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92)

156화

화면 아래쪽에 뜬 자막은…….

‘기적의 던전 식물, 만드라고라던전생강으로 겨울철 면역력 UP’

-오늘은 이초록 박사님 모시고 겨울철 면역력 증진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볼 텐데요. 이초록 박사님,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이 면역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요?

-네. 요즘 같은 날씨에 더욱 좋은 던전 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던전 식물이라고 해서 몬스터라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몬스터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만드라고라던전생강은 어떤 식물인가요?

-1등급 청정 던전 안에서만 자라고 특수한 영양제가 필요해 아주 귀합니다. 그래서 황금빛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고요. 던전의 5대 컬러 식물로도 꼽히는데…….

“…….”

참고로 1등급 청정 던전이란 개념은 없다. 황금빛 다이아몬드라는 별명도 마찬가지며, 던전의 5대 컬러 식물이라니 대체 그런 걸 누가 선정한단 말인가.

즉, 실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설명. 어쨌거나 이초록은 실제와 다를지언정 절묘하게 건강 방송에서 인기를 끄는 키워드를 강조해 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곧바로 시작되는 홈쇼핑. 이번에도 이초록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가정에서도 손쉽게 기를 수 있는 만드라고라던전생강 키트를 능수능란하게 팔아 치웠다.

-지금 주문하시면! 사은품으로 MBTI별 던전 식물 테스트 책자를 드립니다! 지금 이 방송에서만 받을 수 있는 특가 구성입니다!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적절한 멘트까지.

“허어…….”

것 참, 뭐랄까…….

이초록이 역시 던전 식물이 좋다며, 과일 가게를 접고 던전 식물 농원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과일 가게 경영 경험을 통해 놀라운 사업 감각을 익힌 모양이다.

지난 세피로트 가지 사건으로 인해 만드라고라던전생강에 대해 세간의 주목도가 남다른 상황이기는 했다. 이초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판매에 나섰다. 그리고 던전 식물을 대중화할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감성까지.

‘의외로 어디서든 살아남을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어쨌건 갑자기 아는 사람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은 놀라운 기분이구나.

나는 이초록의 사업 수완에 감탄하며 다시 채널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미음이가 보고 싶어 하는 아침 드라마가 나왔다. 화면 속에서는 한참 중요한 장면이 진행 중이었다. 여주인공이 악역에게 반격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놓고 열중할 정도였다.

그리고 고구마 뒤의 사이다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뉴스 속보입니다!

“왜오오오옼! 너무한 거 아니냐!”

미음이가 풀쩍풀쩍 뛰며 항의했다. 그러나 속보는 무정하게 드라마를 끊고 뉴스로 화면을 바꾸었다.

그보다, 갑자기 속보라니 무슨 일이지? 또 균열이라도 터진 건가? 지긋지긋한 던전 같으니!

뜻밖에 화면에 나온 것은 던전 속보가 아니라 어느 기자 회견장이었다. 곧 기자 회견의 주인공이 나타나 중앙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유현 씨……?”

웅성거림이 커졌다가 천천히 잦아든다. 주위가 충분히 고요해졌을 때, 기유현이 똑바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네, 제가 대한민국 헌터 랭킹 1위, 무원입니다.

“……쿨럭, 쿨럭!”

놀라지 말라니, 이걸 어떻게 안 놀라?!

* * *

“크으…… 읏…….”

인기척 없는 어느 곳.

검고 끈적한 액체가 바닥에 고였다.

혼탁한 액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빚기 시작했다. 먼저 팔이 생겨나고, 다음으로 다리가 바닥을 딛는다. 그것은 이윽고 얼굴을 빚어내고 눈을 뜬다.

그러나 그 모습은 완전하지 않다.

팔은 제멋대로 뻗었고 다리는 제대로 걷지 못한다. 얼굴은 절반이 넘게 녹아내려, 멀쩡한 부분이라곤 왼쪽 눈뿐이었다.

마지막 일격이 예상보다 강력했다. 이만큼 몸을 수복하는 데도 제법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크윽…… 읏, 크…… 크하하하하!”

그러나 그것, 이온은 환희했다. 제대로 빚어지지 않은 입을 비틀어 열고 광소한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억겁의 시간을…… 실로 억겁의 시간을 넘어서 이곳에 다다랐다.

까마득히 먼 옛날,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최초의 시간선. 이온은 대던전 《어비스》에 봉인된 마신을 부활시켜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시스템 □□ □□□는 시간을 되감았다. 예정된 멸망을 피해 끝없이 같은 시간대를 반복하는 무한 나선에 세계를 가뒀다.

