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92)

160화

“손님? 왜 그러세요?”

“후우, 하…….”

“빈혈이세요? 이쪽에 좀 앉으세요.”

“뀨우우!”

전과 같았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환상을 보는 시간은 현실에서는 아주 잠깐에 불과하고, 머리에 찬물을 부은 것처럼 갑자기 깨어난다.

그러나 한 번 겪었다고 해서 이런 일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말했다.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감사해요.”

나는 진달래에게 거듭 고개를 숙인 뒤 전당포를 나섰다. 방금 본 광경이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또 할머니의 수첩을 통해 기유현의 모습을 보았다. 첫 장에 적힌 ‘손녀, 리을에게’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이 수첩을 내게 남기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 주신 거지.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신 걸까.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겠다. 할머니는 내게 뜬금없는 의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힌트를 주신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방금 본 환상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분명 회귀 전처럼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 거다. 앞으로 그걸 찾으면 된다. 회귀 후의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듯, 그도 다른 삶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아…….”

“뀨우웃!”

머릿속이 복잡해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나를 위로하듯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겼다. 무척 탱글탱글하고 귀여운 모습이지만 속아선 안 된다.

[라임이에게 알맞은 먹이 찾기: (미완료)]

라임이는 여전히 먹이를 거부한 채 철학적 의문에 빠져 있었으니까.

결국 이 슬라임이 왜 밥을 굶는지는 알아내지 못하고 돌아가는구나. 무슨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지이잉.

그때, 핸드폰 진동 소리가 뻗어 나가는 상념을 방해했다. 나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전화를 건 거지? 의아함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네, 그렇긴 한데……. 네?”

* * *

“헉, 대박, 최이찬 헌터야!”

“우와, 이쪽 봤어, 이쪽!”

“하… 하하……. 안녕하세요.”

세상은 언제나 도전자에 열광하는 법이다. 각성 이후로 최고의 자리에서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최강자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기존의 도전자 포지션이었던 최세드릭은 <씨앤엘 코퍼레이션>의 해체와 함께 물러났다. 대신 기유현이 그간의 힘숨찐 생활을 그만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이 새로운 도전자 포지션이 될 수 있을 최이찬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서글서글하니 호감을 주는 외모에 거대한 몸, 수더분한 성격까지 기유현과 대비된다.

그로 인해 최이찬은 기유현의 정체가 알려진 이후에 더욱 큰 인기를 끄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대답해 주고 걸음을 옮기는 최이찬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아…….”

최근에 뜬 파파라치 기사 때문은 아니었다.

진짜 아니다. 정말 아니라니까.

비록 기사가 나온 날은 입맛이 없어서 평소의 절반밖에 밥을 먹지 않았지만, 부정 기사가 뜬 다음에는 환호했지만.

……아무튼 아니었다.

최이찬의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지난 사건에서 손에 넣은 단검이었다.

[아이템: 아주 오래된 단검(★★★★★)

무엇이든지 끊어 내는 단검.

인과마저도 끊어 버립니다.

※ 최이찬에게 귀속 상태입니다.

대상을 찌르기 전까지는 귀속 상태를 해제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던 데다가,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시끄러운 목소리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단검은 자신에게 귀속된 데다가, 떨떠름한 설명까지 붙어 있었다.

더구나 단검이 찔러야 하는 대상이라는 게…….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아…….”

긴 한숨을 내뱉으며 <백은 길드> 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최이찬은 흠칫 놀랐다.

누군가가 있다. 그는 곧장 문을 닫아걸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 누구지?”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인물이 움찔, 하고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샛노란 옷이었다. 도무지 평범한 옷가게에서 사 입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현란한 컬러에 괴상한 장식까지 달린 외투. 한마디로 파멸적인 패션 센스였다.

노란색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 방문자가 입을 열었다.

“쯧쯧, 실연 때문에 질질 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재수 없는 말투는…….

아니, 그보다.

“실연한 건 아니거든.”

“쯧, 보아하니 땅 좀 팠구만.”

최이찬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나타난 거지? 그보다 너, 몸이 있었나?”

“이온의 소멸이 가까워졌거든. 그래서 이 몸도 조금 힘을 되찾았지.”

“…….”

“고민이 많은 계약자를 구하러 왔도다, 하하하!”

현현한 노란 옷의 왕 □□□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진달래 전당포>를 다녀오고 이틀 뒤, 인천 공항.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 입국 층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입국자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는 기자들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지?”

“오늘 누구 오나?”

그리고 기자들 앞에는 내가 서 있었다. 옆에는 기유현과 아스도 함께였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던전관리청> 홍보실 직원이 우리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발돋움을 하고 입국장 안쪽을 들여다보던 사람 한 명이 소리 높여 외쳤다.

“……온다!”

찰칵, 찰칵찰칵, 찰칵!

그 말을 신호로 기자들이 일제히 셔터를 눌러 댔다. 플래시의 세례 속에서 곧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홍보실 직원이 살짝 내 어깨를 두드려 신호를 주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이미 몇 번이나 속으로 외운 멘트를 건네려 했다.

