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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153/192)

153화

‘아무도 없는 거 맞지……?’

나는 이공간 밖으로 나와 살며시 주변을 살폈다.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미음이는 한참 드라마를 보는 중이다. 아스는…… 방에 불이 켜져 있으니 거기 있겠지. 라임이는 여전히 코롱이랑 노는 중.

좋아, 지금이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 번 얼굴을 씻었다.

약간이나마 부기가 가라앉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그래도 물에 불린 밀가루 반죽보다는 조금 인간에 가까워졌다.

이제 살며시 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오늘의 과업은 클리어한다.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으, 으아아아악!”

“으아아악!”

불쑥 등 뒤에서 들린 아스의 목소리에 나는 비명을 질렀고, 덩달아 아스도 같이 비명을 질렀다.

얄밉게도 곧장 시스템 알림이 떴다.

[안타깝습니다! ‘서브 퀘스트: 은밀하게 방으로 가기’에 실패했습니다.]

[‘업적: 은밀한 스파이’를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얄밉다.

“……놀랐잖아.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야?”

다행히 전등이 꺼진 상태라 아스에게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대답했다.

“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놀라서 그러지.”

“그냥 부른 건데.”

“아하하……. 오늘 일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좀 피곤하네. 아스도 얼른 자러 가.”

그렇게 얼버무린 뒤 얼른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만. 누나, 괜찮은 거야?”

아스가 가까이 다가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응? 당연히 괜찮지. 그럼 잘 자.”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아스에게 손을 흔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하아.”

문을 닫고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리자 아스가 나지막한 한숨을 뱉고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휴, 들킬 뻔했다. 이상한 점 없었지? 나 완전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인 것 맞지?

아까의 웃기지도 않은 퀘스트를 실패한 거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괜히 아스에게 부은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하루의 끝이다. 아직 졸리진 않지만 누워서 좀 뒹굴뒹굴할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는 그때였다.

톡, 톡, 톡.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규칙적으로 문이나 뭘 두드리는 소리 같은데…….

문이라고?

소리는 방문이 아니라 창문 쪽에서 들렸다. 하지만 여기…… 2층인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오컬트는 믿지 않지만 공포 영화는 무섭단 말야.

톡, 톡, 톡. 다시 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기에는 신경 쓰인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악몽을 꿀 것 같다. 으음……. 그래, 차라리 밖을 확인하고 마음 편하게 뒹굴뒹굴하자.

나는 살짝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 유현 씨?”

창문 아래에 기유현이 서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하얀 뺨이 또렷이 보였다. 그는 엷은 웃음을 머금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행이에요. 아직 깨어 있었군요.”

“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잠깐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네, 잠시만요…….”

나는 후다닥 외투를 꺼내 팔을 꿰어 넣었다. 당연하지만 가게 출입문은 잠긴 상태다. 아래로 내려가 문을 열어 줄 요량이었지만,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휙. 기유현은 건물의 튀어나온 벽돌을 붙잡고 가볍게 몸을 끌어올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창밖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다.

창문 아래에는 받침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자그마한 턱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는 놀랍도록 중심을 잘 잡았다.

올라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열린 창 너머로 기유현을 마주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쨌건 공포 영화보다는 그의 잘 빚어진 얼굴이 기꺼웠다.

“사실은 <카페 리을> 생강 페스티벌 때 오고 싶었는데요.”

“아하하, 좀 늦었네요. 낮에 오면 커피라도 드릴게요.”

“…….”

그때, 내 부은 눈가에 기유현의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차. 방 안에 불은 꺼져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기유현은 무심코 내게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둬들였고, 나는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찬물에 세수 다섯 번만 더 할 걸 그랬다.

다행히 기유현은 내게 왜 울었냐 따위의 물음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기자들이 찾아왔다고 하던데. 성가셨을 텐데 미안합니다.”

“그거 때문에 온 거예요?”

“글쎄요. 그런 것도 있고, 겸사겸사.”

“괜찮아요. 기자가 나더러 그러더라고요. 무원이랑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뭐, 유현 씨 정체가 샌 건 그렇다 치고 친한 건 사실이잖아요.”

열린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외투를 입었지만 한겨울 심야의 바람은 옷깃 안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차갑게 식혔다. 춥다.

이럴 게 아니라 추우니 잠깐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까. 그런데 기유현은 다른 말을 꺼냈다.

“리을 씨,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어차피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볼 계획이었고, 찬바람에 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네, 괜찮아요. 지금 나갈게요.”

이번에도 그는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살짝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내 등을 받치더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희뿌연 빛이 몸을 뒤덮고 잠시 뒤, 나는 낯선 곳에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어디예요? 설마, 던전은 아니죠?”

“사람을 미친 던전 오타쿠처럼 보지 말아 주세요……. 그냥, 제주도예요.”

“아하, 그렇구나, 제주……. 네?”

