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192)

174화

* * *

나는 꾹 눌러 감았던 눈을 떴다.

게이트 너머는 붉은색 물이 빠르게 흐르는 강이었다. 우리는 물살에 휩쓸려 둥둥 아래로 떠내려가는 중이었다.

“으아아악!”

나는 당황해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머리가 물에 잠기지 않으려 버둥거렸는데, 워낙 물이 깊어서 여의치 않았다.

“뭘 하는 거냐, 왜오옹?”

옆에서 느긋한 포즈로 수영을 하던 미음이가 말했다.

“미음아, 커헉! 이대로면 도착하기 전에 죽을 거 같……. 커헉, 으억, 캘록! 캘록!”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는데 이 고양이는 여유롭게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침착하게 잠수를 해 보거라, 왜오옹.”

“나 수영 잘 못하……. 캘록! 으, 입에 물 들어갔어. 캘록, 캘록!”

“왜오오옹! 그게 아니다!”

미음이가 갑자기 파바밧 수영해서 내게 다가오더니 등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풀쩍 뛰어올라 내 머리를 눌렀다.

퍼억!

“으아아앗!”

“왜오오옹!”

다시 한번 더 퍼억!

“캘록, 캘록……. 고양이가 주인 죽인다, 으, 커헉…….”

그동안 우리 집에서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은 미음이는 제법 무거웠다. 나는 미음이의 가차 없는 꾹꾹이를 견디지 못하고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꼬르륵…….

그리고 놀랐다.

“어, 숨이 쉬어지네……?”

그뿐만 아니라 말소리도 들렸다. 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물속을 유영했다. 물 같으면서도 물과는 다른 독특한 감각이었다.

“뀨우우웃!”

“혼자서 뭘 하는 거야?”

먼저 잠수해서 헤엄치고 있던 라임이와 아스가 핀잔을 주었다. 시선이 따갑다.

“내 참, 일일이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구나, 왜오옭!”

“…….”

뭐지?

어째서 평범한 상식을 갖춘 보통 인간인 내가 여기서 비정상 취급받는 거지?

당신의 상식, 모두의 상식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보통이고 얘네들이 이상한 거 같은데. 완전히 ‘인외 파티의 유일한 정상인이 되었습니다.’의 세계였다.

“물이 있으면 당황하는 게 당연하잖아.”

“왜오옭, 이건 물이 아니라 게이트와 게이트 사이를 연결하는 에테르다. 반대편 게이트로 데려다준다!”

“흐음…….”

미리 말해 주면 덧나?

그런 불평을 삼키고 나는 주위를 살폈다. 물속에 다른 사물은 없다. 그리고 작은 입자들이 반짝거리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입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너무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왜오옹!”

“응? 왜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안은 에테르의 흐름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간, 왜우웅…….”

“……들어섰다간?”

옆에서 아스가 대신 대답했다. 당연한 상식이라는 투였다.

“영원히 길을 잃게 되겠지.”

“뀨우우우!”

라임이의 맞장구까지.

“그렇다, 왜오옹! 길잡이를 놓치면 낯선 던전에 갇혀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된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뭐 이런 위험한 통로가 다 있어.

“뀨우웃!”

일행들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혼자 영원히 길을 잃는 것은 싫다. 나는 황급히 우리 집 식구들의 뒤를 따랐다.

“헉, 잠깐만, 얘들아 같이 가!”

그렇게 얼마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더니 강렬한 빛이 우리를 덮쳤다.

…….

…….

“캘록, 캘록……!”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잔기침을 토해냈다. 갑자기 통로를 빠져나온 통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파바밧!

미음이와 라임이는 빠르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 냈다.

“……제대로 도착했어.”

아스가 차분하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나 역시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텅 빈 공터였다. 뜨문뜨문 유적의 잔해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입을 열었다.

“몬스터……는 없는 거지?”

“당연하다, 왜옹! 이미 도망친 다음이다.”

“뀨우우!”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몬스터들이 바로 그 도망친 몬스터들이라고 했다.

몬스터조차 도망칠 정도의 마신이라……. 분명 강하겠지.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성이 있었다. 고딕풍의 첨탑과 검은 성벽은 척 보기에도 마신이 있을 것처럼 흉흉하게 생겼다. 저곳이 《궁극의 문》이 있는 최종 보스전 장소겠지.

그런데 저 성…….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상하다. 저런 다크 판타지풍 건물을 다른 데서 보았을 리가 없는데. 일하느라 유원지 한 번 못 갔다고.

그러나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한 기시감이었다.

“으음, 으으음, 으으으음…….”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스가 물었다. 아스의 말간 낯을 보는 순간 퍼뜩 정답이 스쳤다.

“그 미니어처……!”

“뭐?”

아스가 가장 처음으로 만든 마왕성 미니어처다. 암흑의 옥좌라는 이름이었던가. 최종 보스가 있는 저 성을 아스는 실로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것이다.

맙소사, 우리 아스, 정말 미니어처 만들기의 천재였구나. 나는 감격에 차 아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말 대단해!”

“뭐, 뭐가?!”

“아스는 천재야! 저렇게 기괴한 건물을 미니어처로 재현하다니 멋져!”

“그, 그…….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해!”

홱!

아스는 내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요즘 부쩍 어른스러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칭찬에는 약하구나.

“뀨우우우?”

“왜오옭! 안 오면 놓고 가겠다!”

최종 보스 스테이지를 앞에 두고 투닥투닥하는 우리를 동물들이 채근했다. 크흠, 이 아이의 천재성에 감탄하다 보니 그만.

나는 호들갑을 멈추고 목적지를 보았다. 암흑의 옥좌라는 이름만큼이나 검은 성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솔직히 무섭다. 그러나 우리가 빠져나온 게이트는 이미 닫혔고, 내가 찾는 사람들은 저 앞에 있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는데도 아직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애써 긴장을 삼키고 말했다.

