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끝없는 균열 발생에 사람들은 지쳐 갔다.
오늘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내일은? 또 모레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답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그저 꾸역꾸역 절망을 눌러 삼키며 오늘의 싸움을 해 나갈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자연히 <카페 리을> 영업은 중지.
나는 기유현과 전화로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다. 기유현은 내게 절대 가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이토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나중에는 전화마저도 잘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매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기유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분하고 정제된 말씨, 자신감 있는 표정, 그를 증명하는 압도적인 힘, 성과…….
그는 세상이 상상하고 바라던 이상적인 랭킹 1위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설픈 웃음을 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정체를 밝힌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기유현의 검게 변한 팔과 들끓던 열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픔보다도, 내게 들킨 것을 곤란해하던 어설픈 웃음도.
지금도 그는 홀로 아픔을 견디는 상태일까.
“왜오옹(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뉴스가 다음 꼭지로 넘어갔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별의 지혜 교단>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미친놈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해외로 도피시켜 준다며 돈을 뜯어낸 사기꾼 소식도.
“……하아.”
인류애가 떨어지는 소식들이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페의 워크 스루 카운터를 확인했다. 보온병과 일회용 컵에 커피를 종류별로 가득 채워 두었다. 이 정도면 내가 없을 때도 적지 않은 수가 마실 수 있겠지.
이렇게 혼란한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처박혀 있자니 오히려 불안했다. 시스템은 아무런 퀘스트도 띄우지 않았고, 에테르-위키에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든 연결☆신비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헌터들에게 커피를 제공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늘까지다.
사태가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던전관리청>에서 내게 대피소로 이동할 것을 권고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권고대로 대피소를 향하기로 했다.
현재는 붉은빛을 내뿜을 뿐 잠잠하지만, 무너진 대던전 《어비스》에서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다. 오늘 괜찮았다고 내일도 괜찮다는 보장은 없으니.
넉넉하게 커피를 만들어 두었고 짐도 쌌다. 이제 시내의 대피소로 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난관에 부딪친 상태였다.
“너희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뀨우웃!”
“왜오옹, 걱정하지 말거라.”
바로 우리 집 동식물, 미음이와 라임이가 대피소로 이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몬스터 나온다는 소식 못 들었어?”
“뀨우우…….”
“‘뀨우우’ 하지 말고! 너희가 아무리 집순이들이라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니깐.”
“그래도 안 간다, 왜오옭!”
“……에잇!”
우당탕!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몸을 날렸다. 그러나 미음이와 라임이는 잽싸게 내 손길을 피했다.
“미음아, 당장 이리 안 와?”
“……왜오오옭!”
빙글빙글 돌다가 내 손을 샤샥 피하는 고양이가 아주 얄밉다.
“아스, 라임이 잡아!”
“알았어!”
“뀨우우웃!”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기며 멀리 달아났다.
“헉, 허억, 헉…….”
이렇게 몸싸움을 한참 했지만 나는 결국 미음이와 라임이 붙잡기에 실패했다. 한참 뛰어다녔더니 출발하기도 전에 숨이 찼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라임이 쟤는 코롱이 때문에 안 간다고 쳐. 미음이 너는 왜 안 간다는 건데?!”
“왜우웅……. 여기가 우리 집이다. 누군가는 집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미음아…….”
헉, 하마터면 감동받을 뻔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다. 언제 몬스터가 나타날 줄 모르는데 얘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대피소는 결계가 쳐져 있어 균열에서 안전하단 말이다.
게다가 대던전 《어비스》가 무너지고 생긴 저 빨간색 게이트도 불길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전에 라임이가 한 말도 신경 쓰이고…….’
‘적법한 힘의 계승자여, 다음 장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그 말.
나는 라임이를 붙잡고 짤짤 흔들며 뜻을 물었지만 소용은 없었다. 다시 이과 슬라임으로 돌아온 라임이는 원주율이나 읊어 댔기 때문이다.
제발 무슨 말을 할 때는 정확한 정보를 주면 좋겠다. 성녀처럼 의미심장하고 애매모호하게 말하기를 금지하고 싶다. 이 언니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아무튼…….
나는 다시 이 고집 센 동물들을 설득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어떡해.”
