다! 던전의 근원을 파괴했습니다.
던전: 거짓된 세계의 신전이 소멸합니다.]
[완전히 소멸하기까지는 10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남은 시간 00:10:00]
[던전이 소멸한 후, 방문자들은 자동으로 원래의 장소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도착했군요.”
로나의 말과 거의 동시에, 벌컥 하고 병실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