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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154/192)

154화

“각성하고 사람이 바뀐 게 아니라, 각성을 기점으로 예전의 기억 상당 부분이 날아갔어요. 본인은 약간 위화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다시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기유현은 전에 내게, 각성 후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일부가 어딘가로 흘러 들어간 것 같다고도.

그때는 뜻을 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신에 맞서는 일이며 회귀 등 워낙 큰일이 있었으니 약간 기억에 혼선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게 이런 거였나?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분명, 터무니없는 상상일 테지만…….

기유현이 각성한 순간 열렸던 문, 그리고 마신의 게이트에 도달한 순간 일어난 회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기유현의 영혼이 유실되었다면?

그는 지금 괜찮은 걸까?

오서호가 말을 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유현이의 친구, 아니, 베스트 프렌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현 씨가 오서호 헌터를 도와줬기 때문인가요?”

“음, 그런 것도 있지만요.”

오서호는 잠시 턱을 짚고 단어를 고르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기억은 과거를 증명합니다. 어제의 기억이 없다면 내가 어제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현재의 기유현은 완전히 별개의 사람이며, 나와 함께 교단에 있던 유현이는 사라졌습니다.”

“…….”

“하지만 내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기유현을 친구로 여김으로써, 나는 그가 과거와 같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과거의 활달하면서도 친절한 소년으로.”

나는 환상을 통해 본 어린 기유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활달하게,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소년. 가슴속 어딘가가 찌르르 아파 왔다.

과거를 더듬는 듯 씁쓸하게 오서호가 말을 맺었다.

“그러니 설령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를 친구로 여기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 *

차가운 바람이 상념을 일깨웠다.

“으아아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어둠에 잠긴 인기척 없는 바닷가.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고요를 침범했다.

핸드폰 gps로 확인해 보니 정말 제주도가 맞았다.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진 어느 바닷가였다. 기유현이 이동 스크롤을 쓰려는 것을 보았고 또 허락했지만 다짜고짜 제주도에 올 줄은 몰랐다.

뭐, 던전보다는 훨씬 낫지만.

아무튼, 서울보다 남쪽이라고 해서 이곳이 춥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아까 위에 외투를 걸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밤바다와 싸워 이기기에 역부족이었다.

“으으, 추워요…….”

“미안합니다. 날씨를 생각 못 했네요.”

나는 팔짱을 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놀란 기유현이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숄을 꺼내 내게 둘러 주었다. 그리 두꺼운 천이 아니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추위가 가셨다.

“냉기 저항이 걸린 천이니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마워요.”

부드러운 숄에 고개를 파묻다가 문득 의문이 느껴졌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 이 사람은 왜 멀쩡하지?

“유현 씨는 안 추워요?”

“네, 괜찮습니다.”

나는 그의 차림을 자세히 보았다. 겉에는 얇은 코트를 걸쳤고, 안에도 그리 두꺼운 옷은 아니다.

“그 코트도 냉기 저항이 걸린 건가요?”

“아니요, 그냥 평범한 코트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항상 그런 아이템을 걸치고 다니진 않아요.”

아, 그렇구나. 그냥 추위를 안 타는 거였어…….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닌 듯했다. 하긴 밤에 인기척 없는 해변에 용건이 있을 리는 없겠지.

우리는 그냥 시커먼 밤바다를 보며 느리게 걸었다. 기유현의 가지런한 걸음걸이, 하얀 턱선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거나 탁 트인 바닷가에 오니 기분은 좋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제주도는 처음이구나. 회귀 전, 여름휴가 때 친구 신미라랑 여행 가자고 돈을 모았었는데 결국 그 돈은 못 쓰고 회귀했다. 이 시각에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여기는 자주 와요?”

“가끔이요. 기분 전환 삼아.”

그 말에서 나는 문득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말한 어느 소년을 떠올렸다.

기유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각성했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유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과거의 그 소년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만히 바닷바람을 맞는데 불쑥 기유현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네? 아니요?”

기유현은 재차 묻는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내 눈가를 가리켰다. 아. 역시 눈이 부은 걸 봤구나.

“그냥…….”

“……네.”

할머니에 대한 것을 알게 되고, 구구절절한 내 감정을 제하고 나면 결국 하나의 고민이 남았다.

“그냥, 자아 찾기 중이에요. 진로 고민 같은 거?”

“자아 찾기요?”

“학교 다닐 때 찾았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 이렇게 됐네요.”

