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192)

161화

먼저, 손님인 제임스는…….

“와우, 이렇게 순도 높은 에테르 광석이 이렇게 저렴할 수가! 전부 사겠습니다!”

“땡큐 베리 마치~”

제임스는 한국어를 쓰는데 상인은 영어를 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것은? 덤입니까? 정말 멋진 시장입니다!”

이미 완벽하게 이 환경에 적응하고 있구나.

그리고 기유현은…….

“……유현 씨.”

내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눈이 나를 보는 순간 가슴속 어딘가가 찌르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표정이 안 좋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아니요. 아침부터 카메라 플래시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봐요.”

기유현은 농담 섞인 내 말에 입꼬리를 끌어당기면서도 여전히 내 표정을 살폈다. 거리가 가깝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할머니의 수첩에서 본 광경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과거의, 내가 모르는, 많은 일을 겪은 그의 모습이. 말없이 입술만 달싹이는데, 기유현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리을 씨, 몸이 안 좋은 거면 무리하지 말고…….”

그때.

“누나, 저쪽 보러 가자.”

아스가 불쑥 기유현과 나 사이에 몸을 끼워 넣었다. 내 손을 잡고 시장의 한쪽을 가리켰다.

“으, 응?”

“저쪽에 찾는 게 있을지도 몰라.”

기유현과 나 사이를 열성적으로 가로막으려는 모습이었지만, 아스의 키가 작…… 크지 않아서 전혀 가려지지 않았단 건 비밀로 하자.

뭐,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이랑 함께 시장을 돌아보기로 할까. 어차피 근처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아스의 말대로, 시장에서 찾으려는 물건도 있었다.

나는 미리 챙겨 온 슬라임 이동장에서 라임이를 꺼냈다. 탱글탱글한 붉은색 몸이 통 하고 안에서 튀어나왔다.

카메라가 라임이의 탱글탱글한 몸을 마구 찍어 댔다.

“뀨우우!”

힘차게 우는 라임이의 모습은 무척 귀엽지만, 저 귀여운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 라임이는 여전히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뀨우웃!”

“너무 귀여워요!”

“저기 봐, 엄청 귀여운 슬라임이 있어!”

통통 몸을 튕기는 라임이를 보고 행인들이 눈길을 보냈다. 다행이다. 여기에 슬라임 말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간 온갖 음식으로 테스트했지만, 나는 아직 라임이의 먹이 찾기 퀘스트를 해결하지 못했다. 절망하던 나는 문득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 라임이는 육식 동물인지도 모른다. 육식 동물인데 자꾸 열매를 주니까 단식 투쟁을 하는 걸 수도 있어.

내게 남은 답이라고는 이제 이 실낱같은 가능성뿐이었다.

원래 가려던 곳과는 약간 다르지만 시장은 시장. 온갖 몬스터 부산물을 파는 이곳, 몬스터 파머스 마켓이라면 라임이의 입맛에 맞는 먹이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자, 라임아,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 봐!”

“뀨우우!”

번화한 시장에 호기심을 느낀 듯 라임이가 몸을 튕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미음이도 같이 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미음이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게 더 좋다고 거절했다.

‘은근히 집순이라니까.’

카메라 한 대가 라임이를 집중 마크했다. 또 다른 한 대는 내 쪽을 찍었는데, 각도로 보아 나와 기유현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게 찍는 것 같았다.

보통 시장 탐방 콘텐츠면 시장을 찍는 것 아닌가? 그러나 촬영하시는 분이 아주 사명감에 불타는 것처럼 보여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세 발짝쯤 뒤에서 라임이를 따라 걸었고, 기유현 역시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스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기유현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지난 괴물 나뭇가지 사건 때 서로 좀 친해졌으려나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구나…….

그때, 라임이가 시장의 어느 한 상점을 향해 재빠르게 다가갔다.

“어서 옵쇼! 순도 높은 최상급 무속성 에테르 광석, 무속성 광석 있습니다.”

육식이 아니라 에테르 광석을 먹고 싶은 걸까. 그런 기대도 잠시.

“뀨우우…….”

라임이는 금방 흥미를 잃고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괜찮다. 아직 시장 탐방은 초반이니까. 이다음 상점에서는 다를 테다.

하지만…….

“자, 자. 스켈레톤의 뼈 세일합니다. 보고 가세요~”

“뀨우…….”

“신선한 동굴흑곰 선지 100개 한정 판매합니다!”

“뀨…….”

라임이가 아무 반응 없이 상점 앞에서 몸을 돌릴 때마다 내 마음도 차츰 어두워졌다.

흐흑. 반려 동물이 밥을 먹지 않아서 고민하는 주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겠다. 인터넷에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세상에, 왜! 왜 이 새빨간 슬라임의 먹이만은 알아낼 수 없단 말인가.

동물을 키우기란 정말 힘든 일이구나…….

시장도 슬슬 끝이 보였다. 이대로 여기서도 성과 없이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리을 씨, 괜찮아요? 역시 안색이 안 좋아요.”

얼굴을 잔뜩 찌푸린 나를 기유현이 바라보았다. 나를 염려하며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새삼스럽지만 여기는 시장이다. 촬영 때문에 어느 정도 인원 통제를 했지만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상황. 나와 기유현을 알아보고 멀찍이서 구경하던 행인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파파라치 기사가 떴지.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이었고, 바로 부정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서서 그 일을 떠올리자 새삼 머쓱해졌다.

“……괜찮아요.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후다닥. 이번에 나는 아스가 끼어들기도 전에 몸을 뒤로 물렸다. 어쩐지 아스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뀨우웃!”

갑자기 경쾌한 울음소리를 내며 라임이가 어딘가를 향했다. 나는 얼른 라임이의 뒤를 따랐다.

