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192)

171화

“밑에서 불렀으면 내려갔을 텐데요.”

“유현 씨, 본인이 거짓말 잘 못 하는 거 알아요?”

나 안 만나고 갈 생각이었잖아요. 그렇게 덧붙이자, 기유현은 속셈을 들켰다는 듯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나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장갑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손이 뜨거웠다.

“역시 또……! 아까 그, 스킬 때문이죠?”

당장 장갑을 벗기고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기유현은 부드럽게 내 손을 밀어 내었다.

“그만두세요. 리을 씨 말대로 절대 벗겨지지 않는 장갑을 샀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조금도 재미있지 않은 농담이었다.

시스템 창의 카운트다운이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나는 겨우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를 꺼냈다.

“조심하세요.”

생긋. 그는 대답 대신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전에 리을 씨한테는 짧게 말했었죠. 회귀 전에 나는 한 번 실패했었다고.”

“…….”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작은 것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어긋나고, 또 어긋나다가…… 실패로 끝.”

할머니의 수첩에서 본 환영이 머리를 스쳤다. 그저 실패라고 축약하기에는 너무나도 적나라한 절망의 순간들.

해묵은 기억을 떨치려는 듯,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미래는 달라졌어요. 그건 전부 리을 씨 덕분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요.”

말과는 달리, 그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내가 리을 씨를 만남으로써 달라졌으니까, 마찬가지입니다.”

“…….”

“리을 씨가 만든 커피를 마실 때마다, 만날 때마다, 또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어긋남이 사라졌고, 변했습니다.”

그가 분명한 진심을 담아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모두 리을 씨 덕분입니다.”

“…….”

“가끔 생각해요. 과거에도 만약 리을 씨를 만났다면 다른 끝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삶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삶에서 리을 씨를 만날 수 있었던 걸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 역시 그를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랬다면 어떤 관계가 되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네.”

“금방 돌아올게요. 과거와 다른 미래를 가지고.”

시스템 창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기유현이 빠르게 설명했다.

“마신 봉인 퀘스트가 시작되는 시기도, 참여 멤버도 달라졌어요. 이건 이온의 소멸과, 각자의 경험치가 달라졌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

“몬스터는 거의 처리했으니 내가 없는 동안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

“아시잖아요. 믿음직한 사람들과 같이 가요. 과거하고는 달라졌어요.”

기유현이 서글프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리을 씨,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인데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손을 뻗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그의 손이 뺨에 닿으려다가, 결국 닿지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시스템은 내가 열쇠라고 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렇다면 알려 주면 좋겠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그러나 나는 그를 대신할 수도, 그와 함께할 수도 없다.

답은 없었고, 이윽고.

[……1, 0.

퀘스트 참가자가 게이트 안으로 자동 이동됩니다.]

파아앗-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기유현이 사라졌다. 하늘의 붉은 게이트가 닫혔다.

띠링띠링!

아무것도 없는 허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떴다.

[System□□□□□ □□□]

[□□□□□□ □□□□

□□…….]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별빛을 따라서

《궁극의 문》을 열 유일한 열쇠여.

문에 도달하여 소중한 사람을 구하라.

미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보상: ???]

“늦잖아.”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투덜거렸다. 마치 눈앞의 퀘스트가 대수롭지 않은 심부름이라, 조금 귀찮은 것처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떨림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의미심장한 문구로 애매모호하게 쓰여 있지만, 결국 나더러 기유현과 다른 헌터들이 떠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라는 거겠지.

역시, 너무 늦잖아.

이미 기유현은 붉은빛을 뿜는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대던전은 흔적도 없이 무너졌고, 게이트는 닫혔다. 퀘스트 참가자에 포함되지 않은 내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이럴 거면 나도 퀘스트 참가자에 포함시켰으면 좋았잖아. 깍두기든 뭐든 한 명쯤 더 넣을 수 있는 거 아냐?

[서비스 지연으로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메시지뿐이었다.

애매모호한 퀘스트 설명문 중 ‘소중한 사람을 구하라’라는 말이 눈에 밟혔다. 그 말은, 내가 가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진다는 건가.

“후우, 하…….”

진정하자. 이런 퀘스트가 떴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늘 퀘스트가 내게 해야 할 일을 제시했듯이.

“……!”

나는 잊고 있던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방법이 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황급히 옥상에서 내려가려는 그때였다.

탁!

뒤에서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안 돼.”

“뭐?”

“가면 안 돼, 리을아.”

최이찬이었다. 최이찬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막아섰다.

* * *

최이찬은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떨리는 숨을 몰아쉰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몬스터와 싸우다 온 건지, 그는 단검을 쥐고 있었다. 아. 지난번 세피로트 가지 사건에서 손에 넣었다던 아티팩트 단검이다.

최이찬이 단검을 쥔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 전체가 아릿했다.

나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무, 무슨 말이야. 나는 그냥 가게로 돌아가려고 했어.”

“너는 거짓말 잘 못하더라.”

“…….”

전혀 통하지 않았다. 최이찬은 전에 없이 무거운 말투로 다시 말했다.

“게이트 안으로 가려는 거잖아. 가지 마. 가면 안 돼.”

“왜? 너, 뭐 알고 있어? 알면 말해 줘.”

최이찬은 여전히 내 손을 꽉 붙잡은 채였다.

“위험해. 마신이 부활한다고 하잖아. 네가 갔다간 죽을 수도 있어.”

“바로 그래서야! 유현 씨가……. 권지운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야. 위험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마치 최이찬은 이 퀘스트가 어차피 실패로 끝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 점이 나를 초조하게 했다. 가슴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이찬아, 아는 게 있으면 말로 해.”

“…….”

그렇게 말했지만, 최이찬은 입술을 잘근 깨물 뿐이었다. 가슴이 확 갑갑해졌다.

최이찬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다는 의심은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속없이 웃으며 가게에 놀러 오던 애의 발길이 끊겼으니까.

넌지시 물어도 모호한 웃음뿐.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는 말해 주려니 했다. 그렇게 믿었었는데.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단순히 내가 위험해질 것 같아서 가지 말라는 거면 이 손 놔 줘.”

“……리을아.”

퍽! 나는 최이찬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나 최이찬은 움찔하지조차 않았고, 내 손을 놓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

예상 밖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도 당연히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최이찬이 말한 것이 ‘그런’ 좋아함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이찬아…….”

채 꺼내지 못한 뒷말이 한숨에 흐트러졌다.

나는 가만히 최이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한 손에 단검을 움켜쥔 채였다. 무언가를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괴로워하는 눈을 보자, 자연스레 그에게 해야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최이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너는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찬이 네가 바라는 마음하곤 다르겠지.”

“내가 만약……. 너한테 일찍 내 마음을 밝혔으면 달라졌을까?”

“…….”

“아니면, 내가 더 일찍 리을이 너와 재회했다면?”

질문을 들은 뒤에야, 답은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있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최이찬이 쓸쓸한 얼굴을 했다. 한편으로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떨리는 한숨을 뱉어 낸 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이제껏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

“고마워. 진심이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기껏 얻은 삶에 더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더 자주 할머니를 만나러 갔어야 했는데, 더 일찍 권지운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기에는 삶이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래.”

최이찬은 천천히 내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끝났음을 느꼈다. 아마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을 소중한 것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울어도 되는 건 내가 아니다. 여기서 우는 건 그에게 너무한 일이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써 빚어낸 웃음 속에 슬픔이 녹아내리고, 그는 다정한 친구의 얼굴을 했다.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가, 리을아. 다음에…… 무사히 돌아오면 그때 보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옥상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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