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192)

158화





그러나 한이성의 계획은 친우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안 돼.”


권지운은 짙게 다크서클이 생긴 눈가를 문지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뭐? 들어 봐. 일단 핑계만 만들어서 붙여만 놓으면…….”


“한참 잘 나가는 남의 동생한테 누구를 붙이려고 하는 거지?”


이 말에는 한이성도 할 말이 있었다.


“아니, 잠깐! 랭킹 1위면 이미 잘됐는데 어디가 어때서 그래?”


“이래서 성과주의적인 생각밖에 못하는 한국인이란.”


“뭐……?”


너는 한국인 아니세요? 그런 반박을 하기 전에 권지운이 재차 말했다.


“행복은 랭킹 순이 아니다.”


기가 막혀 한이성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얼음물을 원샷하고 외쳤다.


“최이찬 헌터 등장하고 랭킹 내려갔다고 삽질한 거 다 아는데……!”


권지운의 미간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던 부분을 찌르다니.


“아무튼 안 돼. 돌아가.”


“야, 치사하게……!”


탕!


매정하게 문이 닫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런다고 포기할 한이성이 아니었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뒤져 보았다. 분명 여기에 쓸 만한 것이 있을 법도 한데…….


“그래, 이거다!”


공문 한 장을 찾은 한이성이 눈을 빛냈다.




* * *




한이성이 완벽한 조력자 캐릭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음흉한 계획을 세우기 며칠 전, 서울 모처.


김 헌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유명한 사람 대박 많다…….’


침착한 척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주변이 온통 이름이 알려진 헌터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오늘 이 회의는 원래라면 김 헌터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이번 분기에 랭킹이 제법 오르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실력이었으니까.


‘헌터물 판소라면 이름도 안 나오는 엑스트라겠지, 하하…….’


김 헌터는 속으로 자조하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드디어 정체를 밝힌 무원이 직접 주최하는 회의다. 참석자는 주요 길드의 길드장,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


그런데 하필 김 헌터가 소속된 길드장이 배탈이 나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타가 된 김 헌터는 위축되는 한편 신이 났다. 이만한 실력자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아서 열심히 듣고 구경이나 하다 가자.


그런데 자리 배치에 무슨 착오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 헌터는 당황하여 앞에 붙여진 이름표를 확인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명당이다……!’


김 헌터의 왼쪽은 최근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백은 길드>의 자리였다. A급 힐러이자 길드장인 권지운과 S급 최이찬의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은 가족 길드로 널리 알려진 <로열 길드>의 주노을. 그 ‘가족’이 혈연이 아니라 어떤 은밀한 암흑 조직을 의미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다.


주최자인 <청라 길드>, 해체 진행 중인 <씨앤엘 코퍼레이션>을 제외하면 제일 거물을 옆에 낀 외딴섬 같은 자리.


‘윽, 긴장된다.’


김 헌터는 혹시 어깨라도 닿을까 바짝 긴장한 자세로 앉아 정면만 보았다. 정형외과 모델도 가능할 법한 바른 자세였다.


참석자가 모두 착석했을 무렵, 앞에 있는 문이 열렸다.


뚜벅, 뚜벅, 뚜벅…….


걸음 소리가 이윽고 회의장 가운데에서 멈출 때까지 모두들 숨 쉬는 것도 잊고 정면을 주시했다. 기유현, 그리고 그 옆에는 <청라 길드>의 부길드장 한이성과 <던전관리청>의 강현우다.


“여러분, 바쁜 와중 시간 내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야…….’


김 헌터는 긴장도 잊고 속으로 감탄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이 세대의 헌터라면 모두 인정할 뛰어난 능력을 빼고 봐도 그랬다. 잘 빚어진 아름다운 얼굴, 듣기 좋은 목소리, 정중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까지.


저런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


“마음에 안 든다는…….”


혼잣말치고는 커서 김 헌터에게 충분히 들리는 목소리였다.


“또, 또, 또 꽁해 계신다.”


‘패밀리’의 보스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나? 피바람이 부는 건 아니겠지. 화들짝 놀란 김 헌터는 슬쩍 주노을 쪽을 곁눈질했다.


“꽁한 거 아니라는…….”


“맞잖아요. 그동안 <카페 리을>에서 기유현 헌터를 만났지만 전혀! 혼자만 전혀! 눈치를 못 채서 꽁하셨으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주노을 헌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군요.”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권지운이 입을 열었다. 사이에 끼인 김 헌터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필사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립니다.’ 하는 표정으로 앞을 보면서 김 헌터는 생각했다.


‘나 빼고 대화해 주세요…….’


기유현은 생긋 웃더니 그들 쪽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 것 같군요. 시작하기에 앞서, 질문 있으시면 하세요.”


“…….”


“…….”


정적이 흘렀다. 주노을과 권지운은 언제 투덜댔냐는 듯 입을 딱 다물었다. 대신 기유현은 그들 사이에 낀 외딴섬, 즉 김 헌터를 가리켰다.


