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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155/192)

155화

내가 도무지 장갑을 돌려주지 않을 기색이자 포기한 듯 기유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반대쪽 손으로 상처가 드러난 손을 감싸고 말했다.

“보통은 이렇지 않아요. ……정말입니다. 그때는 보스를 상대하느라 일시적으로 과부하가 걸렸을 뿐이에요.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유현 씨 일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강한 스킬이 그만큼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권지운은 늘 포션을 달고 살고, 주노을도 강한 몬스터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피를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막강한 권한을 지닌 기유현의 스킬은 어떨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그래서 저렇게 팔을 다친 건 아닐까.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사건이 끝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왜 기유현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전화 연결이 안 되었을 때 한 번쯤은 의심했어야 했는데.

쌍둥이는 카페에 왔을 때 ‘기유현은 사정이 있어서 못 왔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그 사정이라는 것이, 그동안 거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아파서였다면?

“…….”

기유현이 슬프게 말했다.

“그런 표정을 할까 봐 만나러 안 온 건데 결국 들켰군요.”

“내 표정이 어떤데요?”

“아까보다 더 엉망이에요.”

“……하하.”

웃으려 했는데 잘 안 됐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냥 겉에 흉한 자국이 생긴 것뿐이에요. 아프지는 않아요.”

“거짓말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생긋. 기유현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 얼굴만 봐서는 정말로 괜찮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스 표창장 수여식 날 유현 씨 왔었잖아요. 금방 돌아갔지만. 그때 혼잡한 통에 나랑 부딪친 거 기억 안 나요? ……열났었잖아요.”

아주 잠깐 닿았을 뿐이어서 당시에는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떠올리니 알겠다. 그때 기유현은 열이 펄펄 끓는 상태였다. 그래서 일찍 돌아간 거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기유현이 항복 선언을 하듯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하겠다는 거예요? 벗겨지지 않는 장갑, 뭐 이런 아이템을 주문하려는 건 아니죠?”

“좋은 생각이군요. 주문을 넣어야겠어요.”

“……유현 씨.”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 정말로 조심할 테니까 표정 푸세요.”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모습이 쓸데없이 잘생겨서 더 얄미웠다. 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퍼부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벤치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숄의 끝자락을 들었다.

“이거 같이 덮을래요? 커서 둘이 덮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기유현은 어쩐지 쭈뼛쭈뼛한 태도로 내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팠다면서 찬바람을 맞으면 어떡해요?”

“사람을 무슨 개복치처럼…….”

“그러지 말고 얼른요. 이렇게 어깨에 같이 두르면 딱 맞을 거 같은데.”

기유현은 맥없이 한숨을 내쉴 뿐 끝끝내 숄을 덮지는 않았다. 다시 내 몸에 숄을 둘러 주더니, 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리을 씨, 혹시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말을 하나요?”

“이런 말이라뇨?”

“그, 숄을 같이 몸에 두르자거나.”

“에이, 다른 사람한테는 당연히 안 하죠.”

“……그래요?”

기유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를테면, 아주 부드러운 깃털로 손을 간지럽히면 저런 얼굴이 될 것 같았다. 덩달아 나까지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되어서, 황급히 덧붙였다.

“이거 유현 씨한테 빌린 건데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두르라고 해요?”

“하아…….”

우리는 잠시 그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이따금 길을 비출 뿐, 주위는 적막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산뜻했다. 모처럼 바다를 봐서 그런가. 확실히 그의 말대로 기분 전환하기 좋은 곳이었다.

좋아, 올해 여름에야말로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가야겠다.

가게만 지키는 미음이랑 라임이도 데리고 다 같이 말이다. 수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음, 멋진 생각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벤치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손에 기유현의 손이 닿았다. 여전히 내가 그의 장갑을 뺏아 든 상태라 맨살이었다.

손을 치워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기유현이 손을 치우지 않길래 나도 그대로 두었다. 살짝 닿은 손가락에서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감각은 온통 손끝에 쏠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아프면 쉬어야죠. 왜 만나러 왔어요?”

“보고 싶어서요.”

“…….”

그렇게 말하니 무척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리고 리을 씨 전화를 못 받은 게 신경 쓰였는데. 깨어나서 보니 다시 걸기에는 너무 늦어서.”

“……잠깐만요, 의식을 잃었었어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하하.”

“지금 웃음이 나와요?”

기유현은 면목 없어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카페 앞에 와 있었어요.”

그때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고, 살짝 붉은 기를 띤 뺨과 날카로운 턱선이 드러났다. 미소에 약간의 애달픔을 더한 눈이 나를 본다.

나는 생각했다.

내게 닥친 고난이 나만의 특별한 비극이 아니듯, 기유현의 비극도 어쩌면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보편적인 비극을 겪으며 산다. 최초의 균열, 그리고 대던전이 발생한 이후 일어난 수많은 균열과 던전 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이 사람의 비극은 어째서 이렇게 마음에 와 닿을까.

