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 *
“하아…….”
나는 턱을 괴고 긴 한숨을 쉬었다.
한숨의 원인은 바로, 며칠째 밥을 거르는 우리 집 슬라임 라임이다. 다른 간식도 줘 봤지만 라임이는 조금도 먹지 않았다.
그날부터 라임이는 오직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뀨우우!”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래, 저 질문의 답을 생각해 보자. 어쩌면 슬라임은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닐까? 사랑이 답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으로 라임이를 코롱이한테 데려가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내버려 둬도 된다, 왜옹!”
심드렁하게 미음이가 하품을 하고 말했다.
“미음아! 라임이랑 친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흥, 내 밥이나 더 달라!”
“너…… 그런 고양이였어?”
시큰둥하기로는 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마.”
김아스, 너마저!
밥이라도 먹으면 좋겠는데, 밥도 먹지 않고 저러고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철학에는 약하단 말야. 하물며 슬라임 철학을 어떻게 알아.
그동안 먹이로 커피 열매만 준 게 문제였을까? 계속 잘 먹길래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커피 열매에 질린 건가?
으음, 그렇게 생각하니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문구가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싶다는 뜻 같기도 했다.
잠깐. 그런데 보통 슬라임은 무얼 먹지?
이제껏 라임이는 알아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통통거렸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나…….
나는 이참에 이 슬라임의 상태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슬라임한테 먹이로 무얼 주는지부터 알아내야겠다.
가장 먼저 에테르-위키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절묘하게 필요한 정보만 없었다.
[인과율을 모으면 더 많은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에휴, 세상엔 공짜란 없구나. 기대도 안 했다.
내 주변에서 가장 슬라임의 생태를 잘 알고 있을 법한 주노을은 하필이면 잠시 서울을 떠난 상황이다.
“가고 싶지 않다는……. 너무 귀찮다는…….”
<대한 헌터 협회>의 협회장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무슨 안전 교육이 있다고 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그녀야말로 존재론적 의문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당장은 도움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나는 핸드폰으로 헌터 채널을 켜서 ‘슬라임’으로 검색했다.
[잡담] 무지개 슬라임 호빵 띠부띠부씰 교환할 사람 (5)
[자랑] 우리집 슬라임 이제 숫자 셀줄 안다 ㅋㅋㅋ (17)
[이슈] 슬라임 분양 사기범 A씨 공론화합니다. (133)
[쇼핑] 대형 슬라임 말랑 쿠션 1+1 특가딜 ★최저가뜸★ (26)
등등…….
워낙 슬라임이 인기 반려 몬스터인 만큼 수많은 글이 나왔지만, 정작 먹이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슬라임 전문 테이머한테 문의를 해 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헌터 채널을 끄려는 찰나였다.
헌터 채널에 새로 올라온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주 주목도가 높은 글이라 엄청난 속도로 댓글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에엥……? 헌터계 화제의 커플 데이트 포착……?”
누가 데이트하다 걸렸나?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법이다. 균열이다 게이트다 그 안에서 구르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이랑 정이 생긴다.
또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미있는 법 아니겠나. 그래서 헌터끼리의 스캔들은 간간이 화제가 되었다.
‘반대로 헌터는 죽었다 깨어나도 엮이기 싫다는 파도 있지만…….’
어쨌건 단독 스캔들 기사가 뜨다니 유명 헌터인가 보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그 글을 클릭했다.