“라임아! 어디 가?”

라임이는 시장의 끝 쪽에 있는 어느 상점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매대에 놓인 어떤 초록색 풀을 먹었다.

됐다! 며칠 만에 드디어 라임이가 무언가를 먹었다. 촉이 왔다. 이번에야말로……!

……퉷!

아. 저 퉷,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절망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얘가 멀쩡한 남의 상품에 무슨 짓을 하는 거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임아, 너도 사과드려.”

“뀨우우…….”

“뀨우우하지 말고 얼른!”

나는 얼른 상점 앞으로 가 통통거리는 라임이의 몸을 붙잡고 상점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계산할게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상점 주인은 별 특이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엥? 괜찮수다. 이거 어차피 버리는 건데.”

“버리는…… 거라고요?”

나는 고개를 들고 매대를 자세히 보았다. 이 상점은 던전에서 채취한 조개껍데기를 파는 곳이었다. 바닥에 수북하게 깔아 놓은 녹색 풀 위에 상품을 진열해 놓았다.

“그래요. 던전에서 나는 잡초인데, 그냥 흠집 나지 말라고 놔둔 거요. 됐어요, 됐어.”

나는 옆의 기유현을 보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휴. 일단은 조금 시름을 덜었다.

“그래도 놀라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됐수다. 크흠, 그보다 팬인데 거, 사, 사인 좀…….”

띠링.

그때 갑자기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내 손이 잡초라고 불린 초록빛 풀에 닿은 순간이었다.

[스킬: 바리스타의 눈(D)이 발동됩니다.]

[아이템: 메두사쑥(★☆☆☆☆)의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메두사쑥(★☆☆☆☆)

종류: 식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풀. 이름은 살벌하지만 그냥 쑥입니다.

험한 던전에서도 쑥쑥 자랍니다.]

어, 뭐라고? 설마 국도 끓여 먹고 떡도 해 먹는 그 쑥 말인가? 냄새를 잘 맡아 보니 쑥 냄새인 듯도 하고…….

띠링. 곧장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새로운 레시피 쑥 라테를 획득했습니다.]

“……사장님, 이 풀 제가 살 수 있을까요?”

* * *

나는 상점 주인에게 이 풀이 잡초가 아니라 쑥이라는 사실을 설명한 뒤, 팔아 달라고 요청했다. 상점 주인은 흔쾌히 적당한 가격으로 메두사쑥을 팔아 주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어차피 나는 잡초라고 알고 있었으니 돈은 그거면 됐고. 대신 사인 한 장만 해 주쇼.”

“네? 사인이요?”

카드 결제할 때나 해 본 그거?

퍽 민망했지만 상점 주인은 진심이었다. 결국 나는 커다란 종이에 사인을 하고 상점 주인과 같이 사진까지 찍은 다음 메두사쑥 한 봉지를 샀다.

“그 풀은 무엇입니까? 멋진 냄새!”

그 사이에 알찬 쇼핑을 즐긴 다음 한 손에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든 제임스가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일 알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왜오옹(왔다)!”

미음이의 말과 거의 동시에 카페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나타났다.

오늘은 제임스, 기유현을 포함한 행사 관계자들과 추첨으로 뽑힌 헌터들이 <카페 리을>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목적은 카페 탐방 및 메뉴 시식.

“조카야, 잘 있었느냐!”

촬영은 큰아버지가 맡았다.

큰아버지는 요즘 활발하게 유튜버 활동을 했다. 다만 주제는 산 생활 vlog에서 헌터 관련한 토크로 바뀌었다. 그사이 얼굴이 좋아지신 걸 보니 지금 생활이 적성에 맞으신 듯했다.

“와, 정말 멋진 카페가 되었군요!”

제임스가 감격한 표정으로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하긴 그는 내가 카페를 오픈하기 전 믹스커피 100개를 탈 때 방문했으니 지금 모습은 생소할 테다. 당시에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가게가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고.

고작 몇 달 전 일인데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가게가 엉망이 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몇 달 동안 이미 회귀 전과 많은 부분이 바뀌었으니까.

기유현만 해도…….

나는 살짝 기유현 쪽을 보았다. 행사 담당자와 이야기하던 중인 그가 엷은 웃음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 이온이라는 존재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고 하니 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삶은 할머니의 수첩에서 본 것처럼 쓸쓸한 끝을 맞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그때, 카페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온 제임스가 메뉴판을 살폈다.

“마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그럼 저는 믹스커피 주십시오.”

“모처럼이니까 다른 메뉴는 어떠세요?”

“믹스커피가 좋습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걸까.

나도 좋아하긴 해. 맛있잖아. 원두커피와 다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중독성이 있다. ‘내 손안의 카페’ 스킬로 탄 믹스커피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제임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스킬로 타지 않은 평범한 믹스커피도 애용했다. 다시 한국에 온 김에 제임스와 인스타를 맞팔했는데, 제일 많이 본 사진이 믹스커피 사진일 정도였으니까.

아, 설마 그런 걸까?

한번 어떤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면 그 이후에도 그 음식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그때 믹스커피를 마시고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좋아한다거나?

으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나는 제임스에게 믹스커피 한 잔을 타 주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한 잔을 음미했다.

“여기, 말한 거 가져왔어.”

아스가 내가 부탁한 물건을 들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일동을 보고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나는 이 손님들에게 지금부터 만들 신 메뉴를 맛보여 줄 생각이었다.

다만 오늘은 특별히 한 가지 과정이 더 추가되었다. 요리 방송처럼 음료를 만드는 과정을 손님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아스가 나를 따라 만드는 방식이었다.

물론 오늘 만들 신메뉴란 바로 메두사쑥을 쓰는 쑥 라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