“걱정하지 말거라. 이공간 안에 있을 테니까.”
“뀨우우!”
확실히 이공간 안이라면 안전할 테지만……. 나는 마지못해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었다.
“……정말이지? 진짜 이공간 안에만 있어야 한다?”
“안심하고 다녀오거라, 왜옹!”
막무가내인 미음이와 라임이의 고집을 꺾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아스와 둘이서 대피소로 가기로 했다.
문을 잠그고 마지막으로 가게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이 가게에 정이 많이 들었다. 고작 며칠 떠나 있는 것뿐인데도 무척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면…… 돌아올 수 있겠지?
“……안 오고 뭐 해?”
“어, 갈게!”
나는 불안을 접어 넣고 아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균열의 여파인지 드문드문 부서진 건물이 보였다. 미처 다 수거되지 못한 몬스터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 애써 한숨을 삼키며 어딘가로 향하는 헌터들…….
도무지 한낮의 서울 도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일상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처럼 가게를 열고, 지친 표정의 헌터에게 차가운 생수병을 건네준다.
“아스, 이쪽이야. 이쪽으로 쭉 가면 있어.”
“……응.”
시내에는 대피소가 여러 군데 있었다. 나는 개중 가까운 시청역 대피소로 배정받았다.
아스와 함께 대피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가깝다. 위험을 피해서 대피소 쪽으로 달리려다가, 나는 흠칫 놀랐다.
크르르르르!
건물 틈새로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나하고는 제법 거리가 있다. 달리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치. 하지만…….
“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의 진행 방향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리다가 바닥을 굴렀다.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는다. 흥분한 몬스터가 큰 입을 쩍 벌렸다.
“……안 돼!”
화르르!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몬스터를 향해 크투가의 반지를 사용했다.
“크르르르……!”
붉은 불꽃이 몬스터의 몸을 뒤덮었다.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됐다!”
“아니, 누나, 조심해!”
황급히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아스가 붙잡았다.
불이 붙었지만 몬스터는 곧장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불타는 채로 더욱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마구 주위를 물어뜯으려는 몬스터의 위협에 당황하는데.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검이 몬스터의 목 뒤를 꿰뚫었다. 몬스터의 거대한 몸이 쿵,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헉, 허억……. 가, 감사합니다……. 어?”
나는 검이 날아온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다가 깜짝 놀랐다. 아는 얼굴이었다.
“……이찬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리을아.”
씩, 최이찬이 웃음 지었다.
아까 쓰러졌던 아이의 부모가 우리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그들이 떠난 뒤, 나는 최이찬을 돌아보았다.
최이찬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독특한 노란색 패딩을 걸친 사람이 함께 있었다. 후드와 마스크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초면에 이런 생각을 하면 실례지만, 어쩐지…….
‘기분 나빠…….’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몸을 엄습했다. 쭈뼛 솜털이 곤두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아스 역시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찬아, 저분은…… 누구야?”
“어? 아! 신경 쓰지 마. 이제 갈 거니까.”
훠어이. 최이찬은 마치 호객꾼을 쫓아내듯이 대충 손을 휘저었다.
“간다고 안 했…….”
“이제, 갈, 거니까.”
쯧. 최이찬의 닦달에 혀를 차고는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멀어져 갔다.
최이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으음, 초면인 사람을 이유 없이 불쾌하게 여기는 건 좀 그렇지? 괜히 떨떠름해하지 말자. 나는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떠난 쪽을 흘깃 보고 시선을 거둬들였다.
“대피소로 가는 거지?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또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괜찮다고 했는데도 최이찬은 나와 아스를 대피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반가운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 그와 함께 걸었다.
거리가 가까워 금방 대피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최이찬은 곧장 돌아서지 않고 잠시 입구 앞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이찬아?”
“리을아, 내가, 그…… 할 말이 있는데.”
“응? 어, 해.”
“그게…….”
그러나 도통 말을 꺼내지 않고 입술만 달싹이기를 한참.
위이이잉. 최이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균열 관련한 호출인지, 내용을 확인한 최이찬이 아쉽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다음에. 다음에 보면 그때 말할게.”
“뭐? 이찬아, 최이찬!”
타다닥! 최이찬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길 저편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