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192)

172화

* * *

타다닷…….

발소리가 멀어졌다. 최이찬은 이미 권리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한참 동안 그대로 옥상에 서 있었다.

“어라?”

노란 옷의 왕 □□□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은 건가? 가 버렸는데?”

“…….”

최이찬은 대답 없이 그것을 보았다.

“이런, 이런……. 실연의 충격으로 넋을 놓은 건가? 안 되지, 안 돼. 제대로 설명했잖나. 그 단검으로 그 여자를 찌르라고.”

그렇다. 최이찬은 원래 손에 쥔 아티팩트 ‘아주 오래된 단검’으로 권리을을 찌르려 했다.

“사람을 찌르려니 겁이 났나? 그 여자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쯧쯧, 그 아티팩트는 사람의 몸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니까. 끊어내는 것은 오직 인과뿐.”

“…….”

“끝없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 나타난 하나의 특이점. 그 인과를 끊어내지 않으면 그 여자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과 시련뿐이야.”

권리을에게는 수많은 인과가 쌓여 있다. 세계는 끝없이 반복되고, 그녀는 이 무한 나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열쇠다.

그러나 닫힌 시간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그녀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이찬은 진심으로 권리을이 괜찮기를 바랐다. 정말 진심으로.

그래서 이 단검으로 그녀를 찔러야 한다는 말에 동의했다. 그녀만 편안하다면, 다른 일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으니까.

“세계는 또다시 반복되겠지만 뭐 어떤가. 굳이 미래로 나아갈 필요 없잖아?”

“…….”

“크크큭……. 다음 루프에서는 차이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 한 번 차여 봤으니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 여자의 마음을 손에 넣어.”

노란 옷의 왕 □□□는 어쩐지 초조한 기색으로 최이찬을 재촉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늦어. 그 안은 내 힘도 닿지 않아. 자격 없이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 얼른 뒤쫓아!”

이곳에서 권리을의 손을 붙잡은 그 순간까지만 해도, 최이찬은 □□□의 말대로 그녀를 찌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직접 그녀를 마주하고, 눈동자에 담긴 빛나는 의지를 보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밝힐 생각 없던 마음을 고백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막아 주길 바란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권리을이 떠난 지금, 위화감은 점점 더 커졌다.

‘세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나?’

처음 S급이 되었을 때는 다소 당황스러웠을지언정 기뻤다. 그는 늘 히어로가 되고 싶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강한 힘을 원했다.

지금의 나는 히어로에 걸맞은 사람인가?

씁쓸한 답이 나왔다. 세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며, 좋아하는 사람을 단검으로 찌르려 하는 모습은 결코 히어로답지 않다.

애초에, 왜 권리을을 찔러야 한다는 이자의 말을 그대로 믿었지? 그렇게 생각하자, 옆에 있는 이 괴상한 신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노란 옷의 왕 □□□가 초조함을 감추지 않고 다시 최이찬을 재촉했다.

“그 단검은 쥐고만 있을 건가?”

“……아니.”

“호오, 그래, 그래. 얼른 그 여자를 뒤쫓아!”

머리가 맑았다. 이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최이찬은 잠시 노란 옷의 왕 □□□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의 틈으로 녹아내린 피부와 탁한 눈이 보였다. 이제까지 왜 몰랐을까? 음산하고 불쾌한 자다.

이것은 당장이라도 권리을을 찌르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평소의 여유를 잊고 조급하게 굴었다.

최이찬은 이 흉측한 이계의 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 없이 손에 든 단검으로 □□□를 찔렀다.

푸욱!

피는 튀지 않았다. 대신 허공을 벤 것처럼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찌른 자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뒤틀었다.

“크으윽! 어째서……. 왜 나를……!”

“이제 알겠어. 처음부터 네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긴 시간을 낭비했어.”

그가 손에 넣은 단검은 인과를 끊어 낸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인과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이계의 신을 되돌려 보낼 수 있다는 뜻.

그 말을 증명하듯 □□□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내가 널…… 그륵……. 살려 준 걸…… 잊었나…….”

“그렇다고 해서 네가 멋대로 나를 조종해도 되는 건 아니야.”

“후회…… 그르륵…… 그 여자를, 놓…….”

“그렇다고 해서 내가 리을이의 뜻을 방해해도 된다는 것도 아니고.”

