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빅3 길드 중 가장 대규모이자 헌터계의 중요 축인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해체한다니? 당연히 헌터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최세드릭을 설득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세인이 시킨 대로 전투만 하던 헌터의 어리석은 결정’이라느니 ‘결벽증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네 선택이 어떤 영향을 끼칠 줄 아느냐.’ 하고 꽤 심한 말을 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뜻밖에도 최세드릭은 화내지 않았고, 의지는 확고했다.
물론 해체한다고 해서 그 커다란 길드가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최세드릭이 원한 것은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여러 산하 조직들의 독립에 가까웠다.
권리 관계 정리, 분사 작업 등으로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해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싶다.
참고로 독립을 반기는 헌터들도 많았고, 또 비난 외의 다른 의견도 있었다. 이제껏 <씨앤엘>이 틀어쥐고 있던 각 부문이 독립하면서 헌터계에 활력이 돌 거라는 내용이다.
뭐,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최근 권지운이 바쁜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일부 산하 조직이 <백은 길드>에 편입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백은 길드>는 새로운 헌터들과 함께 규모가 커졌고, 큰아버지를 놓친 권지운은 한동안 더 고생할 것 같다.
<씨앤엘>의 지원을 잃은 최세드릭은 앞으로 2위에서 랭킹이 더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런 세간의 수군거림과는 상관없이, 최세드릭은 후련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최세드릭은 <축복의 정원> 출신 힐러에게 사과했다. 회귀 전, 최세드릭의 갑질을 공론화했던 바로 그 힐러 말이다.
나는 우연히 그 광경을 보았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들은 하필이면 본청 앞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내가 심하게 군 일 전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최세드릭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힐러는 한참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최세드릭을 보았지만 결국 사과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씨앤엘>이 잘 나갈 때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다가, 간판 내리는 지금에 와서 사과하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압니다. 내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그런데요?”
“그렇게 생각하시더라도, 내 잘못에 대해 힐러님께 사과드리고자 합니다.”
“흠…….”
긴장감이 감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그들을 보았다. 힐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나도 가족이 아파 봐서 모르는 건 아니에요. 낫지 않는 병이 오래 지속되면 탓할 걸 찾죠. 그게 때로 나이기도 하고, 때로 타인이기도 하고요.”
“…….”
“하지만 인간적 연민이 든다고 해서, 최세드릭 헌터의 사과를 받아 준다거나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네.”
“다시 볼일 없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힐러는 끝내 최세드릭의 사과를 받지 않고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결국 미래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뒤틀렸다. <축복의 정원>이 <씨앤엘>에 합병되지 않게 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씨앤엘>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힐러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최세드릭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최세드릭의 낯에 떠오른 표정은 이제껏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다. 자신을 감싼 여러 겹의 막이 전부 녹아내린 뒤 드러난 그의 진짜 얼굴이 그려 낸 담담한 표정.
이미 저지른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잘못도 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그 엄중한 사실이 최세드릭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쩐지 그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날 최세드릭의 그 모습은 내게 굉장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말 멋진 카페예요. 언니가 정성 들여 가꿨단 걸 알겠어요.”
그때 한 바퀴 카페를 구경하고 최로나가 돌아왔다. 애초에 그리 넓은 건물이 아니다 보니 오래 둘러볼 것도 없었다.
“후후, 귀여운 동물들도 있고요.”
“뀨, 뀨우…….”
“우냐아아(으악, 깜짝이야)!”
갑자기 다가온 최로나를 보고 우리 집 동물들이 놀란 울음소리를 냈다.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데다가 발은 공중에 떠 있다. 히터 앞에서 졸던 동물들이 그녀를 유령이라고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애정이 어린 눈길로 최로나를 보는 최세드릭에게 물었다.
“맞다. 당분간 서울을 떠나 있는다고?”
“어. <씨앤엘>을 정리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진척됐고…… 사실 내가 직접 할 일은 별로 없으니까.”
“아쉽겠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거야. 로나랑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그러다 돌아오면, 다시 시작해 봐야지.”
최세드릭은 잠시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했다.
언젠가 이세인이 처벌을 받은 뒤 돌아오면 다시 처음부터 길드를 만들고 싶다는 말이었다. 소규모라도 좋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셋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그래. 잘되면 좋겠다.”
맙소사. 최세드릭이 그래도 나보다 한 살 연하인데 나만 놓고 부쩍 어른스러워진 기분이 든다.
좀 쓸쓸한 기분도 들고…….
툭. 그때 최로나가 재촉하듯 최세드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최세드릭은 조금 전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돌아오면…… 말인데.”
“응?”
“그, 그러니까 돌아오면, 멋진 로미오가 될 테니까…….”
