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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144/192)

144화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뉴스 기사 등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으니까.

고급스러운 정장에 단정한 머리카락,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 성공한 CEO다운 여유로운 표정.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대표 이세인이었다.

이세인 대표도 이 던전에 휘말린 걸까? 그런 의문도 잠시. 그녀가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윽……!”

털썩!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남은 사람은 최세드릭과 로나, 나와 기유현, 아스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스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만나는군. 어리석은 화신체.”

“무, 슨 짓을…….”

털썩. 아스가 정신을 잃었다.

아스의 옆을 지나 이윽고 로나의 앞에 선 이세인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나, 깨어났구나!”

“오랜만이네요.”

로나가 최세드릭의 손을 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세인을 보는 최세드릭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들 사이에 보통이 아닌 긴장감이 감돌았다.

“걱정 많이 했어. 네가 깨어나서 정말로 기쁘단다. 세드릭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세인 언니는 여전하시네요. 아니면, 얼굴 없는 자 □□□□□라고 불러 드릴까요?”

뭐?

나는 머리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저 이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스가 위기에 처했던 용산에서의 사건. 시스템 창에 그런 이름이 떴었다.

나는 이세인과 최로나 사이에 끼어들려 했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가족 문제니까 끼어들진 마세요.”

이세인이 슬쩍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이런 유명인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의 모습에, 아니, 그녀의 존재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꼭 저런 무기질적인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내가 정말로 로나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단 걸 알아주면 좋겠구나. 하지만 마도서와 융화했다고? 불량 식품이라곤 하나도 먹이지 않았었는데 왜 이상한 걸 먹고 그럴까.”

이세인의 낯에 머무르던 다정한 웃음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대표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오빠, 소용없어. 이미 알잖아.”

“……응.”

최세드릭이 표정에서 망설임을 지워 냈다. 그가 손에 검을 들었지만 이세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10분은 아주 잠깐이지. 던전이 소멸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파바밧!

바닥에 금이 갔다. 금을 따라 생성된 반투명한 결계가 이세인과 최세드릭, 최로나를 감쌌다.

“……로나야, 세드릭!”

쾅!

나는 손으로 결계를 두들겼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단단한 막을 씌운 듯 그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칫……!”

곧장 기유현이 결계를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결계는 모든 공격을 흡수했고, 이쪽과 저쪽은 완전히 분리된 상태다.

뭐지? 단순히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결계?

아니, 그렇다기에는……. 이 좁은 병실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분리한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물과 공기, 던전과 던전 바깥, 혹은 현실과 이미 소멸한 세계. 눈앞에 있는데도 멀다.

[남은 시간 00:05:32]

남은 시간은 고작 5분 남짓.

서서히 시야의 끝에서부터 던전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기의 냄새가 났다. 기절한 사람들이 하나둘, 던전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세인과 최세드릭, 최로나를 둘러싼 결계 안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마치 이대로 던전과 함께 소멸하기라도 할 듯이.

“나는 너를 나름대로 아꼈단다. 이렇게 너를 위한 병실도 준비해 주었잖니. 마도서만 내놓았다면 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그 농담 완전 재미없어요. 어차피 마도서를 손에 넣는 순간 봉인할 생각이었잖아요? 마도서가 인과율에 영향을 끼치는 걸 경계했을 테니까.”

모조 보석을 박아 넣은 듯 무감정한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 던전을 터뜨린 것도 그래서겠죠. 내가 괴물 나뭇가지에 잡혀 영영 깨어나지 못하기를 바라서요.”

이세인이 이 사건의 배후라고?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로나의 말에 이세인은 태연히 고개를 까딱였다.

“거짓된 세계라. 꿈을 먹고 자라나는 이미 소멸한 세계. 고리타분한 마도서와 가엾은 남매를 봉인하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나를 죽일 생각인가요? 설령 그러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당신은 실패할 거예요.”

“그건 해 보면 알 일이지.”

이세인이 나와 기유현을 흘깃 보았다. 뭐였을까. 아주 잠깐 눈에 비친 어떤 감정.

“이야아아압!”

채앵!

이세인의 신경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한 틈을 타, 최세드릭이 검을 들고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투명한 방패에 가로막혔다.

틈을 두지 않고 로나는 손에서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날렸다. 화살은 그대로 방패를 뚫고 이세인에게 명중했다.

됐다!

“……쿨럭, 쿨럭!”

중심을 잃은 이세인이 비틀거렸다. 로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세인 언니, 일어나요!”

“아직 모르겠니? 이세인은 절대 깨어나지 않아.”

이세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마도서의 힘? 너는 강해졌으니 얼마든지 이 몸을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나’의 죽음이 아니란다.”

