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리을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각인이 지워진 왼손을 볼 때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지난번 세피로트 가지 사건에서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이온의 앞에서 의식을 잃지 않았던가. 형편없는 자신을 떠올리면 꾹 눌러 삼킨 자기혐오가 고개를 든다.
“……아스? 왜 그래?”
“…….”
아스는 음료가 담긴 유리잔의 가장자리만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툭, 하지 않으려던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인간하곤 어떻게 된 거야?”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말투는 자꾸만 부루퉁해졌다.
“그 인간? 아, 유현 씨 말야? 기사는…….”
“……기사가 거짓말인 거 알아. 실제로는…… 어떤데?”
“음, 글쎄…….”
드르륵. 리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 몫의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왔다.
부드러운 커피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어째서 그녀가 만드는 커피 냄새는 이토록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걸까.
곧장 커피를 마시는 대신 도자기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리을이 입을 열었다.
“아하하, 잘 모르겠어.”
또 그렇게 답을 피하는구나. 아스가 씁쓸한 기분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리을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웃음기가 걷힌 차분한 표정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유현 씨한테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야. 좋은 사람이잖아. 앞으로 어떤 감정이 되고 또 어떤 관계가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응.”
“한 가지 확실한 건…….”
리을은 잠시 먼 곳을 보았다. 다시 아스를 향하는 시선에는 선연한 서글픔과 애틋함이 자리했다.
“그 사람이 괜찮아지면 좋겠어. 지금은 그것뿐이야.”
아스는 바늘로 찌르는 듯하던 따끔거림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대신 다른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천으로 몸을 감싼 듯,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감각이었다.
간지러움은 점점 커져 이윽고 몸 전체를 뒤덮어, 생경한 감정을 마주하게 했다.
아. 나도 같은 기분이구나. 나도 이 사람이 괜찮으면 좋겠어.
그러나 어떻게 이 감정을 말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막 깨달은 감정은 막연하고, 말은 너무도 어렵다.
대신 아스는 유리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첫 모금은 쫀득하게 휘핑한 생크림의 단맛이 느껴졌다. 이어 은은한 쑥 향기가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리을은 자신이 맛있어하는 걸 이미 아는 것처럼 웃었다. 그런 점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리을은 오븐에서 막 구운 마늘빵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어때? 이렇게 단군신화 세트를 만들려고 했는데. 오늘처럼 가게가 부서지지 않으려면 수량 한정으로 해야겠지만.”
대답을 하기 위해 아스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띠링. 소리가 울렸다.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충분한 마력을 얻었습니다. 마력 각인이 회복됩니다.]
[본체와 접속을 실행합니다. 완료 시, 더 다양한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완료율: 1%]
“어, 아스, 너…….”
“으아앗!”
리을의 얼굴이 가깝다. 아스는 화들짝 놀라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러나 리을은 더욱 고개를 가까이 붙이고 아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눈이……. 눈 색이 변했어.”
“뭐?”
리을이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이건…….’
아스는 숨을 삼켰다. 눈이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어딘가 꽉 막힌 느낌이 사라지면서, 낯선 빛깔의 눈에서 진한 마력의 근원이 느껴졌다.
* * *
약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제임스와 함께하는 일정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하하핫!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출국하시기 전에 한 번 더 놀러 오세요.”
이제 제임스는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은, 비공개 일정이 남아 있었다. 헌터의 비공개 일정이란 대개 던전 조사다. 제임스 역시 <던전관리청>과 협의하에 대던전 《어비스》에 간다고 했다.
자연히 내 일정도 여기서 끝. 나는 제임스와 인사를 하고 던전에서 마실 수 있도록 음료를 넉넉히 챙겨 주었다.
“그럼 또 만납시다.”
달칵, 문이 닫히고 제임스가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음, 그럼 이제 잠깐 쉴까? 앉아서 쉬어야겠다, 하, 하, 하.”
“왜오옹(너는 연기에는 소질이 없구나)!”
미음아, 너한테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오늘 날씨가 좋네. 아스, 그치?”
“지금 영하인데.”
“……뀨우우?”
지금이다!
나는 마치 라임이에게 관심이 없는 듯 딴청을 부리다가 단번에 몸을 날려 라임이를 붙잡았다.
“아스! 이동장 열어!”
“뀨우우웃!”
휙. 나는 얼른 라임이를 슬라임 이동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반항해도 소용없어. 라임아, 너는 오늘 나랑 같이 갈 데가 있단다.”
“뀨우우…….”
