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192)

173화

문이 열렸지만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무기……는 어차피 별게 없고. 전에 얻은 ‘본격 커피 제조 카트(★★★☆☆)’가 있으니까 던전 안에서도 커피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또 가져갈 만한 물건이…….

“무슨 이민 준비라도 하느냐, 왜옭!”

미음이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불안하잖아. 어쩌면 이 뿌리는 스프레이 타입 살충제(무향)이 도움 될 곳이…… 없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넣으려던 살충제와 물파스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뀨우우우!”

뒤늦게 나타난 라임이가 몸을 통통 튕겼다. 자기도 함께 가겠다는 뜻 같았다.

“코롱이 옆에 같이 안 있어도 괜찮아?”

이어진 라임이의 대답을 해석해 보니 이런 뜻이었다.

“뀨웃! 뀨우우웃!”

‘인과의 파편을 충분히 섭취한 슬라임은!’

“슬라임은?”

“뀨우우, 뀨!”

‘강하다!’

자신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듯 라임이가 몸을 넓적하게 퍼뜨렸다. 으음, 라임이의 저 방패 기능으로 살아난 적이 있긴 했지.

“뀨우우웃!”

‘21세기형 문이과 통합 슬라임!’

심각한 상황도 잊고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귀엽지만 상당히 미스터리어스한 이 슬라임을 떼어 놓고 가기란 어려울 듯싶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아스, 있잖아.”

“……누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짐작한 듯, 아스가 말을 끊었다. 신비한 보랏빛 눈이 앞에 있었다.

대피소에서 탈출한 뒤, 기유현과 최이찬을 만나고, 어두운 얼굴로 다시 가게로 돌아오는 동안…….

아스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옆을 지킬 뿐. 아스의 그런 행동이 내게는 무척 위안이 되었다.

“나도 같이 가게 해 줘. 아니, 같이 갈게.”

“…….”

반사적으로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대답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작은 키와 외모 때문에 나는 무심결에 아스를 자꾸만 어린애처럼 대했다.

하지만 얘는 열일곱 살,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까 열여덟 살. 아, 아니다. 이건 서류상 나이고 자칭 2000살 이상이었지.

‘거의 까먹고 있던 설정인데…….’

굉장히 걱정되기는 하지만, 사실 심연의 마왕인 아스가 나보다 강할 테다. 퀘스트 참가자인 쌍둥이는 아스의 친구이기도 하다.

내가 뭐라고 말해도 꺾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아스의 눈에 감돌았다. 여전히 작고 귀여운데, 요즘은 부쩍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나의 할일을 하러 가듯, 아스에게는 아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겠지. 단순히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아스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

“……정말?!”

아스가 환하게 웃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뭔데?”

“아까 말한 대로야.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건 네 안전을 제일 먼저 생각해.”

아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여, 함께하마!”

마지막으로 크투가까지 가세하니 상당한 대인원이 되었다.

“그럼 다 되었느냐. 가겠다, 왜오오옹!”

미음이가 앞장서서 벽에 생긴 붉은 문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어, 이공간……?”

붉은 문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이었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의 이공간과 같은 구조였다.

그러나 잘 보니 이공간과는 다르다. 코롱이의 축사나 밭, 로스터 등 다른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 역시 맑고 푸른 하늘이 아니라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또 한가운데의 나무는 세계수 위그드라실과 꼭 닮았지만 커피 열매가 없었다.

“미음아, 저건 뭐야? 여긴 어디고?”

“신경 쓰지 마라. 저건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그림자다, 왜옹!”

“그림자?”

거대한 나무의 옆을 총총 지나며 미음이가 설명을 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이 세계의 근원. 충분히 잘 자라난 세계수는 이 세계를 유지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왜오옭!”

……응?

“그, 커피나무 이야기하는 거 맞지? 설명만 들어선 되게 중요한 거 같은데.”

“캬갸갸옭! 당연하지!”

그렇게 외친 미음이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동안 갑갑했다는 듯, 아주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양이한테 무시당했다…….

축 늘어진 내 어깨를 아스가 가볍게 도닥였다. 역시 아스 너밖에…….

“……몰랐구나.”

“…….”

생각해 보니 이 파티, 나 빼고 다 인외다. 이 파티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상식을 갖춘 인간인 내가 불리한 상황이다.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올렸다.

“그렇게 중요한 걸 커피로 만들어 팔아도 되는 거야?”

비록 시스템이 시켜서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엄청난 양을 볶고 우려서 팔아 치웠는데 말이다.

“괜찮다, 왜오옹!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그래?”

“세계수의 열매는 곧 인과의 파편. 이 세계의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마실수록 세계의 힘이 강해진다.”

“뀨우우웃!”

옆에서 라임이가 맞장구를 쳤다.

“내가 만약 카페 주인이 안 됐으면? 치킨집 주인이나 편의점 주인이 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그때는 상황에 맞춰 세계수의 모습이 변했을 거다, 왜우웅…….”