그러나 우주 전체의 시간을 되감는 데는 많은 힘이 소모된다. 시스템은 시간을 되감을 때마다 파생하는 평행 우주를 대가로 소멸시켰고, 단 하나의 우주만을 남겼다.

그로 인해 시간은 선(線)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이어져 닫힌 고리가 되었다. 고리 안에서 이온이라는 존재가 미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증오스러운 시스템 □□ □□□여…….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나다.’

이제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겠지만 상관없다. 개인의 자아 따위는 공평한 멸망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이온은 잠시 화신체 아스모데우스를 떠올리고 하나뿐인 눈을 찡그렸다.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리석기도 하지. 곧 망가질 불완전체가 아닌가.

그러나 그조차도 지금은 상관없는 일.

이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주문을 외운다.

【…….】

부글부글…….

검은 거품이 일면서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존재가 붕괴하면서 발생하는 거품이었다. 수 분의 시간 뒤에는 거품마저 가라앉으며 이온이 소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대던전 《어비스》의 하늘 위로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4장.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유현의 발표는 헌터계, 나아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알음알음 무원을 봤다, 무원이 누구라더라 하는 소문이 도는 것과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그동안 뭘 했냐, 갑자기 정체를 밝히다니 수상하다, 무원은 사실 한국이 개발한 비밀병기다, 버추얼 헌터다(?) 등등…….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황금 시간대 공중파에 바로 특집 방송이 편성되었다. 적당한 선에서 민감한 내용은 자르되 무원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이 재빠른 방영 속도로 보아 <청라 길드>의 한이성 헌터 쪽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싶었다.

매스미디어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다. 원래부터 무원은 이미지가 좋았던 만큼 반응이 거의 뭐……. 한 달 동안 vod 다운로드 순위 1위였다는 것만 밝혀 두겠다.

참고로 방송 내레이션은 오서호가 맡았다.

‘지독한 사람…….’

자연히 <카페 리을>에도 이 사건의 여파가 미쳤다. 다만 내가 예상한 것과는 좀 다른 방향이었다.

정체를 밝힌 직후의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뒤 기유현은 다시 <카페 리을>에 손님으로서 방문했다.

주문을 받고 그와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뒤에서 이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역시…….”

“어쩐지 분위기가…….”

“저는 처음부터 저 두 사람이 저럴 줄…….”

그 말에 의아함을 느껴 돌아보면 황급히 못 본 척들을 한다. 그렇다고 불쾌한 시선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들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말하자면…… 선망……?

나는 기유현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를 초보 헌터라고 알고 있을 때 한 결심을 떠올렸다.

‘훗날 기유현이 유명해지면 가게에 사인을 걸어 두고 ‘기유현이 마신 메뉴’라며 커피를 비싸게 팔아야지……!’

기유현은 유명해졌고, 그와는 관계없지만 커피는 비싸게 팔렸다. 결과적으로 내 결심도 절반쯤은 이루어진 셈인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랭킹 1위의 존재에 익숙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동안 정체를 숨기던 랭킹 1위가 갑자기 전면에 나서는 건 무슨 일이 터지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 그 추측을 뒷받침하듯 <청라 길드>를 주축으로 몇 개의 길드가 모여 무슨 회의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렇듯 랭킹 1위의 일거수일투족과 세상의 변화에 사람들은 촉각을 바짝 곤두세웠는데…….

이는 나랑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고.

이때, 나는 다른 고민을 맞닥뜨린 상태였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2월 중순. 봄은 아직 멀었지만 겨울의 추위는 한풀 꺾인 어느 아침이었다.

그날도 나는 일어나자마자 먹성 좋은 우리 집 동물들의 밥을 챙겨 주던 중이었다.

먼저 미음이에게 시리얼을 수북하게 담아 주고, 라임이의 밥그릇에 커피 열매를 담았다. 이제 아스와 내 몫의 아침 식사를 챙기려는 때, 이변은 일어났다.

“뀨우웃!”

퉷!

라임이가 커피 열매를 먹지 않고 뱉어 냈다.

“라임아, 왜 그래?”

“뀨웃! 뀨우웃! 뀨우우웃!”

퉷, 퉷, 퉷!

과육이 그대로 남아 있는 커피 열매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뀨우우우!”

따악! 라임이가 뱉어 낸 커피 열매가 내 이마에 맞았다.

“……라임아?”

라임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밥도 먹지 않는 데다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슬라임 언어 번역기를 꺼내 라임이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뀨웃! 뀨우우웃!”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응? 라임아, 뭐라고?”

“뀨, 뀨우!”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잠깐, 라임아, 너 설마…….”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라임이가 커피 열매를 뱉어 냈다.

이런 음식으로는 육체를 만족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고차원적인 존재론적 의문에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듯이.

……라임이가 문과 슬라임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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