웃음 섞인 내 말에 기유현이 따라 웃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농담처럼 얼버무리려던 것을 들킨 것 같아 머쓱해졌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왜 카페를 하는지, 왜 나한테 커피 만드는 스킬이 생긴 건지, 다들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서요.”

“그래서 얼굴이 엉망이군요.”

“네? 그렇게 못 봐 줄 정도예요? 확실히 아까 봤을 때 물에 불린 빵 반죽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 번은 세수했는데.”

“아니요, 그 말이 아니라…….”

“…….”

대화의 틈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기유현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도중에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눈가를 훑었다.

장갑을 낀 손은 바람에 식어 차가웠다. 그 서늘한 감촉이 기분 좋아서, 나는 무심코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기유현은 흠칫 놀랐지만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얇은 가죽 장갑 너머로 빠르게 뛰는 그의 맥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결론은 어떻게 날 것 같나요.”

손은 여전히 뺨에 닿은 채였다. 맨살이 닿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 뭐,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을까요.”

민망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후다닥 얼굴을 떨어뜨렸다. 냉기 저항이 걸린 이 숄, 아주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몸뿐만 아니라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따끈따끈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말을 할수록 내 안에서 생각이 정리되면서 분명해졌다.

“사실 처음부터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자기 모든 행동에 어떻게 다 이유를 찾을 수 있겠어요. 태어난 김에 살 듯이, 그냥 하는 거지.”

“…….”

갚을 수 없는 애정에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슬프지만.

“내가 유현 씨처럼 마신을 이렇게 샤샤샥, 해치우거나 멋지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닌걸요. 그러니 내 진로 정도야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요.”

“하하.”

굉장히 태클을 걸고 싶지만 지금은 하지 않겠다는 투로 기유현이 웃었다.

바닷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편의점이 나왔다. 밤 산책을 즐기는 관광객이 드문드문 보였다. 밤인 데다 비수기라 한적할 뿐 성수기에는 붐비는 곳 같았다.

기유현이 편의점으로 들어가더니 따뜻한 캔 녹차를 사 왔다. 마침 근처에 벤치가 있어서 앉아 캔을 뜯었다. 따뜻하다.

나는 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기분 좋네요.”

그러다 그만 손이 미끄러져 캔에 든 녹차를 조금 쏟았다. 나는 놀라서 황급히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아앗!”

휴, 큰일 날 뻔했네. 냉기 저항이 걸린 숄인데 더럽히면 안 되지.

“괜찮으세요?”

그런데 기유현은 내가 손을 데인 것으로 오해하고 내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안 데였어요. 멀쩡해요.”

“아……. 네.”

머쓱하게 웃으며 그가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았다.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어, 왜 그러세요?”

“…….”

손을 꽉 잡자 기유현이 당황했다. 귓불을 약간 붉히고 곤란해하며 말했다.

“리을 씨, 손을 좀…… 놓아주시면.”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깍지를 껴 그가 쉽게 손을 풀 수 없도록 했다.

그리고 반대쪽 손을 그의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목의 맨살이 그대로 손에 닿았다. 내 손가락의 서늘한 감촉에 그가 놀랐고, 귓불의 붉은 기가 더욱 진해졌다.

“잠시만요.”

“그……. 곤란한데요.”

나는 손가락으로 장갑의 끝단을 살짝 어루만졌다. 내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기유현이 쩔쩔 매는 틈을 타 검지손가락을 걸어 단번에 장갑을 벗겼다.

“……!”

그리고 놀랐다.

내 예상 대로였다.

피? ……아니다, 이건.

기유현의 손에는 얼룩덜룩하게 검은 자국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멍 같았지만 좀 더 짙고 거칠었다. 변색된 부분의 피부는 딱딱하게 굳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기유현의 소매도 끌어올려 보았다. 검은 자국은 팔꿈치 위쪽까지 번져 있었다. 자국은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그의 팔을 물어뜯은 흉터처럼 보였다.

“이거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유현 씨, 혹시 아팠어요?”

“괜찮아요. 고통도 없고요. 보기 흉하니까 장갑 돌려주세요.”

기유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장갑이나 챙겼다. 하지만 저런 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잠깐. 괴물 나뭇가지 던전에서 보스와 싸울 때, 기유현이 잠시 아파하지 않았던가? 나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입에 올렸다.

“백광…… 그 스킬 때문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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