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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52/192)

152화

소녀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물줄기가 한곳으로 흘러가듯 모든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도달해요. 언니도 마찬가지예요. 머지않아 미래에 도달하겠죠.”

“…….”

“미안해요, 이렇게밖에 말 못해서. □□ □□□가 이렇게, 눈을 치켜뜨고 감시하고 있어서요. 하지만 핵심은 이거예요.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도달하는 것.”

그때, 다시 카페 문이 열렸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헉, 헉! 로나야, 미안. 무지개 슬라임 호빵 품절이래…….”

편의점까지 뛰어갔다 왔는지 최세드릭은 금방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무지개 슬라임 호빵이 들려 있지 않았다.

“흑, 마지막으로 딱 한 개 남아 있는 걸 집으려고 했는데, 다른 손님이 나를 알아보는 바람에 사인을 해 주다 보니…….”

“괜찮아. 사실 못 사 올 거 알고 있었어.”

“뭐……!”

동생의 불신에 최세드릭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거, 걱정하지 마. 오빠가 공장을 털어서라도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그렇게까지는 됐어……. 그보다, 그건 뭐야?”

최로나는 최세드릭의 손에 들린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어? 이거? 빈손으로 돌아오기 뭐 해서 사 왔는데.”

비닐봉지 안에는 떡볶이와 순대가 들어 있었다. 상당한 양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 같이 나눠 먹기로 했다.

어차피 카페 영업을 마칠 시각이었으니까. 카페 테이블에서 다 같이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네.

“……윽.”

아스는 생각보다 떡볶이가 매웠던 탓에 한입 먹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닌 척하려 했지만 얼굴에 다 티가 났다. 역시 외국인이라 그런지 매운 건 잘 못 먹는구나.

아니, 가만. 마왕을 외국인이라고 해도 되나? 으음, 대충 비슷한 거라고 치자.

나는 괴로워하는 아스의 컵에 탄산음료를 가득 따라 주었다.

최세드릭은 접시에 내장을 뺀 순대와 떡볶이를 담아 최로나 앞에 놓았다.

“자, 이거 먹어. 로나 너 내장 못 먹잖아.”

“하아, 오빠. 나 지금 완전 의미심장한 신비의 소녀 콘셉트 잡고 있거든? 떡볶이를 먹는 신비한 소녀가 대체 어디 있어?”

“어, 그래?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떡볶이는 먹고 하면 안 돼? 너 이거 좋아하잖아.”

“뭐…… 맛있네.”

“그렇지?!”

배도 채우고 다시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시간은 어느덧 밤이었고, 이제는 정말로 남매가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최세드릭이 말했다.

“돌아오면 또 보자.”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와. 로나도. 오늘 고마웠어.”

마지막으로 로나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이온은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고?”

나는 무심코 검은 점액질 덩어리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섬뜩한 감촉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온이라고 불린 그 검은 덩어리는 마지막에 무참히 부서져 소멸하는 던전 안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의 마지막을 똑똑히 보았다.

어떻게 아직 살아 있을 수가 있지?

“그건 인간이나 몬스터 따위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위대한 자의 화신체, 즉, 신에 가까운 존재니까요. 상당한 힘을 잃긴 했지만…… 아직 소멸하지 않았어요.”

로나의 눈빛은 어쩐지 이온을 연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소녀가 몸을 돌렸다.

* * *

최세드릭 남매가 돌아간 뒤, 나는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다.

언제나처럼 맑고 푸른 하늘, 거대한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나를 맞이했다. 요 며칠 커피 열매를 따지 않았더니 불그스름한 커피 열매가 아주 많이 열렸다.

나는 우선 황금삼각뿔소의 축사에 들렀다.

황금삼각뿔소는 자신의 축사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도통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밥도 알아서 풀을 뜯어 먹고, 물도 알아서 마셨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얼굴을 볼일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우유를 받아 갈 때 정도일까.

“코롱아, 뭐하니? 안 심심해?”

코롱이란 우리 집 황금삼각뿔소의 이름 코르넬리아 롱기누스를 줄인 것이다. 역시 코르넬리아는 너무 긴 데다, 외국 이름이라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행히 코롱이도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해서, 축사 밖에서 부르면 “음메에에!” 하고 대답하곤 했었는데.

“…….”

답이 없다. 무슨 일이지?

“코롱아, 집에 없어? 어딨니?”

이상하다. 축사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코롱이는 여전히 기척이 없다. 자는 건가? 나는 코롱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발소리를 줄이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코롱아……?”

아, 저기 있었구나.

툭. 코롱이의 등을 가볍게 두들긴 순간이었다.

“뀨, 뀨우웃!”

폴짝. 라임이가 안에서 튀어나왔다.

“라임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뀨…… 뀨웃, 뀨우우!”

슬라임 어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알겠다. 라임이는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몸을 통통 튕기며 코롱이에게서 멀리 떨어진다.

“음메에에!”

그리고 커다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는 코롱이.

이 상황 설마…….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대체 뭔데. 이 로맨스물에서 눈치 없이 데이트를 방해하는 조연 캐릭터1이 된 기분은 뭐지?

