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아무튼.
나는 레시피 리스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스전을 앞두고 있으니, 능력이 강화되거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버프를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음, 그렇다면……. 그래, 이거다.
마음을 정한 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가장 먼저 만든 음료는 최근에 얻은 레시피, 쑥 라테였다. 공격을 3회 반사한다는 효과가 유용할 테니까.
쑥의 독특한 향과 부드러운 크림이 컵 안에서 잘 어우러졌다. 잊지 않고 아스의 컵에는 시럽을 더 많이 넣은 뒤, 한 잔씩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자, 마셔 보세요.”
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쑥 라테를 처음 마시는 사람도 모두 좋아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서인 지존은 쑥 라테를 받지 않고 이런 요청을 했다.
“사장님, 저는 지존 라테로 주십시오!”
“이거 드세요.”
“지존 라테로…….”
“아니요. 이거 드셔야 해요.”
“네…….”
시무룩한 모습을 보니 미안했지만, ‘공격 3회 반사’ 버프를 얻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를 위로할 겸 덧붙였다.
“지존 라테는 다음에 가게에 오셔서 드세요.”
“헉, 제가 그런 곳에 가도 될지…….”
“네? 당연히 되죠. 돌아가면 놀러 오세요.”
“크흑, 사장님……!”
감격한 나머지 지존이 와락 나를 포옹하려 했다. 하지만 기유현과 아스가 잽싸게 내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지존은 바닥을 굴렀다.
“으악, 아야야…….”
꽤 아파 보인다.
다음으로 나는 바닐라 라테를 만들었다. 다 같이 바닥에 앉아 달콤한 바닐라 라테를 마시니 이 어수선한 공간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기한 일이다. 바로 코앞에 마신의 성이 있다. 곧 그곳에 도착해 마신을 봉인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런 큰일을 앞두었는데도, 고작 커피 한 잔에 이토록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나.
곧 다 같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 마음을 채웠다.
“있잖아. 너 그거 진짜 네 머리카락이야?”
“그럼, 진짜지.”
“멋지다!”
쌍둥이와 최로나, 아스는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스는 시종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왜오옹! 놀아 달라!”
“뀨우우!”
미음이와 라임이는 놀아 줄 상대로 강현우를 점찍고 다가갔다.
“더 세게! 왜오옭!”
“뀨우웃!”
“어, 이렇게 말인가?”
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동물들과 놀아 주자, 더 하드코어하고 익스트림한 놀이를 원하는 동물들이 그를 닦달했다.
다소 정신 사납지만 분위기가 좋다. 음, 역시 이게 커피의 효과지.
주변 풍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유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유현 씨,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
뭐지, 방금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는데.
“뭐였더라, 아, 맞아, 머리카락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 그래!”
“뀨, 뀨우웃!”
“어, 어어……. 한 번 더 던져 달라고?”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 다들 하던 대로 커피를 마시며 잡담 중이었다. 그냥 기분 탓이었나?
아무튼.
나는 기유현을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일행들과 멀어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요?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스킬을 썼잖아요.”
“괜찮습니다.”
기유현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니 오히려 수상하게 느껴진다.
“유현 씨 기준으로 괜찮은 게 아니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에서 괜찮은 거 맞아요?”
“저를 믿지 않으시나 보군요.”
“당연하죠.”
“아하하……. 정말이에요. 확인해 볼래요?”
그가 장갑을 벗고 손을 드러냈다. 하얀 손에는 예전에 봤던 기묘한 검은 상처는 남아 있지 않다. 열도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겨우 어깨에 힘이 빠졌다.
“이곳, 게이트 안은 시스템의 영향력이 약합니다. 그래서인지 게이트 안에 들어오고부터 힘이 더 활성화된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후유증도 없어요.”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이걸 물어보려고 불러내신 건가요?”
현재 이 파티의 리더 격 인물은 기유현이다. 만약 몸이 아프더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못했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를 살피고 싶었기는 했다.
하지만 내 용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현 씨, 하고 싶은 말이…… 아니,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네.”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의 곧은 시선을 받으며 나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나를 억누르던 힘 하나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그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말해야 한다.
마신의 성으로 향하기 직전인 지금이야말로 이 말을 할 때였다.
“…….”
그렇게 결심하고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한참 입술만 달싹이자 기유현은 부드럽게 만류했다.
“리을 씨, 하기 어려운 이야기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지금 해야 하는 말이에요.”