“그쪽, 김철수 헌터님은?”


헐, 대박. 기유현이, 그 무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감격과 동시에 김 헌터는 쏟아지는 시선에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살면서 이렇게나 많은 랭커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배가 살살 아파 왔다.


하지만 지금은 기유현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있는, 돈 주고도 얻지 못할 기회. 김 헌터는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사로잡을 묵직한 한 방을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릇 얌전하던 사람의 묵직한 한 방이란 실패로 끝나기 쉬운 법이다. 이번에도 이 법칙은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질문거리를 찾다 김 헌터가 문득 헌터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돌던 어떤 소문을 떠올린 것이다.


어디까지나 김 헌터는 적당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역린을 건드렸다.


“저기, 저, 그러면……. 기유현 헌터님, <카페 리을>의 사장님과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우지끈!


옆에서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어! 하하, 하……. 죄송합니다. 여기 책상을 마분지로 만들었나, 약하네요.”


부러진 책상 상판을 들고 최이찬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 *




마구 투덜거리며 한이성이 돌아간 직후.


권지운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향한 곳은 같은 층의 최이찬이 쓰는 방이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새로 영입한 헌터들로 전보다 북적거리는 복도를 걸으며, 권지운은 며칠 전 기유현이 주최한 회의를 떠올렸다.


다른 참석자들이 돌아간 뒤, 극히 일부의 인원이 남은 상황에서 기유현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마신이 부활할 겁니다.”




단숨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에테르 수치는 요동쳤고, 최근에는 기이한 사건이 잇달았다. 대던전 《어비스》의 끝에 잠들어 있다는 마신과 관련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추측이 나왔다.


그리고 지난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 ‘이온’이라는 자.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이상 언제 다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이변을 대비해야 한다. 권지운은 이에 대해 최이찬과 이야기를 나눠 볼 요량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고 밀린 지출 결의서를 처리한다고 알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기 전, 권지운은 잠시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곧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흑……. 훌쩍…….”


기사 봤구나…….


권지운은 사촌 동생을 무척 아꼈다. 그러나 동생을 대상으로 한 남의 내밀한 감정까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 사정이다.


“…….”


권지운은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살그머니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


……내버려 두자.




* * *




이른 오전.


“라임아, 이리 와.”


“뀨우우!”


퉷!


퉷, 퉷, 퉷!


투두둑, 딱!


내 손길을 이리저리 피하며 라임이가 커피 열매를 뱉었다. 열매에 맞은 이마가 꽤 아팠다.


“오늘은 안 봐줘. 착하지, 라임아.”


“뀨우웃!”


작정하고 몸을 튕기는 라임이는 예상 외로 무척 날쌨다. 라임이를 붙잡기 위해 한참 뒤를 쫓다가 나는 그만 지쳐 버렸다.


“헉, 허억…….”


너무 힘들다.


오늘도 아스는 아침부터 외출한 상태다. 요 며칠 계속 그랬다. 카페 영업시간 동안에는 착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 외에는 거의 자리를 비웠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사춘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아스가 이상해진 건 나와 기유현의 파파라치 기사가 뜬 그때부터다. 하지만 아스가 자꾸 자리를 비우는 이유만큼은 도무지 모르겠다.


너무 간섭하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서 일단 지켜보고 있지만…….


우선은 이 슬라임부터 해결하자.


“이야압!”


“뀨, 뀨우우!”


나는 포기한 척 딴청을 피우다 라임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단번에 몸을 날렸다. 라임이는 통통거리며 반항했지만 이번에는 내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잡았다! 라임아, 얌전히 있어.”


나는 얼른 어제 택배로 구입한 슬라임 이동장에 라임이를 집어넣었다.


벌써 며칠째 라임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더 이상 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 걱정도 되는 데다가, 오늘 아침에는 이런 퀘스트까지 떴기 때문이다.




[서브 퀘스트: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큰일입니다! 당신의 슬라임은 현재 존재론적 의문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라임이는 계속 식사를 거부할 것입니다.


라임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찾아봅시다.


라임이에게 알맞은 먹이 찾기: (미완료)


보상: 라임이의 호감도 상승, 슬라임에 대한 지식, 경험치(500exp), 랜덤 스킬 포인트 1


실패 시: 라임이의 호감도 하락]




이미 부정까지 한 파파라치 기사 따위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퀘스트 보상은 그렇다 치고, 실패하면 라임이의 호감도가 내려간다고 하잖아. 이 퀘스트를 해결해야 했다.


“그럼 나 다녀올게.”


“왜옹.”


우리 가게에서 유일하게 변함없는 미음이가 히터 앞에 누운 채 나를 배웅했다. 미음이 너는 참 편안해 보이는구나. 그래, 너라도 변함없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종로5가의 깊은 골목 안, 바로 <진달래 전당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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