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192)

168화

시스템 창의 내용을 읽은 사람들이 명백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림의 끝에 뜬 이름이 현재 가장 신뢰를 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할머니의 수첩을 통해 본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파국으로 끝난 마신 토벌. 그리고…… 섬찟한 죽음.

환상에 불과하다. 현실이 아니다. 결코 이번 삶은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꼭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크르르르!

그때, 머리가 내 몸통보다 큰, 파충류를 닮은 몬스터가 대피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피자들은 비상 통로와 수송 차량으로 나뉘어 탈출 중이었다. 하지만 늦다. 이대로면 수 초 뒤에 몬스터가 수송 차량을 찢어발길 터였다.

‘……영겁의 불꽃!’

나는 곧장 크투가를 소환했다. 몸에서 살짝 힘이 빠져나가면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도와주세요……!”

느긋하게 상황을 설명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크투가는 몬스터 떼를 향해 강력한 불꽃을 발했다.

화르르!

크어어엉!

엄청난 열기에 뺨이 홧홧했다. 불꽃은 순식간에 몬스터를 재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불꽃이 빚어낸 반원의 장막이 몬스터의 접근을 차단했다.

“으하핫! 적절한 때에 잘 불렀구나, 손녀여!”

펑! 불꽃에 몬스터가 타오르자,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렸다.

몬스터는 끝없이 몰려들었다. 크투가의 힘은 무척 강했지만, 여기서 혼자 무한정 싸울 수는 없었다.

“어, 어서! 헌터님, 이쪽으로 오세요!”

대피가 끝난 비상 통로 쪽에서 공무원 한 명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충분히 대피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 아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크투가가 내 등 뒤를 지켰다.

“아스, 가자.”

“……응.”

통로의 입구는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 통로 안에 몸을 밀어 넣으려 했다.

콰앙!

맞은편 벽의 틈새로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몬스터는 굵은 꼬리로 벽과 바닥을 마구 두들겼다.

“……윽!”

쩌억! 바닥이 갈라지면서 몸이 중심을 잃었다. 발이 갈라진 틈새로 미끄러지고, 몬스터가 내 머리통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크투가는…… 안 돼, 늦는다.

주위가 느리게 보였다. 고통을 각오하는 그때.

퍽!

있는 힘껏 아스가 나를 뒤로 밀었다.

그리고 몬스터 앞을 막아서더니, 손에서 보랏빛 마력을 터뜨렸다.

콰앙!

마력탄을 맞은 몬스터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 아스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를 이끌고 비상 통로를 향해 달렸다.

“헉! 허억…….”

통로의 좁은 입구로 몸을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크투가가 우리를 뒤쫓는 몬스터를 태웠다.

펑! 우지끈!

등 뒤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몬스터의 공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윽, 아야야…….”

“괜찮아?”

어두컴컴한 통로 안. 뻐근한 몸을 겨우 일으키자 아스가 후다닥 내게 다가왔다.

“윽……. 응, 괜찮아.”

여기저기가 쑤시기는 하지만 부러진 곳은 없고, 상처도 찰과상 정도였다.

하지만 손이 계속 덜덜 떨렸다. 방금 겪은, 몬스터의 점심거리가 될 뻔한 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기에 앞서 아스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의 심상치 않은 떨림을 느끼고 아스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러지 마.”

“뭐?”

“아까……. 구해 줘서 고마워. 아스 네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거야.”

생긋. 보일 듯 말 듯하게 아스가 미소 지었다.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네가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한 일로 뿌듯해하지 않으면 좋겠어.

얘는 우리 집 아르바이트생이고…… 아니, 그보다는 동생이자 가족이다. 나는 아스를 보호하고 싶다.

“하지만 자칫했으면 아스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어.”

몬스터를 막아선 아스의 작은 등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아스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도와주지 말라는 게 아니야.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만약 아스 네가 위험해지면…….”

나는 그대로 아스와 눈을 마주쳤다. 흐릿한 어둠 속, 요즘 부쩍 자란 것 같은 동생의 퉁명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절대 그러지 마.”

아스는 그다지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내 재촉에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아스의 손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천장이 무너지면서 아스와 나만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듯했다.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크투가는 소환 해제된 상태였다. 다시 소환하려다 당장 위험은 느껴지지 않아 그만두었다.

핸드폰은……. 이런,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어떻게 할 거야?”

통로 반대편에서 불어온 눅눅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겠지.

[※ 데이터 취합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스템은 이런 메시지만 띄워 놓고 정지 상태.

마신 봉인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에 기유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면 이 께름칙한 불안감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나가는 길을 찾자.”

