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주노을의 설명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식물에 가깝기 때문에 슬라임은 따로 밥을 먹지 않는다는……. 대신 광합성으로 영양분을 섭취한다는…….”
“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가요? 헌터 채널만 해도 이런 정보가 전혀 없더라고요.”
“그건 이 떡밥으로 싸움이 너무 많이 나서 그렇다는…….”
“아하.”
주노을에 따르면 ‘슬라임은 그래도 동물형 몬스터다’파와 ‘식물형 몬스터다’파가 과거에 죽어라 싸워 댔다고 한다. 꺼내기만 하면 어떤 커뮤니티도 찢어 놓는 황금 사과라 지금은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나.
그래서 아무리 라임이의 먹이에 대해 검색해도 정보를 찾을 수 없었구나.
헌터 채널에 질문글을 썼을 때 어그로로 몰린 것도 그래서였고.
“정말 슬라임알못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어떻게 슬라임이 동물이라는 망언을 할 수가 있냐는!”
지나간 투쟁의 역사를 떠올렸는지 주노을이 잠시 화를 냈다.
그래, 광합성을 했구나. 광합성이라, 그래서 밥을 안 먹은 거였어. 흐음, 흐음.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그런데 우리 라임이는 얼마 전까지는 꼬박꼬박 밥을 먹었어요. 커피 열매 먹는 거 노을 씨도 보셨잖아요. 슬라임이 그냥 광합성을 한다면, 그때는 왜 밥을 먹은 걸까요?”
“그건 먹는 게 아니라는. 놀이라는…….”
“네?”
“그냥 열매를 녹이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거지,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아니라는……. 말하자면, 아, 그래, 개껌 같은 거라는.”
개, 개껌…….
“헐…….”
“뀨우우!”
그것도 몰랐냐는 듯 라임이가 태연하게 울었다.
띠리링. 충격에 빠진 내 앞에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떴다.
[축하합니다! ‘서브 퀘스트: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경험치: 500exp를 획득했습니다.]
[랜덤 스킬 포인트를 1 획득했습니다.]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B)의 레벨이 2로 올랐습니다.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B)
상세: (Lv.2) 던전에서 음료 제조 시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
[슬라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라임이가 당신에게 깊은 호감을 느낍니다.]
“뀨우웃…….”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라임이가 건강하다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이 허탈한 기분은 뭘까.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라임이는 옆에서 말랑한 몸을 튕길 뿐이었다.
동물을 키우는 건 정말…… 아니, 식물을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 * *
슬라임의 진실을 알고 권리을이 충격에 빠진 바로 그때.
제임스는 대던전 《어비스》의 안을 탐험하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거대한 석탑, 내부는 여러 겹으로 중첩된 이공간. 그 끝은 아직 인간이 닿지 못한 곳이었다. 이런 형태의 던전은 오직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제임스의 이번 한국행에 <미국 헌터 협회>는 난색을 표했다. 이미 한 번 죽을 위기를 겪은 곳에 또 주요 전력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 실제로는 미국 헌터계 내부의 세력 구도 때문.
‘얼마나 어리석은가.’
다들 머리가 굳었다. 지금 집중할 일은 미국 내 헌터 간의 알력 관계 따위가 아니거늘.
그러나 제임스는 꼭 다시 이곳에 오고 싶었다.
이유는 몇 달 전 <카페 리을>에서 동굴흑곰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했을 때의 경험이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그날 일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은 잔잔한 이 대던전에서 그날 왜, 어떻게 몬스터가 튀어나왔는가. 그리고 몬스터는 무얼 두려워했는가.
긴 협의 끝에 겨우 한국 방문이 실현되었지만, 덤이 붙었다. 제임스는 슬쩍 뒤를 보았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동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귀찮은 놈들 같으니.
제임스는 한 손에 <카페 리을>에서 받은 음료를 들고 마시며 다른 한 손으로는 던전에 대해 이런저런 내용을 메모했다.
“흐음…….”
쑥이 들었다고 했나. 음료는 아주 맛있었다. 마음의 깊은 곳까지 스미는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쑥 향기는 믹스커피와는 다르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 안에 털어 넣은 그때였다.
푸욱!
어디선가 나타난 몬스터 여럿이 제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불시의 습격. 앞발이 정확히 제임스를 공격했다.
“……!”
그러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템: 쑥 라테의 효과로 대미지가 반사됩니다. (남은 횟수: 2회)]
“헉, 허억…….”
반사 대미지에 몬스터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 제임스는 무기를 꺼냈다. 설렁설렁 제임스의 뒤를 따라오던 일행들이 재빨리 다가와 대형을 만들었다.
“어이! 제임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 구역은 안전하다며?”
“불평이나 할 때가 아니다. 빨리 탈출해야 해.”
“뭐? 그게 무슨…….”
제임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일행이 굳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이 시야 끄트머리부터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몬스터 떼가 쏟아져 나왔다.
* * *
나는 품에 라임이가 든 이동장을 껴안고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우리 라임이가 사실 식물형 몬스터였다니.’