“흐음…….”

내 선택에 따라서 세계수 위그드라실에서 치킨파우더나 김 가루가 나왔을 수도 있단 이야기인가.

나는 세계관 설명이 나오면 무의식적으로 스킵 버튼을 누르고 싶어지는 타입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커피를 많이 마시면 좋다 이거지. 그러면 다들 얼른 마신을 잠재우고 돌아와서 커피나 마시자고.

“이쪽이다, 왜옭!”

이공간을 둘러싼 숲의 어느 한 곳으로 미음이가 향했다.

[포말하우트의 별빛이 길을 비춥니다.]

새벽녘의 하늘에 밝은 별이 떴다. 별빛이 내리쬐자 숲이 옆으로 갈라지더니 좁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오솔길의 끝에는 다시 게이트. 목적지는 저곳이다. 우리는 미음이의 뒤를 따라 오솔길을 걸었다.

그리고 게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나는 여기까지구나.”

화르르 화염이 타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함께 있던 크투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크투가?”

곧장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일렁거리는 불꽃으로 변해 손을 빠져나갔다.

“왜우웅…….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투가는 자신의 영역이 있는 자. 그러나 이 앞은, 마신 □□□□의 영역.”

“…….”

“크투가는 다른 자의 영역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건 세계의 법칙이니라, 왜옹!”

“뀨우우…….”

크투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함께 온 건 나를 염려해서였겠지.

완전히 소환이 해제되기 전, 마지막으로 크투가가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손녀여!”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꽃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눈앞은 미지의 게이트.

가자. 문이든 미래든 어디든 도달해,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 * *

기유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눈앞에는 걱정이 가득 담긴 갈색 눈동자도,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쓸쓸한 느낌이 든다.

게이트의 너머, 붉은빛에 감싸인 통로였다. 그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막 게이트 안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몸이 붉은빛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래로, 다시 아래로 향할 뿐.

[System Error: Unknown]

[System Error: Unknown]

주위의 정보를 읽어 보려 했지만, 에러 메시지만 깜빡거리고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시스템이 관장하는 범위를 벗어남으로써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물은 없다. 오직 붉은 에테르 입자만이 그들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대던전 《어비스》의 높은 벽으로 가려졌던 심연의 진짜 모습.

기유현은 슬쩍 주변을 보았다.

함께 이동한 퀘스트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채지만 그들의 낯에는 결연한 의지가 머물렀다. 그중 은빛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를 보자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며칠 전, <청라 길드>로 갑자기 최로나가 나타났다. 그녀의 오빠 최세드릭, 그리고 김지나와 함께였다.

한이성이 당황하며 그들을 몰아내려 했다. 어쨌거나 과거 <씨앤엘> 소속인 최세드릭과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

“최세드릭 헌터, 남의 길드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동 스크롤로 개인 공간에 침입하는 건 엄연히 불법이에요.”

“아, 그게 말입니다…….”

당황하는 최세드릭을 진정시키며 최로나가 앞으로 나섰다.

“죄송해요. 급한 상황이어서요.”

“어, 어어?”

한이성이 당황하는 사이, 최로나는 스르륵 공중을 날아 기유현의 앞에 도착했다.

“알고 있죠? 곧 퀘스트가 시작될 거예요.”

“…….”

기유현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살짝 턱짓했다.

“그리고 기유현 헌터는, 이번에도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아니, 실패할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고요.”

“…….”

그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질문을 들은 뒤에야, 답은 처음부터 자신 앞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있다.

기유현은 내심 이번 회차도 마신의 부활을 저지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감이라고 일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제껏 수없이 같은 일을 반복해 온 듯한 근원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을 놓치면 안 돼요.”

최로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세계. 여러 갈래의 미래 중, 오직 이번 회차만이 미래에 도달할 수 있어요.”

“……왜지?”

기유현은 머릿속을 메우는 수많은 의문을 제치고 그렇게만 물었다. 소녀가 생긋 웃는다.

“후후, 사실 알고 있지 않나요? 떠올려 보세요. 당신의 이번 삶을 바꾼 존재가 누구인지.”

한이성은 이 소녀를 정중하게 쫓아내려 시도하다가, 뜻 모를 말에 기유현 쪽을 흘긋 보았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유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포기하지 마세요.”

…….

…….

“으아악!”

비명 소리가 회상을 끊어냈다.

게이트를 넘어 붉게 물든 통로 안으로 끌려가던 중, 지존이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기유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옷깃을 잡아 제자리로 되돌렸다.

“으, 크흑, 감사함다.”

지존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심하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입니다.”

“네, 네넵! 최선을 다하겠슴다.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목숨은 잘 갖고 계시고요.”

“…….”

“집에 돌아가야죠.”

“네, 네넵!”

이윽고 그들은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눈앞을 뒤덮었다.

빛에 잠기며 기유현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서글서글한 눈매, 다정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하여 가슴속을 가득 메우는 감정은…….

이토록 강렬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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