나는 발을 움직였다.

* * *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지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불쑥 말했다.

“저 진짜 이 일만 끝나면 그만두겠어요.”

최세드릭 남매의 도움으로 균열을 피해 무사히 돌아온 직후, 지나는 이곳에 틀어박혔다. <던전관리청>이 거금을 들여 도입한 장비가 있는 분석실이었다.

바깥은 연속적인 균열 발생으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균열과 달리 의아한 점이 있었다.

‘몬스터들이 겁에 질려 있어…….’

그리고 균열이 터지는 와중에도 그녀가 겨우 사수한 에테르 측정기. 여기에 분명 저 붉은 게이트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가 있을 테다.

“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오래 다니더군요.”

지나의 앞에는 커다란 모니터 세 대가 놓여 있었다. 데이터를 읽으면서 동시에 외부 연락에도 대응한다. 때문에 그녀는 강현우가 한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요, 전 진지해요. 벌써 사직서도 써 뒀어요. 이번에야말로 꼭 그만두겠어요.”

지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현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제가 봤을 때 지나 씨는 여기서 정년까지 일할 사람입니다. 청장까지 올라가겠는데.”

“으아아,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왜, 좋잖습니까. 최초 비각성자 출신 청장.”

허황된 소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지나는 재차 사직 의사를 밝히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이러고 있으니, 최이찬 헌터 붙잡는다고 잠복할 때가 그립게 느껴지네요.”

“……동감합니다.”

힘숨찐 박멸. 그것이 지난 분기 최우선 과제였다. 지금 떠올리면 무척 평화로웠다는 생각마저 든다.

최이찬의 뒤를 쫓을 때만 해도 이렇게 큰일이 터질 줄은 짐작도……. 아. 지나는 손을 멈추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데이터 분석 결과가 나타났다.

“팀장님, 찾았어요! 저 게이트…… 암흑의 옥좌로 연결됩니다. 92.3% 패턴이 일치해요.”

“암흑의 옥좌라고요?”

“네. 이계의 신이 머무는 던전으로 추정되는데……. 보통은 결코 깨어나지 않는 마신, 원시의 혼돈이 주인입니다.”

“……위험하겠군요.”

“마신이 깨어난다면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 전에 퀘스트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때, 모니터에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어느 것 하나 심각하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지나는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강현우에게 말했다.

“아직 해독이 안 된 부분이 있긴 한데……. 팀장님, 제가 방금 데이터 보냈습니다. 확인…… 어?”

슬쩍 뒤를 돌아본 지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 그곳에 있던 강현우가 어느새 없었다.

‘언제 가셨지?’

사람은 적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그는 그의 역할을 하러 갔겠지. 지나는 한번 고개를 갸웃한 후 다시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칵.

강현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나름 분위기를 잡아 보려 했는데 텄다. 김지나는 그에게 조금의 관심도 할애하지 않았다.

뭐, 저렇게 평소 같은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군.

강현우는 저도 모르게 띄운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고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조금 전 뜬 시스템 알림이 깜빡거렸다.

[엄정한 테스트를 거쳐 퀘스트 참가자를 선정했습니다.

두 번째 참가자: 강현우(A)

……(Now Loading)]

* * *

“아스, 조심해서 올라와.”

“……괜찮아.”

다행히 삼십 분쯤 걷자 통로를 빠져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좁은 철제 사다리를 올라간 다음 아스에게 손을 뻗었다. 아스는 처음에는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잠시 문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몬스터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 후 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통로의 퀴퀴한 냄새를 씻어내 주었다.

“나와도 괜찮아. 이쪽엔 아무것도 없어.”

출구는 어느 약국 뒤의 비상구로 연결되었다. 잘 사용되지 않는지 삐걱거렸지만 문이 잠겨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늘의 게이트는 열린 채. 여기서 보이는 게이트의 위치와 표지판에 적힌 글씨로 대강의 위치를 가늠했다. 명동역 인근이다.

게이트와 가까운 위치라 이미 대피가 끝났는지 거리는 고요했다.

‘대피소의 다른 사람들하곤 반대로 온 건가…….’

의도치 않게 도착한 사태의 중심부.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가게로 돌아가야 할까? 하지만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외따로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다. 가게로 돌아가려다 몬스터와 맞닥뜨리면 위험했다.

차라리 다른 안전한 곳에 아스를 맡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왕숭배교 <황혼>의 본거지와 보육원이 있었다. 그쪽이면 방호 결계가 있어 안전할 테다.

그러고 나면 기유현을 찾자.

무사한지만 확인하는 거야. 무사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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