단순한 염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손에 난 상처를 가렸다고 하는 행동이 나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하필이면 오늘 나를 만나러 와서?

답이 가까이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찾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뭘 돌이킬 수 없는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벤치에 올려놓은 손은 여전히 서로 닿은 채였다.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기유현은 다시 나를 가게로 데려다주었다. 아스와 동물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2층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간단하게 제주도를 오갈 수 있다니, 항공사들이 다 망하진 않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기유현은 단호하게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이동 스크롤이란 거, 상당히 비싼 모양이다. 구체적인 가격은 생각하지 않는 걸로 하자.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에 기유현은 의아한 말을 하나 남겼다.

“아. 내일 놀라지 마세요.”

무슨 뜻이지? 내일 왜 놀라? 놀랄 일이 어디 있…….

“왜옹.”

“……으아아악!”

놀랐다.

* * *

내 움직임은 완벽했다.

그야말로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은밀함.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고 아무 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미음이가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오옹…….”

어둠 속에서 미음이가 황금빛 눈을 빛냈다.

“미…… 미음아, 드라마 보던 거 아니었어?”

“내가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보는 줄 아느냐!”

“보잖아.”

아침 드라마부터 수목 드라마도 모자라 내 넷플릭스까지 보고 있잖아. 인세에 적응하다 못해 풍부한 콘텐츠 시대를 만끽하고 있으면서.

“캬갸옭! 그게 문제가 아니잖느냐.”

파바밧. 미음이가 사정없이 앞발을 날렸다. 오랜만에 맞는 냥냥 펀치는 제법 매웠다.

“어딜 갔다 온 거냐! 키야옹!”

“아하하……. 잠깐 잠이 안 와서 바람을 쐬고 왔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설픈 변명이기는 했다. 역시나 미음이는 전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다 봤다, 왜옹! 그 인간이 엄청나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너를 쳐다본 걸 모를 줄 아느냐!”

기유현을 만난 걸 들킨 건 그렇다 치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갈 기미다. 나는 미음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마침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미음아, 왜 유현 씨한테는 데면데면하게 대해?”

우리 집 고양이의 손님들에 대한 태도를 되짚어 보자.

최이찬한테는 늘 놀아 달라고 조른다. 오서호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다른 손님들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즐겼다.

그러나 기유현은 봐도 못 본 척, 피하는 기미였다. 그에게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내 물음에 미음이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연하지 않느냐.”

“당연하다고?”

“그자는, 그러니까…… 위대하신 시스템이……. 왜오옥! 그, 그냥 고양이가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뜻을 잘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가 싫어하는 인간이 뭔데?”

“그런 게 있다!”

“막 백합 냄새라도 나? 향수는 안 뿌린 거 같던데…….”

“그 인간이 향수를 뿌렸는지 안 뿌렸는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미음이가 펄쩍 뛰어 오르더니 묵직한 몸을 내게 부딪쳤다.

“으어억!”

아프다. 진짜 아프다. 이 소란에 결국 라임이와 아스까지 깨 버렸다. 아무 일도 아니라며 그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다시 기유현이 남긴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내일 놀라지 말라고?

이미 여러 번 던전에 처넣어지기까지 해서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뭐…… 별일 아니겠지?

* * *

다음 날 아침.

일주일 동안 ‘카페 리을 생강 페스티벌’을 무사히 마치고 맞이한 오늘은 정기 휴일이다.

특별한 일정도 없겠다, 다 같이 느긋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고, 미음이와 라임이 몫의 밥도 그릇에 가득 담아 주었다.

“왜오옹!”

미음이가 재빨리 앞발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밟았다.

“미음아, 밥 먹을 때는 텔레비전 금지야.”

“……냐아아, 내게 그런 말을 해도 되겠느냐!”

이 고양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독심술이나 텔레파시 능력이 없어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시선이었다.

‘방해하면 말하겠다.’

아니, 그냥 기유현이랑 바람을 쐬러 갔다 온 것뿐이잖아. 말 못 할 일이나 뒤 구린 짓을 한 건 아니라고.

“……왜 그래? 역시 어제 무슨 일 있던 거지?”

아스가 의심 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으응, 아, 아니야. 밥 먹자.”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어제 일을 꺼내기는 굉장히 민망한 기분이다. 나는 맥없이 미음이의 앞발 앞에 리모컨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한테 지다니 인간으로서 위기감이 드는구나.

그때,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기다가 그만 리모컨을 눌렀다. 채널이 바뀌자 미음이가 꼬리를 펑 터뜨리며 화를 내려 했다.

“캬갸갸옭!”

“뀨우우우!”

“미음아, 라임아, 그런 걸로 싸우지 마. ……엥?”

나는 채널을 바꾸려 리모컨을 집어 들다가 깜짝 놀랐다.

아침 토크 방송에 이초록이 출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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