“출발하자. 미음아, 안내해 줘.”

“왜우웅…….”

미음이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기유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았다.

걱정했다는 말, 몸은 괜찮냐는 말, 함께 무사히 돌아가자는 말부터, 그동안 하지 못한 말까지.

할머니의 수첩을 통해 그의 과거 기억 일부를 엿보았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모든 고통을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다고도.

내가 만든 커피를 마시고 짓는 부드러운 웃음이 좋았다. 언젠가 그가 완벽하게 만족하는 커피를 마시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 ‘본격 커피 제조 카트(★★★☆☆)’를 가져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커피를 만들어 줄 수 있겠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최종 결전. 커피의 버프 효과는 분명 도움이 될 테다.

그리고 얼마쯤 길을 걸었을 때였다.

바스락.

휙! 푹!

“으, 으악!”

앞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발에 아슬아슬하게 빗맞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디뎠으면 화살이 발등을 꿰뚫을 뻔했다.

“누구지? 멈춰라! 그 이상 다가오면 이번에는 머리통을…… 언니?!”

주신희가 황급히 활을 거뒀다.

“누나? 어, 김아스도!”

주신우 역시 저주 말뚝을 치웠고.

“리을아? 네가 왜 여기 있지?”

권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모두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놀라는 반응이었다.

“……리을 씨?”

기유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충격받은 표정이다.

직접 놀란 얼굴의 그들을 마주하자, 방금까지 열심히 생각한 할 말이 새까맣게 날아갔다. 너무 반가우면서도 북받쳤기 때문이다.

“리을 씨, 어떻게 여기에 온 겁니까? 그보다, 괜찮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텅 비었다.

나는 당황 끝에 이렇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여러분…… 커피 마실래요?”

16장. 보스전 앞 마지막 회복 포인트입니다.

“네? 리을 씨, 무슨 말입니까?”

“리을아, 어떻게 된 거지?”

“아, 하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커피 마실래요?’라는 내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나와 아스의 등장에 크게 당황했다. 특히 권지운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얼른 돌아가라며 나를 닦달했다.

그때, 미음이가 앞으로 나섰다.

“왜오오옭, 이미 늦었다. 길잡이의 안내는 편도뿐. 게이트는 닫혔고, 현재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

“…….”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곧 기유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음이에게 물었다.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고 했나?”

“그렇다, 왜웅……. 이곳은 마신의 영역이라 이동 스크롤도 통하지 않는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느니라, 왜옭!”

이번에는 권지운이 내게 물었다.

“너한테도 퀘스트가 떴다고?”

“응. 나는 그 퀘스트 때문에 뒤를 쫓아왔어.”

“내용은?”

내용을 그대로 말해 주면 일이 커질 것 같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어, 그게, 그거야! 마신을 봉인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커피로 버프를 걸어 주는 거.”

“그래, 그런가…….”

납득한 듯 권지운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앞에서 미음이가 화를 냈다.

“왜오오옭! 이 인간들, 내가 말하는데 왜 놀라지 않는 거냐!”

파바밧! 묵직한 앞발 공격이 공중을 날았다.

미음이는 나름 용기를 내어 자신이 사람 말을 한다는 사실을 밝힌 모양이다.

하지만…….

대던전 《어비스》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몬스터가 나타나고, 마신 봉인 퀘스트가 시작되고, 마신이 있는 기괴한 성을 앞에 둔 상황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집 고양이가 말한다는 사실은 엄청 사소하잖아.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아, 그런가.’ 하는 표정이었다. 오늘 점심 메뉴보다도 주목을 끌지 못하는 상황이다.

미음이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꼬리를 펑 터뜨렸다.

“캬갸갸옭! 인간들아, 리액션이 약하다!”

“뀨우우우!”

이렇게 우리 집 동물들은 날뛰기 시작했고.

“언니, 아까 많이 놀라셨죠? 정말 미안해요.”

“응? 아니, 괜찮…….”

“멍청아! 멀리서도 딱 알아봤어야지.”

“이 멍청아! 너도 저주 말뚝 꺼내는 거 다 봤거든!”

내게 화살을 쏜 일을 사과하려다 이렇게 투닥거리기 시작한 쌍둥이 하며.

구석에서 눈만 굴리는 지존과, 아스를 반기는 최로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강현우 헌터 등등…….

겨우 재회를 한 건 좋았지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그리고 같은 파티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 다들 어색해 보였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뭘까?

그래, 바로 커피다.

“그…… 여러분, 커피 마실래요?”

나는 어수선한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던전 안에서 커피를 만들기 위한 ‘본격 커피 제조 카트(★★★☆☆)’는 제법 유용했다.

넓은 작업대에 필요한 도구 일체가 갖춰져 있었고, 가게의 냉장고와 연결되는 미니 냉장고 덕분에 재료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대체 어찌된 구조인지 온수도 잘 나왔다. 이대로 언제 어디서든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차릴 수 있겠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카트가 엄청나게 크다는 이야기다. 양팔을 벌린 넓이보다 길고 높이는 내 키를 넘는다.

“……인벤토리에 그런 게 들어가는군요.”

인벤토리에서 카트를 꺼내 설치하자 기유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남들은 이렇게 큰 물건을 인벤토리에 넣어 다니지 않는 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마치 평생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질문을 들은 것처럼 대답했다.

“그야 용량 제한이 있으니까요.”

그랬나……?

“네. 그러니 중요한 순간에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아이템만 담아 둡니다.”

이건 강현우 헌터의 말.

“…….”

내 인벤토리에 뿌리는 모기약(무향)과 멀미약과 케이블 타이 등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평생 비밀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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