드디어 주노을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간 제대로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교육장에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주노을은 내일쯤 카페에 들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하루를 더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왜냐하면, 제임스 방문 행사 동안 결국 라임이의 먹이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음식이 뷔페 형식으로 차려진 만찬장에서 라임이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을 때의 절망감이란.
아직까지 영양실조 증세는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어째서 라임이가 이렇게 쌩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에 실패할 시, 라임이의 호감도가 하락합니다.]
시스템이 야속하게 알림을 띄웠다.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한시가 급한 만큼, 내가 라임이와 함께 <로열 길드>로 찾아가 주노을을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감사하게도 내가 고민이 있다고 하자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아스, 그럼 나 다녀올게.”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가.”
문을 열기 전, 나는 다시 아스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눈이 아직 영 낯설었다.
얼마 전, 아스의 눈이 갑자기 보라색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병이나 시력에 문제가 생겼나 하고 놀랐다.
다행히 병은 아니라고 아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냥 더 강해졌을 뿐이라나. 겨우 안심했다.
눈이 보랏빛을 띠자 아스는 완전히 판타지 소설의 캐릭터 같았다. 권지운이나 최로나도 그렇고, 내 주변에는 어째 컬러풀한 사람이 많구나.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 색이 변한 이후로 아스는 성격도 조금 변한 것 같다. 붙임성 없고 부루퉁한 점은 그대로지만, 뭐랄까…… 그래, 어른스러워졌다.
‘애는 빨리 크는구나…….’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며, 나는 가게를 나섰다.
<로열 길드>는 의외로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주노을의 취향이 반영된 듯한 커다란 슬라임 동상이 눈에 띄는 정도일까.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주노을의 직속 부하가 나를 길드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이따금 주노을과 함께 카페에 와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길드장실 앞. 부하가 똑똑 문을 노크하더니.
“길드장님, 들어갈게요!”
곧장 벌컥 문을 열었다.
“으아아악! 노크! 노크 모르냐는!”
주노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노크했잖아요.”
“문을 두드렸으면 좀 기다리라는…….”
주노을은 컴퓨터로 무언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의 화면을 멋대로 보려던 건 아닌데, 위치상 자연히 상단의 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Y♥R 투샷 모음……?
상당히 신경 쓰이는 제목이었는데, 주노을이 곧장 창을 끄는 바람에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
“오랜만이라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노을 씨도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다면서요.”
주노을이 사용하는 길드장실은 의외로 물건이 적어 널찍했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주노을의 부하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너무 여기저기 둘러보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그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리을 씨가 오시기 한 시간 전에 길드장님이 급하게 치우느라 물건을 다 서랍에 쑤셔 넣어서…….”
“얼른 나가라는!”
주노을의 재촉에 부하가 차를 내주고 물러났다. 달칵, 문이 닫히자 주노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민 상담이란 건 뭐냐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실은…….”
“아, 잠깐! 잠깐만!”
그녀는 얼음이 든 차를 벌컥 들이켜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결 차분한 태도로 다시 말했다.
“준비되었다는. 어떤 고민이든, 연애 상담이든 뭐든 말하라는!”
“그런 건 아니고, 우리 라임이 때문인데요.”
나는 슬라임 이동장을 열어 라임이를 꺼내 주었다. 통, 하고 몸을 튕기며 라임이가 울었다.
“뀨우우!”
주노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라임이가 반가우면서 동시에 내 용건이 무척 의외인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주노을에게 대뜸 ‘긴히 상담할 일이 있어요.’라고만 말했다. 전화로 미리 간단하게라도 용건을 설명하면 좋았을걸. 나도 정신이 없는 통에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 라임이가 벌써 며칠째 밥을 먹지 않고 있어요. 혹시 슬라임이 뭘 먹는지 아시나 해서요.”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무척 뜻밖이었다.
“슬라임에게 왜 밥을 주냐는…….”
“네?”
나는 이리저리 몸을 튕기는 라임이를 붙잡아 품에 안았다.
“뀨우우?”
“자, 잠깐.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슬라임 학대자를 보는 것처럼 차갑게 보냐는…….”
“어떻게 동물을 키우면서 밥을 안 줄 수가 있어요?!”
당황한 주노을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슬라임은 편의상 동물형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사실은 동물과 식물의 중간, 그중에서도 식물에 더 가깝다는…….”
“……엑.”
“뀨우우?”
내 속도 모르고 라임이는 태연하게 울었다.
라임이 너…… 식물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