“너희…… 설마 그렇고 그런 사이야?”

어쩐지 요즘 라임이가 얌전하더라니. 뒤에서 코롱이랑 만나고 있던 거였어?

이럴 수가. 모르면 좋았을 정보를 알고 말았다.

“음메에에!”

알았으면 빨리 나가라는 듯 코롱이가 머리로 나를 밀었다. 기껏 찾아왔다가 tmi만 얻고 나는 축사 밖으로 쫓겨났다.

정말 어이없다. 너희 둘이서만 있고 싶다 이거지. 그래, 알겠어.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냐.

그렇게 무력하게 축사에서 쫓겨난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할머니의 오두막이었다.

“…….”

아. 이젠 한계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점점 발은 빨라져, 오두막의 문고리를 당길 때는 거의 뜀박질이 되었다.

탕!

문을 닫고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계속 참아 왔던 것이 터져 나왔다.

“흑…….”

참아 보려고 했는데.

가게에는 아스랑 동물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서 괜히 코롱이도 보러 간 건데. 역시 안 되겠다.

“흐엉…….”

나는 꼴사나운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힐러에게 사과하는 최세드릭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불합리한 감정임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최세드릭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구나.

나는 아직 도무지 사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데.

던전 안에서 성녀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계속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알아 버린 사실이란 손톱 밑에 박힌 가시와 같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다른 일에 열중하는데도 따끔, 하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따끔거림은 점점 커져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흑, 흐어엉…….”

오두막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아주 마음껏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할머니가 나를 살리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셨다고?

로나의 말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러나 감사한 마음과 깊은 그리움의 한편으로 막막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러저러한 미래를 위해 나를 살렸으니,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알려주면 좋겠다. 그게 무엇이라도, 던전에서 구르는 거든 F급 몸으로 몬스터에게 덤비는 거든 뭐든 할 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똑바로 못하면 어떻게 해? 기껏 할머니가 나를 살려 주셨는데, 내가 허투루 살아서 그 마음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면 어떡해?

도달하지 못한 미래라는 게 대체 뭔데?

그런 불안이 울음이 되어 엉망진창으로 흘러나왔다. 여러 감정과 사고가 실타래처럼 엉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 울다 고개를 드니 눈앞에는 크투가가 있었다. 내가 울면서 무의식적으로 소환한 걸까.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가만히 나를 보았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흑…….”

나는 울음이 섞여 엉망진창인 말로 크투가에게 내가 알게 된 사실을 털어놓았다.

최초의 균열이 일어났을 때 원래 나는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

할머니께서 나를 살리고 남은 수명의 절반을 잃으셨다는 것도.

어쩌면 나는 크투가에게 비난이나 설교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의 수명을 앗아갔다는 원망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나 크투가는 이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비록 깊은 슬픔이 어렸을지언정 놀라움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나를 위로하는 손길에서, 나는 또 한 가지 배려를 깨닫고야 말았다.

아. 알고 있었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크투가는 내가 말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왜…… 말 안 했어요…….”

“네가 모르길 바랐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크투가가 느꼈을 감정을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다만 나를 둘러싼 많은 애정과 배려에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을 느꼈다.

* * *

망했다.

거울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떡하지, 진짜 망했다.

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실컷 울고 나서 진이 빠진 뒤 현타가 오는 일 말이다. 이미 울음은 그쳤고,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지 하는 고민이 슬며시 머리를 든다.

“네……. 괜찮아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페페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내가 울음을 그친 후, 크투가는 몇 번이나 괜찮은지 확인한 뒤 돌아갔다. 정말 민망했다.

어쨌거나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리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해졌다. 그 고요한 마음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우스울 정도로 단순했다.

내가 미래를 어떻게 알아.

운명이라니, 나는 원래 오컬트 안 믿는다.

삽질 타임은 이만하면 되었다. 슬픔은 여전히 선연하지만, 여기서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 그래, 카페 경영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F급 카페 주인이니까.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죽음으로 이별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발에 차일 만큼 많다. 적어도 내게 닥친 것이 나만의 특별한 불행은 아닌 셈이다.

음, 이걸로 끝.

후회도 사과도 훗날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 그때 하자.

문제는 엉망진창으로 운 탓에 눈이 퉁퉁 부어 버렸다는 점이다. 거울 속에는 물에 불린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이 보였다.

아스와 동물들에게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데.

얼굴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겠지. 그러면 성녀와 한 대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이미 실컷 울고 마음이 진정되었는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내 행동은 첩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러웠다.

띠링.

“으, ……흡! 헉!”

갑자기 뜬 시스템 알림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입을 닫고 새로 뜬 알림을 확인했다.

[서브 퀘스트: 은밀하게 방으로 가기

저런, 큰일이군요.

마음만은 첩보 영화의 주인공. 조용히 방으로 돌아갑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기: (미완료)

보상: 은밀한 스파이(업적)]

잠깐, 이 퀘스트 뭔데. 나 놀리는 건가? 놀리는 거 맞지?

그보다 이 시스템 놈, 남이 찔찔 우는 걸 보고 있었단 말야? 현타가 더욱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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