“아니, 잠깐만. 셰익스피어에서 좀 벗어나면 안 돼? 그거 비극이라니까? 끝에 가서 다 죽는다고. 로나도 있는데 앞으로 잘 살아야지 왜 자꾸 로미오야?”
“마, 맞아! 그렇지. 잘 살아야지, 하하하! 하하하하!”
최세드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로 이 화제가 끝나는 바람에 결국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듣지 못했다.
“왜오옹(우리 집 인간이지만 대단하구나)…….”
“뀨우우…….”
“좀 불쌍한데…….”
뒤통수에서 우리 집 식구들의 따가운 눈길이 느껴진 건 기분 탓일까.
“오빠, 요즘 무지개 슬라임 콜라보 호빵이 인기인 거 알아?”
불쑥 최로나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어, 엉? 그게 뭔데?”
“몰라? 겉은 쫀득하고 안은 촉촉한 크림이 들었대. 36종 무지개 슬라임 스티커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그 크림이 있잖아…….”
최로나는 정말 음식의 맛을 잘 묘사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우리 집 동물들마저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왜오오옹(호오, 그건 맛있겠구나).”
“뀨우, 뀨우우!”
“……해서, 나도 먹어 보고 싶어.”
서글프게 최로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동생을 무척 아끼는 최세드릭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이따가 사 줄게.”
“그런데 이 호빵 편의점 한정 상품이라 입고되자마자 금방 품절된대.”
“그, 그래?”
“지금이 마침 딱 입고될 시간이네. 하아…….”
드르륵!
최세드릭이 다급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 내가 지금 얼른 가서 사 올 테니까!”
“뭐? 잠깐, 세드릭. 여기서 편의점 엄청 먼데?”
“괜찮아! 뛰어갔다 오면 금방이야.”
타다닷!
말릴 틈도 없었다. 최세드릭은 그대로 무지개 슬라임 콜라보 호빵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준비된 발닦개구나…….
미소로 최세드릭을 배웅한 최로나는 남은 생강레몬차를 호로록 마시고 이렇게 말했다.
“오빠한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어서요.”
나는 그제야 그녀가 일부러 최세드릭을 밖에 보냈음을 깨달았다.
“후후, 걱정 마세요. 우리 오빠는 눈치가 없는 듯 있으니까 너무 빨리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신중하고 침착한 눈빛이었다.
“요정안은 한 세대에 한 명만 나타나요.”
곧바로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약간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할머니와 로나의 눈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나는 언니의 할머님께 요정안을 계승한 셈이에요. 이 눈의 힘이 있었기에 마도서를 삼키고도 무사했고, 긴 잠에서도 깨어나는 게 가능했어요.”
“…….”
“그러니까, 언니가 지금 여기 살아 있어서 내가 살아 있기도 한 거예요.”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잘 와 닿지 않는 모양이네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자그마한 몸이 스르륵 의자 위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보는 그녀의 눈에 별이 들어찬다.
“인과를 읽는 눈. 쉽게 말하면 그냥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는 힘이에요. 어제 있었던 일이 오늘을 지나 내일 어떻게 변화할지 읽어 내지요.”
“…….”
“그건 굉장히…… 쓸쓸한 일이에요.”
나는 최로나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꼭 누군가가 나를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느낌은 무척 막막해서, 그녀가 말하는 쓸쓸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인과들을 읽게 되죠. 한 방향으로 흐르는 물줄기에서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물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헤엄을 치지 못하고, 하염없이 물줄기만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에요. 별의 관조자. 다르게 말하면, 그냥 관조하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
만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소녀다. 그런데도 로나가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할머니와 같은 힘을 지녔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누워서 꿈을 꾼 아직 어린 몸. 잠든 동안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았다고 말한 소녀. 그러나 로나의 눈에는 결코 관조자라고 부를 수 없는 생기 있는 빛이 충만했다.
“그래도 나는 오빠가 있어서 괜찮았어요. 끝없는 꿈에 막막하고 지칠 때면 오빠가 옆에서 내 이름을 불러 주었죠. 그래서 나는 쓸쓸하지도 괴롭지도 않았어요.”
소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는 어떤 서글픔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다정함만을 머금고 로나가 말을 이었다.
“언니, 이건 짐작이나 추측이 아니고, 내가 단지 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도 아니에요. 그냥 변하지 않는 진실일 뿐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요.”
이어질 말이 아주 중요한 말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로나의 말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언니의 할머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언니가 있으니까, 언니가 살아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을게요. 운명이나 인과 따위가 사랑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언니가 살아난 건 운명 운운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언니를 아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흑.”
아. 안 되겠다. 눈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나는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았다.
“하나만……. 로나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열쇠라는 건 대체 뭐야? 내가 그 열쇠인지 뭔지인 건 알겠어. 그렇다면 열쇠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