한국 No.1 헌터 커뮤니티 - 헌터 채널
자유게시판
- 랭킹, 길드 추노 금지. 현피는 던전에서
[뉴스] (단독★) 헌터계 화제의 커플 데이트 포착 (89)
추천 : 155 / 비추 : 17
작성자 : 펌글봇
(사진)
(링크)
헌터25시는 복사금지되어있어서 링크만 갖고옴 ㅇㅅㅇ
링크 들어가서 보셈
님들 다 아는 바로 그 커플임
ㅇㅇ : 헌터25시 뒷북 에바;;
dta*** : 난 또 청첩장 뜬줄 알았네ㅋㅋㅋㅋㅋㅋㅋ
└힐러구함 : ㅋㅋㅋㅋㅋ(단독★) 이런 말머리 붙이려면 청첩장 밑으론 안받는다
└제주길드1짱 : 나는 뷔페가 좋더라 ㅇㅅㅇ
└ㅁㅁ : 헌터회관 뷔페 존맛임 피로연은 거기 ㅊㅊ
프급 : 근데 쫌 감동적이긴하당 작년 튜토 때부터 만났다니,, 힘숨찐 상태라 힘들었을텐데
└cdt*** : 그래도 힘숨찐이 1위인데 대박이지ㅋㅋㅋ
└라임사랑단 : 먼솔 ㄹ가 아까움
헌터 채널의 글에는 용케도 찍었다 싶은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배경은 바다였고, 기사의 주인공들이 아주 조그마하게 보였다. 파파라치의 집념이 느껴지는 한 컷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옷차림이 낯익었다. 저 외투랑 몸에 두른 체크무늬 숄 어디서 많이 보던 거 같은데…….
“엥……?”
설마 이거 나인가……?
나는 황급히 링크된 기사를 눌러 전체 내용을 확인했다. 진짜 나와 기유현을 찍은 사진이 맞았다.
사실 며칠 전 한 번 더 기유현과 제주도를 다녀오기는 했다. 어디서건 시선이 느껴지는 탓에 마음 편히 이야기할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대체 이런 걸 언제 찍은 거지? 헌터 채널의 사람들은 왜 안 놀라는 거고?
일순 당황했지만 나는 곧 침착해졌다.
이 기사에는 나와 기유현이 작년 튜토리얼 던전에서부터 인연을 이어 나갔다고 적혀 있었다. 증거랍시고 튜토리얼 던전 신청 기록이나 나의 행적을 첨부해 놓았지만……. 튜토리얼 던전 때만 해도 나는 기유현의 정체를 몰랐다.
즉, 완전히 픽션이다.
기유현한테 연락한 다음 기사 삭제 요청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화면을 끄려 했다.
드르륵, 콰당!
그때 의자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아스가 기사를 읽고 있었다.
“왜 그래? 아, 이 기사는…….”
“나…… 오늘 연차 낼게.”
“어, 연차? 응, 당연히 괜찮지. 써.”
우리 업장은 당연히 당일에 연차를 사용할 수 있다. 아스는 너무 안 쉬어서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대환영이다.
“……외박할지도 몰라.”
“뭐? 아스, 어디 가는데?!”
아스는 얼어붙은 얼굴로 이 말만 남기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청라 길드> 쪽 대응으로 파파라치 기사는 10분 만에 삭제되었고, <헌터25시>라는 언론사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기사 내에 불법적으로 취득한 정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벌금이 부과될 거라고 한다. 그것 참 쌤통이다.
이렇듯 파파라치 기사는 가벼운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라임이는 여전히 이상했고, 아스는 정말로 외박을 했다.
결국 이날 밤, 내 옆에는 한 마리의 고양이밖에 남지 않았다.
“왜옹.”
미음이가 다 내 탓이라는 듯 울었다.
* * *
<청라 길드>의 부길드장, 한이성은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존버필승!”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가 그를 따라 제창했다.
“존버필승!”
한이성이 손에 든 태블릿 PC에는 뉴스 기사가 떠 있었다.
제목은 바로 ‘(단독★) 헌터계 화제의 커플 Y♥R 데이트 포착’.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기사였다. Y와 R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박수!”
“와아아아!”
지시에 따라 쌍둥이가 짝짝 박수를 쳤다. 참 죽이 잘 맞는 직장 동료들이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한이성의 과거를 잠깐 되돌아보자.