미음이랑 아스가 라임이의 변화에 무관심했던 것도 그래서였나. 그럼 나한테도 자세히 말 좀 해 주지!
“잠깐만. 라임아, 그럼 전에는 왜 아침마다 밥 달라고 울었던 건데?”
“뀨우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라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집 슬라임이지만 정말 얄밉다.
앞으로 밥을 주는 대신 광합성하게 햇볕에라도 내놔야 하나? 커피 열매를 까는 건…… 뭐,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기계라도 구해 볼까.
[차원의 상점에 전자동 커피 펄퍼(★★★☆☆)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열매 과육을 벗길 수 있는 훌륭한 아이템!
많은 이용 바랍니다.]
눈치 빠르게 시스템이 이런 알림을 띄웠다. 나는 차원의 상점을 열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엑…….”
엄청나게 비쌌다. 그저 시스템상의 글자일 뿐인데도 그동안 내가 번 루비를 긁어 가려는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음,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안 사고 버티다 보면 할인을 해 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차원의 상점을 끄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카페 리을>의 모습이 보일 무렵이었다.
“뀨우웃!”
라임이가 안에서 스스로 이동장을 열고 튀어나와 통통 몸을 튕겼다. 너 이동장 열 줄 알았구나! 그런 놀라움도 잠시, 나는 슬라임 어 번역기를 꺼냈다.
“뀨우! 뀨우우우!”
‘슬라임은 무엇으로 사는가.’
또 이 이야기였나……. 그런데 다음 말은 내용이 달랐다.
“뀨우웃! 뀨!”
‘슬라임은 인과의 파편을 먹고 산다.’
“어? 인과의 파편? 잠깐, 라임아, 설마 그게 커피…… 위그드라실의 열매 이야기야?”
“뀨웃! 뀨우우!”
‘충분한 인과의 파편이 모였다.’
“뀨우, 뀨!”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
“새로운 이야기가 뭔데?!”
“뀨우우우웃!”
‘적법한 힘의 계승자여, 다음 장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라임아, 성녀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말고, 자세히 좀……!”
쿠르릉-
그때, 굉음이 들렸다.
처음에는 천둥인가 했다. 그러나 소리는 하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어딘가 여기서 먼…… 아니, 가깝다.
쿵-
흙먼지와 함께 공중에서 거대한 돌덩이가 날아왔다. 거의 내 몸집만큼 크다.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것 같다.
“으아악!”
그러나 돌덩이는 이미 가까웠고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당황한 와중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뀨우우우!”
내 앞으로 나선 라임이가 몸을 얇은 막처럼 넓게 퍼뜨렸다. 이 막이 나를 감싸 방패가 되어 주었다.
쿵!
라임이에게 부딪친 돌덩이가 조각이 되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원래대로 동그래진 라임이가 칭찬을 바라는 듯 몸을 튕겼다.
“뀨우!”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된 거야……?”
늘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던 대던전 《어비스》가 없었다.
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그 커다란 던전이 폭삭 주저앉았다.
“저게…… 무너지는 거였어?”
검은 구름이 몰려든 하늘. 대던전이 무너진 자리에는 붉은 빛을 뿜어내는 게이트 같은 것이 생겼다. 예전 용산 사건에서 하늘에 나타난 얼굴 없는 자의 게이트와 닮았으면서도 훨씬 불길해 보였다.
위이잉.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시스템이 경고를 띄웠다.
[Warning! A급 균열 발생
좌표: 37°32'xx.x"N 126°57'xx.x"E
제한 시간 내에 처리하지 않을 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혼란이 도시 전체로 번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5장. 별빛을 따라서
김지나는 손에 든 자그마한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서 노란색 빛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저쪽이에요.”
빛을 따라 몸을 돌리니 기계에서 삐비빗 하는 소리가 났다. 신호가 강해졌다. 역시 이쪽부터 수색한다는 판단은 옳았다.
신호를 따라 거침없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를 따르는 헌터가 당황해서 말을 걸었다.
“김지나 요원님, 정말 이런 곳에 그것이 있을까요?”
주위는 짓다 만 건물 하나가 있을 뿐인 삭막한 땅이었다. 오래전에 공사를 하다 그만둔 듯 폐자재와 시멘트 포대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한때 교단이 소유했으나 그대로 잊혔다고 한다.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야 해요.”
“주, 죽었다고 들었는데…….”
김지나는 흘깃 헌터를 쳐다보고 좀 더 친절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이 헌터가 불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아서였다.
‘이온’이 무엇인지 말이다.
수색 작업은 지루한 법이다. 손바닥만 한 기계 하나에 의지해서 반응을 탐사해야 했으니까. 심심풀이는 되겠지.
“화신체는 한 번 이 세계에 소환된 이상 쉽게는 죽지 않아요.”
눈으로 여전히 기계의 오르내리는 숫자를 살피면서 지나는 철골이 다 드러난 건물 안을 향했다. 후다닥 헌터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화신체가…… 뭔데요?”
“격이 높은, 통칭 ‘위대한 자’라고 불리는…… 말하자면 이계의 신이라고 할 수 있죠.”
“신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