“……!”

“세계는 예정된 심연을 향해 흘러갈 거란다. 그 전에, 소중한 가족을 길동무로 삼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 얼마든지 이 몸을 죽이렴.”

로나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째각, 째각…….

[던전이 소멸하기까지 2분 남았습니다. 귀환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깨어났는데 여기서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절망하는 그때.

“이야아압!”

우지끈!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최이찬이 나타났다.

“……이찬아?”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최이찬이 손에 쥔 단검을 결계에 대고 내리그었다.

와장창!

견고하던 결계가 순식간에 설탕 가루처럼 부서졌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세인의 낯빛에 당황이 서렸다.

“휴,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빙그르르, 탁!

멋지게 착지한 최이찬이 단검을 고쳐 쥐었다. 검날에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한눈에 봐도 평범하지 않은 단검이었다.

“이찬아, 어떻게 된 거야?!”

“미안. 설명은 나중에 할게. 저것 먼저 해치우고.”

“……누구냐! 어떻게 결계를 깨뜨린 거지? 설마, 그 검은…….”

타다닷!

이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이찬이 달려들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큿, 안 돼. 그랬다간 대표님이……!”

최세드릭이 애달픈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최이찬이 찌른 것은 이세인이 아니었다.

“으랴아아!”

단검의 날이 가른 것은 이 방의 구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던 검은 상자. 손바닥만 한 크기라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파삭!

힘을 주어 날을 돌리자, 상자가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 갈라진 틈에서 푸시식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더니 이세인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로나가 마도서의 힘을 사용했다. 반투명한 책이 나타나더니 휘리릭 책장이 넘어간다. 이어 오망성 형태의 얼음 화살이 이세인을 향해 날아갔다.

푸욱!

“우읍, 윽……!”

이세인, 아니, 이세인의 몸을 차지한 무언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점점 더 심해지더니 이윽고 입에서 검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쿨럭, 쿨럭! ……어? 여기는……?”

“……대표님!”

최세드릭이 쓰러진 이세인을 일으켰다.

“조심해요!”

검은 액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사람의 형체를 빚었다. 끈적거리는 팔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뻗어 나와 바닥을 기었다.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의 섬세한 결을 날카로운 못으로 긁어 대는 듯해 속이 울렁거렸다.

【아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열쇠만 있으면 나도 그곳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검은 덩어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 말에는 어떤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피하려 했지만 그것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윽고.

탁!

검은 점액질 인간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으, 으윽, 이거 놔……!”

엄청난 힘이었다. 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떼어지지 않는 이 검은 점액질은 소멸하는 던전의 틈새, 깊은 심연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찰나의 순간에 눈앞은 새카만 어둠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할머니가 살려 주신 목숨을 이렇게 어이없이?

“……리을 씨!”

“리을아!”

앞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꼼짝없이 이젠 끝났다 싶은 순간, 눈앞에 하얀빛이 비쳤다. 날카로운 빛의 입자가 내게 달라붙은 검은 점액질을 잘라 냈다.

【크아아아악!】

무참히 공격당한 검은 점액질의 비명을 끝으로 초침 소리가 멈추었다.

띠링.

[던전 소멸이 완료되었습니다.

방문자들의 귀환이 진행됩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던전 탐험 신비의 세계’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500exp를 획득했습니다.]

[명성: 50 / 인기: 100을 획득했습니다.]

[카페 리을의 이름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획득한 인지도를 명성으로 환산합니다. ……완료]

[카페의 등급이 C가 되었습니다.]

[C 등급 보상으로 카페의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더 많은 사람이 카페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름: 카페 리을

등급: C

명성: 1000 / 인기: 2150]

눈앞에 기나긴 시스템 알림이 떴지만 곧장 끝났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제 끝인 거지? 이게 ‘진짜_최종_마지막_final_끝’ 맞는 거지?

“윽…….”

시스템 창을 자세히 살펴보려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1월의 소름 끼치는 추위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추위조차도 기껍다.

“탈출, 한 건가……?”

나는 던전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있던 곳, 다 부서진 창고에 있었다.

함께 돌아온 다른 사람들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최로나와 최세드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찾아 고개를 휘휘 돌리는데 지척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기유현이었다.

“그 둘은 무사해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니 안심하세요.”

아. 그러고 보니 시스템에 ‘방문자들은 자동으로 원래의 장소로 귀환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지. 다행이다. 겨우 어깨에 힘이 빠졌다.

“저기 봐. 다들 무사히 돌아왔어.”

이번에는 최이찬의 목소리. 그리고…….

“저기예요! 저기 있어요!”

멀리서 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겨우 실감이 났다.

진짜 끝났구나.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한계였다.

나는 그대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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