그는 이제껏 무엇을 보든 100% 이루어지는 커플만 잡았다. 영화, 드라마, 만화, 예능…… 예외는 없다. 주식 실패 전무. 뭐든 그가 끌리는 조합은 엔딩 때 커플이 된다. 그 백발백중의 감은 기유현과 권리을에게도 발휘되었다.
즉, 귀납적 추론에 의해 이 기사는 100% 진실이다.
“크흑…….”
그동안의 시간이 아련하게 눈앞을 스쳤다.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또 눌러 참은 결실은 달콤했다.
권리을이 <청라 길드>에 방문했을 때도, 기유현이 갑자기 카페에 간다며 모습을 감출 때도, 오직 ‘존버필승’의 마음으로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던가.
탕!
그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유현이 부길드장실의 문을 열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몸을 비틀거릴 정도였다.
“아, 길드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 기사…….”
기유현은 한이성이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한이성은 신뢰감을 주는 프로페셔널한 미소로 기쁨을 감추며 대답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로 정정 기사 내겠습니다. 내용은 ‘아직 알아 가는 단계다. 차분히 지켜봐 달라.’ 정도로 무난하게…….”
기유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연히 사실 무근이라고 밝혀야 한단 말인데.”
“네…….”
좋다 말았다. 한이성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빙그르. 그대로 부길드장실을 나가려던 기유현이 다시 몸을 돌렸다.
“기사에 불법 정보가 사용되었던데, 언론사에 엄중 항의하고 조치하는 것도.”
“네에에…….”
탕! 다시 문이 닫혔다.
“힘내세요.”
쌍둥이가 힘이 빠진 한이성의 어깨를 토닥토닥했다. 정말로 죽이 잘 맞는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한이성은 절망하지 않았다. 기유현이 지시한 일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처리하면서도 하나의 희망을 찾아냈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기사를 내라고 말하면서 기유현은 살짝 눈썹을 늘어뜨렸다. 단호한 척 말했지만 잠시 눈이 흔들렸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아쉬움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즉, 이것은…….
‘말로만 듣던 입덕부정기……!’
그렇다. 끝에 가서 이루어지는 커플은 결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방황하는 시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분명했다. ‘존버필승’의 정신으로 입덕부정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근거는 하나 더 있었다.
한이성이 비록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자신이 미는 커플을 생각하는 미쳐 버린 커플링 애호가이기는 해도, 오직 감만 믿고 Y♥R을 미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기유현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유에도 권리을이 관련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며칠 전 기자회견을 시작하기 직전, 기유현이 한이성을 불러 말했다.
“미안해. 갑자기라 당황했을 텐데.”
“아닙니다……. 그보다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부드러운 빛을 띠는 눈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드네.”
한이성은 왜 기유현이 무원의 정체를 계속 숨겨 왔는지 안다. 본질적으로 타인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백광의 권능’은 너무도 강력한 스킬이었고,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같은 길드 소속이었지만 한 번도 같은 팀인 적이 없었다. 이 길드는 기유현을 위한 한이성 자신의 욕심에 불과했다.
무원이라는 이름만 해도 그렇다. 무원(無願). 뜻을 풀면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한이성은 이름에 없을 무(無)가 들어가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표기를 변경하게 했다. 하지만 이 이름은 13살의 기유현이 한 사고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그런데 기유현의 이 변화는 무엇일까. 살짝 스친 미소에는 타인에게 조금쯤 자신을 허락할 여유가 비쳐 보였다.
사랑은 변화에 대한 너무나도 개연성 있는 근거가 아닌가.
한이성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가 잡은 커플들은 모두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 주식은 된다.
“안 되겠다.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디 가세요?”
주신희가 한이성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완벽한 조력자 캐릭터의 의무를 다하러 간다.”
입덕부정기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주변인의 도움이 필요한 법. 그 도움이란 뭘까. 바로 일단 붙여 놓는 것이다.
“와아아, 부길드장님 멋져요!”
“완벽한 엑스트라 한! 이! 성!”
짝짝짝.
멀어지는 등을 향해 쌍둥이가 거센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