* * *

“오서호 헌터, 유현 씨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런 내 질문에 오서호는 한순간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나와 기유현의 기나긴 우정의 역사가 듣고 싶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사람, 연기가 아니라 외모로 배우가 된 건가 싶을 정도로 어색한 투였다.

“그럴 리가요. 데뷔 때부터 연기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데뷔작 못 봤어요? 상도 많이 받았는데. 마침 이번 달부터 vod 서비스가 시작되니 꼭 한번 봐 주세요, 하하하.”

그런 말을 한차례 한 뒤에야 오서호는 본론을 꺼냈다. 아까의 넉살스러운 말 따위는 금방 잊어버릴 만큼 놀라운 서두였다.

“저는 교단 출신입니다.”

“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짐작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별의 지혜 교단>. 그치들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최초의 균열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그곳에, 유현이와 제가 있었죠.”

기유현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지금의 기유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말이었다.

“그날 교단은 수학여행을 간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

나는 예전에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본 환상을 떠올렸다.

어느 강당에서 어린 기유현을 만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어린 기유현은 수학여행을 갈 거라고 말했었지.

하지만 그때 그곳에 오서호도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환상 속에서 본 참혹한 광경을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순간에 각성한 기유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오서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날 열이 나서 수학여행 오리엔테이션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날은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교단의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꼭 전원 참석해야 한다고 당부했거든요.”

“…….”

“가기는 싫은데 혼나는 것도 무서워서 숨어서 찔찔 울고 있었더니…… 크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어릴 때는 좀 소심했습니다. 아무튼, 유현이가 제게 말하더군요. 숨어 있으면 내가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방에 숨어 있으면 선생님도 모를 거라고.”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수학여행을 출발할 시각이 되어서도 유현이는 오지 않았고, 설마 나만 놓고 간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한 마음에 저는 강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광경을 보았죠.”

오서호는 무엇이 어떻게 끔찍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창백한 낯빛에서, 그가 나와 같은 것을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겁이 많던 저는 그대로 도망쳤고, 다른 어른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언뜻 그의 눈에 비쳤다 사라진 감정은 죄책감을 닮았다. 나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곧 헌터계는 큰 소란을 겪게 됩니다. 하나는 <각성자 센터>가 사라지고 <던전관리청> 체제로 개편된 것. 두 번째는 무원이라는 절대적 강자가 나타난 것.”

“…….”

“그때 나는 일반인으로 살았어서 유현이가 무원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다만 우연히 유현이가 살아 있고 헌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장 달려가서 만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재수 없는 꼬맹이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때의 말투를 재현하려는 듯 오서호가 목소리 톤을 바꾸었다.

“누구? 모르겠는데. 볼일 없으니까 꺼져.”

정말 기유현이 그렇게 말했다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오서호를 보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유현이가 헌터가 되었으니 과거의 인연은 모른 척하는 줄 알았습니다. 교단 같은 놈들을 보호자라고 믿고 따르다 끔찍한 경험을 한다는 거, 좀 구질구질하잖아요.”

“…….”

“요즘 이런 스토리 들고 가면 바로 까인다니까. 헌터가 되었다고 태도가 달라지는 거야 뭐 흔한 일이고.”

“유현 씨는 그런 사람이…….”

“네, 아니죠.”

오서호가 단호하게 내 말을 받았다.

“어쨌건 빈정도 상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그대로 잊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저는 환영술사로 각성했습니다.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힘이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서호는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환영을 사용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 때로는 동물이나 곤충까지. 여러 모습으로 환영술을 쓰다가 이윽고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렸다. 환영을 풀고 진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끔찍한 환영 속에 갇히기도 했다. 아무리 가짜라고 되뇌어 봐야 감각은 진실로 지각하며, 두려움은 그대로 느껴진다.

대폭 축약된 묘사였지만 당시 그의 괴로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저를 구해 준 사람이 유현이…… 무원입니다. 아마 우연이거나 변덕이었다고 생각해요. 마구 폭주하는 제 능력을 묶어서, 자기 자신에게는 환영술을 쓸 수 없도록 제한을 걸었어요.”

“잠시만요. 각성자가 다른 각성자의 능력에 개입해서 제한을 거는 게 가능한가요?”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서호가 살짝 웃었다.

“나는 그때 유현이가 화제의 랭킹 1위 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고, 나중에는 화도 났죠.”

“……왜요?”

내가 정말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오서호는 다소 민망한 듯 덧붙였다.

“봐요, 그날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나와 유현이 둘뿐이에요. 그런데 유현이는 선망받는 헌터가 되었고, 나는 각성했다고 하나 내 힘도 똑바로 제어하지 못해 도움을 받았죠. 엉망진창인 내가 부끄러웠어요.”

“그렇다고 해도 오서호 헌터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잖아요.”

“……감사합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튼, 민망해서 참견하지 말라느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화를 내다가 곧, 유현이가 정말로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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