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 *
대피소는 생각보다 쾌적했다.
견고한 벽에 둘러싸인 내부가 제법 넓다. 강당 같은 형태려나 했는데 가벽이 쳐져 있어 약간이나마 개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벽면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뉴스 등의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피소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구호물자를 배분하고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 덕분인지 사람들의 표정도 생각보다 밝았다. 오래지 않아 이 사태가 수습되고 일상을 되찾으리라 믿는 표정이었다.
나는 구호물품을 받은 뒤 가벽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묵묵히 옆에 있는 아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나는 괜찮아.”
단호한 말투였다. 말간 낯에는 어떤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잠시 아스를 살폈다. 키가 약간 자라고 눈이 보랏빛이 되었지만 그저 그뿐. 얼핏 보기에는 예전과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역시 어른스러워졌어…….’
꾸준히 마왕 숭배교 <황혼> 사람들과 봉사 활동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좋은 또래 친구가 생겨서?
어쨌건 미음이와 라임이도 놓고 온 지금, 아스가 함께 있어서 무척 안심되었다. 혼자였다면 불안했겠지.
나는 적당한 곳에 앉아 먼저 핸드폰을 꺼냈다.
알림이 여럿 쌓여 있었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지속적으로 균열이 발생했고, 헌터들이 방어했다는 기록뿐.
이런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랄까. 적어도 가까운 사람의 비보가 없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에 알림을 확인하자 역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강도로 균열이 발생하는 것 같달까.
‘이 사태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
이럴 때야말로 성녀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음대로 말을 걸 수 없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성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구나…….
나는 알림을 삭제한 뒤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권지운의 이름이었다.
균열 사태가 터진 후 권지운과는 거의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이고 광범위한 균열에는 필연적으로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자연히 힐러의 수요가 급증할 테니, 그는 한참 정신없을 테다.
‘또 포션만 줄창 마셔 대지 않으면 좋겠는데…….’
권지운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어차피 못 받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대피소에 들어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카톡만 남겨 두었다.
다음은…….
손가락으로 연락처 목록을 넘기려는 때였다.
“저기, 아가씨, 잠깐 부탁이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손으로 벽을 두드려 노크하고는 나를 불렀다. 맞은편에 있던 대피자였다.
“네, 무슨 일이세요?”
아주머니는 한 손에 전기포트를 들고 반대쪽 손으로 벽면의 콘센트를 가리켰다.
“콘센트 좀 빌릴 수 있을까? 우리 쪽엔 없어서.”
가만 보니, 대피소 내부의 구역 구분에 따라 콘센트가 모자란 곳도 있는 모양이다. 당장 사용할 예정도 없는 만큼 나는 흔쾌히 응했다.
“네, 그럼요.”
“고마워. 별건 아니지만 아가씨도 한 잔 줄게.”
아주머니는 전기포트로 물을 끓여 믹스커피를 타려 했다. 치이익, 물 끓는 소리가 나자 주섬주섬 종이컵과 믹스커피 봉지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불쑥 말했다.
“그거, 제가 탈까요?”
“어머. 안 그래도 돼.”
“제가 탈게요. 제가 이래 봬도 커피를 좀…… 잘 타거든요.”
나는 사양하는 아주머니의 손에서 믹스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스킬 ‘내 손안의 카페’를 써서 믹스커피를 탔다.
‘내 손안의 카페’ 스킬은 가게 안에서 음료 제조 시에 완성도가 높아진다. 지금은 가게 안이 아닌 만큼, 스킬이 적용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띠링.
[아이템: 믹스커피(★★★☆☆)
상태: 매우 좋음 (남은 시간: 00:03:00)
효과: 회복 속도가 100% 빨라집니다.]
제대로 3성 믹스커피가 나왔다.
[사용자님이 있는 곳이 바로 카페입니다.]
[시스템은 유도리 있게 스킬을 적용합니다.]
아니, 저기……. 스킬을 적용해 준 건 좋지만, 바른 한국어를 써야지.
[시스템은 융통성 있게 스킬을 적용합니다.]
곧장 시스템 창이 업데이트되면서 올바른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런 요청은 재깍재깍 반영하면서, 정작 지금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는 것이 어이없었다.
“여기, 드셔 보세요.”
“고마워. 신세를 지네.”
아주머니가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모금을 맛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다. 그냥 짐 가방에 있던 믹스커피인데……. 혹시 여기 뭐 탔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이상하다……. 커피를 잘 탄다는 말이 진짜였네.”
그러더니 아주머니는 벌떡 일어나 맞은편 칸으로 가서 일행들을 불렀다. “자기, 이것 좀 마셔 보라니깐!” 하는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렸다.
나는 얼른 남은 물로 믹스커피 몇 잔을 더 탔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일행들에게도 한 잔씩 건넸다.
“어, 어어, 어!”
“……우와. 맛있어!”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감탄과 순수한 기쁨이 얼굴에 머물렀다.
그들의 반응은 내게 무척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물론 <카페 리을>에서 만난 손님들도 진심으로 커피를 맛있어했다. 하지만 카페가 유명해지면서 자연히 ‘커피의 맛과 효능’을 이미 아는 손님이 대부분이 되었다.