“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다정함을 담은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유현 씨, 나도 회귀했어요.”
“……네?”
“유현 씨와 같은 날 죽어서, 똑같이 3년의 시간을 거슬러 왔어요.”
“…….”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시스템이 막아서……. 일부러 감추려던 건 아니었……. 어, 유현 씨?”
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헉, 설마……!
“유현 씨, 괜찮아요?”
당장 기유현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는 한쪽 손을 들어 내 접근을 막았다.
“잠시만……. 미안하지만 잠시만 떨어져 주세요.”
“네? 역시 어디 아픈 거죠?! 보여 봐요!”
“아니요. 제 몸은 아주 멀쩡합니다. 그냥……. 제발 잠시만 혼자 있게 해 주세요.”
귓불과 목덜미가 붉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어……. 쪽팔림……?
영문은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말대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차분함을 되찾은 기유현이 여전히 붉은 기가 남은 얼굴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아뇨, 그건 괜찮은데요…….”
“마신이 기다리는 성이 바로 앞입니다. 이렇게 느긋하게 쉴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겠지요.”
“네, 그렇겠죠……?”
지금도 마신 봉인 퀘스트의 제한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들고 있다. 아직 이틀 이상이 남아 여유는 있지만, 미지의 전투를 앞두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기유현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피했다.
“이런 때에 갑자기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내가 멋대로, 리을 씨가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뿐입니다.”
“다른 이야기요?”
내 회귀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아니, 그……. 이 화제는 넘어가죠. 저를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은 ‘어윈 상’ 수상자로 만들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네에…….”
“그리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습니다. 리을 씨가 회귀자라는 사실.”
“어? 정말요?”
“정확히 말하자면, 회귀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요. 이번 삶에서 일어난 변화의 중심에 리을 씨가 있었으니까, 무슨 비밀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돼.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나요?”
그의 어이없어 하는 반응에, 나는 잠시 지난 일을 회상했다. 기유현을 만나고 나서 함께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을 떠올리자…….
음, 나 되게 수상했네…….
회귀했다고 드러내놓고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회귀 전 일을 기억하는 기유현으로서는 무척 수상했겠구나 싶었다.
내 회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니 조금 맥이 빠졌지만……. 나는 할머니의 수첩을 통해 그의 과거 일부를 엿본 사실도 고백했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하나 멋대로 남의 과거를 읽었으니 사과하고 싶었다.
그동안 회귀 사실을 비밀로 한 것은 시스템이 막아서였지만, 한편으로는 말하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속였다고 화내지는 않을까. 혹은 그가 감추고 싶어 하는 기억을 들켜서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동시에 회귀 사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도 공존했다. 이미 시간의 되감김과 함께 사라진 일이 되었을지언정 내가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안다고 전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요. 리을 씨한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기유현은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괴로움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나는 의아해졌고, 그가 덧붙였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과거는 흔적을 남긴다. 어째서 이 사람은 그렇게 지난 아픔과 선을 그을 수 있는 걸까.
“이미 이번 삶은 바뀌었어요. 봐요, 지금. 리을 씨가 본 환영처럼 괴로워 보이나요?”
“……아니요.”
나는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들을 떠올렸다. 능력치도 성격도 다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무사히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가리란 희망과 서로에 대한 신뢰다.
기유현이 눈을 휘어 웃었다.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이건 리을 씨를 위로하거나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에요.”
“…….”
“리을 씨를 만나서, 많은 것이 바뀌어서, 모두 존재하지 않는 비극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유현 씨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야…….”
그는 뒷말을 삼키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다른 말을 꺼냈다.
“리을 씨,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나중에. 여기서 나간 다음에……. 그때 꼭 말씀드릴게요.”
수줍음과 긴장, 떨림, 그리고 기대를 한데 모아 섞은 듯한 표정이 앞에 있었다. 그의 잘 빚어진 낯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하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이상했다. 그저 그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숨이 막혔다. 계속 그의 눈을 보다가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도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이번에는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아주 부드러운 깃털로 문지른 것처럼 뺨이 간지러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요?’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굉장히 눈치 없는 사람이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대신 나는 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이, 이제 돌아갈까요.”
“……하하, 그럴까요.”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다시 일행들이 있는 쪽을 향했다. 등 뒤에서 천천히 기유현이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신경은 온통 그의 발소리에 쏠린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