“오랜만이에…… 으앗!”

“하하하!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여전히 올바르지만 살짝 어색한 한국어를 쓰며 그가 나를 포옹했다.

제임스 잭 스미스 헌터. 예전, <카페 리을>을 오픈하기 전에 우리 가게에서 믹스커피를 마신 바로 그 미국인 헌터다. 제임스가 다시 한국에 왔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내가 제임스에게 무엇을 내밀었는지 알겠는가.

그렇다. 바로…… 믹스커피 상자다.

“최고의 멋진 선물! 감사합니다.”

노란 박스를 받아 들고 제임스가 씩 웃었다. 찰칵, 찰칵, 찰칵! 셔터음이 터져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계기는…….

이틀 전, <진달래 전당포>에서 돌아오는 길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였다.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한이성이었다. <청라 길드>의 부길드장으로, 기유현과 가까운 사이면서 권지운의 친구. 그러나 나와 직접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 ……그렇게 되어서, 권리을 헌터님께 참석을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한이성의 말은 바로 이랬다.

제임스가 다시 한국에 온다.

한국 외 여러 각국도 균열과 몬스터에 골머리를 앓는 시대. 헌터계 국제 교류 차원이기도 하면서,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는 목적도 있다고 한다.

<던전관리청>에서 그의 방한을 환영하는 행사를 열 예정인데, 그 행사에 내가 참석하길 바란다.

제임스는 귀국한 이후에도 믹스커피 사랑을 끊임없이 설파했고, 그때마다 나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했다. 그러니 <던전관리청>에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 이해는 됐다.

모처럼이니 제임스를 만나고 싶긴 했다. 하지만 상위 랭커끼리의 행사에 내가 끼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행사 참석은 정중히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역시 그런 건 부담스러워서요. 제임스 헌터를 만나고 싶긴 한데……. 아, 만찬이요? 네, 그 정도라면…….”

그런데 마침 가게에 돌아와 있던 아스가 내 통화 내용을 듣고 불쑥 물었다.

“그거, 그 남자도 와?”

“그 남자? 아, 유현 씨? 어, 온다고 하네.”

“나도 그거 갈래.”

“……정말?”

나는 크게 감격했다. 아스가 자발적으로 이런 행사에 끼려고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요즘은 계속 나를 피하기만 했는데 말이다.

이 행사의 어떤 점이 아스의 흥미를 끈 건가?

그래, 아스가 흥미를 느끼는데 부담스럽다 운운할 때가 아니다. 나는 당장 다시 한이성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건, 역시 받아들일게요. 그냥, 제가 참석할 수 있는 행사는 전부 다 잡아 주세요!”

그렇다고 해도 설마, 믹스커피 증정식 따위가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지만.

* * *

“이렇게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바리스타, 그리고 친구.”

“아하하, 잘 지내셨어요.”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차 안.

방금 트렁크에 믹스커피를 종류별로 실은 제임스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때, 우리 가게에 몬스터가 나타나 죽을 뻔했던 이후. 무사히 귀국한 제임스는 활발하게 헌터 활동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랭킹이 많이 올라 현재는 미국 내 20위 안쪽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이만큼 상위 랭커가 공식적으로 외국을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양국의 상황 및 관계 등 이래저래 고려할 일이 많아서 번거롭다고 할까.

모처럼이니만큼 <던전관리청>은 이 방한을 아주 큰 이벤트로 다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모든 행사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하겠는가.

앞으로 남은 일정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한이성은 정말로 모든 행사에 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참고로 차량 좌석은 원래 아스, 나, 기유현, 제임스 순으로 앉으려 했다. 그런데 어쩐지 아스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아스는 이 행사를 기대했으니까, 중심인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겠지.

“아스, 자리 바꿀까?”

“……응.”

나는 담당자에게 이야기해서 좌석 배치를 바꿔 주었다. 바로 나, 기유현, 제임스, 아스 순이다.

“하아…….”

그러나 아스는 어쩐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참 잘 알 수 없는 애다.

우리를 실은 자동차가 향한 곳은 남대문 시장 인근이었다. 한국 방문 행사의 필수 코스라고도 할 수 있는 전통 시장 투어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커다란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회현 몬스터 파머스 마켓’

으, 음……?

이곳은 최근에 오픈한, 몬스터 부산물과 에테르 광석 등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청계천 공방 거리에 밀려 인기가 떨어진 남대문 몬스터 상가가 업계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했다. 상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해 요즘 인기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전통 시장……인가요……?”

옆에서 행사 담당자가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은 평범한 콘텐츠로는 눈에 띌 수 없습니다!”

“네에…….”

“그리고 헌터 강국에서 헌터들이 이용하는 시장이야말로 진정한 명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묘하게 설득되는 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참가자들끼리 자유롭게 시장을 둘러보고 쇼핑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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