이윽고 □□□는 반쯤 녹아내린 점액질이 되었다. 노란 옷의 안쪽에서 거품이 부글거렸다. 겨우 남은 입에서 가래 낀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큭… 그르륵……. 후회……. 이미 수많은 세계가, 멸…… 그르륵…….”

띄엄띄엄 이어지는 그 말을 더 듣지 않았다. 최이찬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단검을 고쳐 쥐었다.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을 찌르는 손짓에 망설임은 없었다.

퍼억!

부글부글…….

거품이 사라졌다.

[노란 옷의 왕 □□□와의 계약이 해제되었습니다.]

[계약자: 최이찬의 스테이터스가 재조정됩니다.]

[최이찬(S) → 최이찬(E)]

뭐, 어쩔 수 없나.

최이찬은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다시 E급이 되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테다.

그런데 다시 시스템 창이 떴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인간의 몸으로 노란 옷의 왕 □□□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의 영향력이 사라졌습니다.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됩니다.]

[이름: 최이찬

클래스: 히어로(S) (Lv.50)]

최이찬은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눈이 시큰거렸다.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권리을은 그녀가 할 일을 하러 갔다. 그러니 그 역시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게이트는 닫혔고, 거리는 복구되었지만 아직 위험은 남아 있었으니까.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나아갔다.

* * *

옥상에서 내려온 뒤, 나는 아스와 함께 가게로 돌아갔다.

기유현이 거리를 복구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위험하지 않기도 했고, 가게에 볼일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소리쳐 불렀다.

“미음아!”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미음이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미음아, 할 말 있어. 숨지 않고 얼른 나와!”

이번에도 마찬가지.

“내가 가서 잡아 올까?”

옆에서 아스가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왜오옹…….”

이공간의 안에서 튀어나온 미음이가 쭈욱 몸을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주 건강하고 느긋해 보인다.

“미음아, 나한테 길을 안내해 줘.”

“…….”

이 게으른 고양이는 잠시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딴청을 피웠다.

“왜오옹, 그게 무슨 말이냐? 집 지키는 고양이가 어떻게 길을 안내하느냐! 길은 지도를 보거라!”

“너, 전에는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 시스템의 무슨 어쩌고 에이전트라며!”

“그건, 실은……. 짤렸다.”

“뭐어어?!”

각박한 고용 시장의 한파가 우리 집 고양이한테까지? 요즘 고양이의 삶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던 건 다 잘려서?!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미음이의 도톰한 엉덩이를 한 대 팡 두들긴 뒤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전에 성녀가 다 말했어.”

“왜오옭?! 성녀가 누구냐?”

아차, 속으로 매번 그렇게 부르다 보니.

“시스템을 관장하는, 의미심장하게 구는 금발머리 여자 있잖아. 네가 나를 안내할 거라고 했다고.”

【언젠가 당신은 문 앞에 도달할 것입니다. 당신의 고양이가 당신을 인도하겠지요.】

나는 확신했다. 성녀가 했던 그 말은 바로 지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대던전은 무너졌고 게이트는 닫혔다. 그러나 이 고양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왜오옹…….”

미음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꼭 가야겠느냐. 이미 게이트는 닫혔고, 몬스터는 사라졌다. 네가 원하는 것이 평화라면, 게이트 안을 향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결심했어.”

“왜우우웅…….”

미음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푸른빛을 내뿜는 이공간의 입구 쪽을 향했다.

“이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길을 찾지 않기를.”

미음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띠었다.

“너는 제법 좋은 집주인이었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도 해 보았으나 의미 없는 일이었구나.”

“미음아…….”

나는 다시 미음이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왜오옭?!”

‘역시 내가 뭘 물어볼 때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한 게 맞았던 거야? 두고 보자.’

……라는 뜻이었다.

다시 돌아올 거잖아. 히터 앞 가장 따끈따끈한 자리도, 채널 결정권도, 내 넷플릭스 아이디도 전부 네 거라고.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러나 미음이는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내 마지막 의무다. 안내하겠다, 왜옭!”

앞발을 들고 벌떡 일어선 미음이가 이공간의 입구를 건드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에이전트: 미음이 확인했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파아앗-

이공간의 입구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기유현과 퀘스트 참가자들이 들어간 그 게이트로 이어지는 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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