절대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골들의 그런 반응 역시 무척 기뻤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가 보여 준, 예상 밖의 맛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탄은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왔다.
무척 새삼스러워서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한데, 나는 커피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신기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가게를 떠난 지금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
“정말 고마워. 맛도 있는데, 마시니까 어쩐지 힘이 나네.”
“아하하……. 기운이 나셨다면 다행이에요.”
살짝 서늘한 대피소 안에서 달착지근한 믹스커피 냄새는 잘 퍼졌다. 나는 아예 전기포트를 빌려서 커피가 있냐며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도 믹스커피를 타 주었다.
몇 개 없던 믹스커피가 다 떨어지자, 누군가가 믹스커피 100개들이 상자와 종이컵을 기증했다. 나는 흔쾌히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믹스커피를 타 주기로 했다.
이렇게 마구 믹스커피를 타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회귀 후 각성을 하고, 믹스커피 100개 타기 퀘스트를 받았을 때다.
그동안 여러 사건이 많았기 때문인가, 고작 몇 달 전인데도 까마득하게 옛날로 느껴졌다. 어떡하면 믹스커피 퀘스트를 빨리 해치울 수 있는지나 고민하던 시절이 진심으로 그리웠다.
‘마지막 백 번째 커피를 유현 씨가 마셨지…….’
그때는 그를 이토록 가깝게 여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전부 믹스커피를 나눠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아스 몫의 커피를 탄 후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작 종이컵에 든 적은 양의 인스턴트커피일 뿐이지만, 이런 때는 어쩐지 힘이 난다.
나는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돈다. 커피의 온기와 달콤함이 흐릿한 불안과 낙담을 씻어내 주었다.
처음에 커피와 전기포트를 가져온 아주머니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커피가 조금이나마 힘을 주었을까. 표정이 밝다.
“아가씨는 동생이랑 같이 들어온 거야? 힘들겠지만 그래도 곧 집에 갈 수 있을 테니 기운 내요.”
“동생…… 아닌데…….”
“아유, 동생이 떼도 안 쓰고 참 착하네. 누나 안 힘들게 말 잘 듣고.”
“…….”
아. 아스의 저 부루퉁한 표정이 무슨 뜻인줄 안다. 떼를 쓸 만큼 어린애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어린애 같을까 봐 고민하는 표정이다. 나는 웃음을 삼켰다.
아주머니는 아스를 칭찬하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 애들도 남매인데, 어찌된 게 동생이 더 빠릿빠릿해.”
“자녀분이랑 따로 들어오셨어요?”
“아니. 우리 집 애들은 일을 해야 해서 나만 들어왔어. 둘째는 공무원이라 요즘 주말도 없거든.”
아주머니의 얼굴에 걱정과 함께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감돌았다.
“큰애는…… 하아…….”
자랑스러움이 순식간에 시름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정신을 좀 차린 것 같기는 한데……. 그래, 아가씨도 각성자지?”
“헉,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지. 잘 보면, 각성자들은 자꾸 조금씩 허공을 쳐다보거든.”
내가 그랬었나…….
“아무튼, 혹시 각성자면 그런 법이 있어? 멀쩡한 본명 놔두고 이상한 이름을…….”
아주머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쿵! 쿠웅!
“으아앗!”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위이잉, 위이이잉-
사이렌 소리,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섞여 띠링, 하는 알림이 울렸다. 장내의 몇 각성자들이 허공을 응시하더니 낯빛을 굳혔다. 전원에게 같은 메시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1, 5, 10, 20, 50…… 100.
테스트 종료. 데이터 수집이 완료되었습니다.]
대피소 안은 창문이 없어 바깥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벽면의 스크린 앞으로 향했다. 서울 상공을 비추는 화면. 붉은색 빛을 내뿜는 게이트 주변으로 작은 게이트들이 생성되는 것이 보였다.
“……! 저건…….”
그리고 그 게이트들에서 수많은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그럭저럭 대응할 만한’ 균열과는 달리 엄청난 수였다.
시스템 창은 계속해서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마신 □□□□의 게이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을 시 소환이 진행됩니다.]
[마신 □□□□의 게이트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72:00:00]
쿵!
다시 충격음이 들렸다. 천장에…… 무언가 있다. 아니, 천장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몬스터가 벽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꺄아아악!”
“여러분! 진정하시고 안내에 따라 움직여 주세요!”
“침착! 침착하세요!”
결계 안에 위치한 대피소다. 원래라면 균열로부터 안전한 구역. 최소한의 경호 인력이 있을 뿐이라 몬스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쩌억, 하고 갈라진 벽의 틈새로 몬스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벽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진다.
“으…… 으아아악!”
대피소 안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여기서 탈출하기로 결정한 공무원들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비상구로 인도했다.
그때 다시 시스템 알림이 떴다.
[공통 퀘스트: 마신 □□□□의 부활 저지하기
깨어나세요, 용사여!
마신 □□□□의 부활이 임박했습니다.
게이트를 통해 《궁극의 문》에 도달하여 마신을 봉인합시다.
성공 시: 세계의 유지
실패 시: 세계의 소멸]
[엄정한 테스트를 거쳐 퀘스트 참가자를 선정했습니다.
첫 번째 참가자: 기유현(S)
……(Now Loading)]
급박한 와중에도 작은 환호성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