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 *
“다들 왜 그래요?”
기유현과 함께 일행들의 곁으로 돌아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하, 뭐가 말이니?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
“오빠, 그거 포션 병인데.”
뭐랄까…….
마치 애써 무관심을 가장했지만 사실은 이쪽에 무척 관심이 많은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회귀 사실이나 기유현의 과거를 전투를 앞둔 지금 밝힐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기유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유현 씨, 아까 한 말은 비밀로…….”
뒤통수에 시선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나는 귓속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
“…….”
일행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쪽을 뚫어져라 보던 거 다 안다.
“저기, 할 말이 있으면 하지 그래요?”
“아니요! 언니, 전혀 안 궁금해요. 그렇지?”
주신희가 다급히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 으읍, 읍! 이거 놔!”
아스는 주신우에게 입을 틀어막혔고.
“둘만의 비밀이라……. 그럼 모르는 척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한쪽 눈을 찡긋하는 지존이며.
“왜오오옭! 걱정 말거라. 고양이도 분위기는 맞출 줄 아니까!”
“뀨우우우!”
우쭐해하는 우리 집 식구들까지.
그때였다.
띠링!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설마 또 무슨 퀘스트가 뜬 건 아니겠지.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놀란다니까. 불안한 마음을 품고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업적: ‘보스전 앞 마지막 회복 포인트입니다’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업적: 보스전 앞 마지막 회복 포인트입니다
훌륭하게 파티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이들의 굳건한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 레시피]
[새로운 레시피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를 획득했습니다.]
“허어…….”
다 같이 커피를 마셨기 때문이 이런 업적이 뜬 건가? 그런데 왜 아까 커피를 마실 때가 아니라 지금에서야 뜬 거지?
뭐, 이 시스템이 늦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 업적 이름을 보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예전에 나는, 세상이 RPG 게임이라면 그저 초보자 마을의 여관 주인 정도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왕성 앞 카페 주인이 되어 버렸다. 회귀하고 각성한 직후 세운 계획과는 딴판.
‘인생 모를 일이구나…….’
뭐, 삶이란 늘 계획과 달라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어쨌든 보상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얻은 건 좋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카페인 중독 때문에 커피로 버프를 주는 건 횟수 제한이 있다. 평소와 달리 신중하게 메뉴를 골라야 하는데, 저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의 버프가 유용할지는 만들어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으음…….”
“그 레시피를 만드는 게 좋을 거다, 왜옭!”
미음이가 갑자기 아는 척 끼어들었다.
“이 커피를 만들라고?”
“캬갸옭! 그렇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 미음이는 이 커피의 효과를 아는 걸까.
그래, 한번 만들어 보자. 만들어 보고 버프 효과가 별로면 그때 생각해도 되니까.
“여러분, 새로운 커피를 마시게 해 드릴게요.”
내 말에 모두가 환호했다.
커피를 만들기에 앞서 냉장고 안의 재료를 확인했다.
콜드 브루 커피는…… 아, 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모두가 한 잔씩 마실 만큼은 되겠다. 생크림과 달고나도 있으니 재료는 다 갖추었다.
먼저 달고나 크림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밀크 피쳐에 생크림과 체로 곱게 거른 달고나 가루를 담았다. 그리고 질감이 되직하도록 휘핑했다. 고운 달고나 가루가 생크림에 녹으면서 황금빛 크림이 완성되었다.
다음으로 커피 잔에 얼음을 채우고 콜드 브루 커피를 부었다. 그리고 달고나 크림을 떠서 조심조심 위에 올렸다. 황금빛 크림이 커피와 층을 이루었다.
마지막 단계는 장식이다. 달고나 가루를 체로 쳐서 살살 뿌려 준 뒤, 작은 달고나 조각을 꽂았다.
됐다, 완성이다.
그럼 과연 무슨 효과가 붙어 있으려나?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커피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어…….”
그런데 이 커피에는 고정된 버프 효과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
상태: 좋음 (남은 시간 : 01:00:00)
효과: 마신 사람에게 알맞은 최적의 버프를 제공합니다.]
최적의 버프라고?
이 설명이 정말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커피였다.
“내 말을 듣길 잘했구나, 왜옹!”
미음이가 뻐기는 투로 말했다.
나는 얼른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를 더 만들어 일행들에게 한 잔씩 건넸다. 모두 커피를 마시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면…… 힐링 스킬을 아무리 써도 괜찮겠군.”
“화살을 더 빠르게 쏠 수 있어요!”
“멍청아! 3중 중첩 저주가 더 대단하거든!”
정말로 각자 다른 버프를 얻었다. 모두들 들뜬 표정으로 자신의 버프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현 씨는 어때요?”
“저는…… 하하, 이 커피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엄청나군요.”
기유현은 이렇듯 애매한 대답만 했다. 뭐, 그는 무척 강하니까, 그만큼 더 강한 버프가 떴겠지.
마지막으로 내 몫의 커피 잔을 손에 들었다.
달고나 크림은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이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진한 콜드 브루 커피는 끝맛이 깔끔해 달고나의 단맛이 질리지 않게 느껴졌다. 오도오독 씹히는 달고나 조각이 씹는 맛을 더했다.
한마디로 아주 맛있다.
“…….”
커피 잔을 다 비운 뒤,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시스템 창을 보았다.
역시 커피 관련 버프가 뜨려나. 아니면 F급의 허접한 신체 능력을 보조하기 위한 능력치 상승?
띠링!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의 버프 효과가 적용됩니다.
효과: 어떤 경우에도 제정신을 유지합니다.]
뭐?
왜 이런 버프가 떴을까.
‘설마 마신이 정신계 공격을 하는 걸까? F급이라 약한 나만 스킬에 당할 위험이 있어서?’
“으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버프가 내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
커피를 다 마시고 채비까지 마쳤을 때쯤 기유현이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사실 이런 말은 체질에 안 맞지만……. 해야 할 때가 오는군요.”
기유현은 일행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진중한 눈빛이 살짝 내게 닿았다가 앞을 향한다.
“그럼 가 볼까요. 마신을 잠재우고 세계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네!”
우리는 앞으로 향했다. 기괴한 검은 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보스전이 곧이었다.
* * *
우리는 드디어 암흑의 옥좌라는 이름의 성에 도착했다.
그곳은 온통 검은 성이었다. 드높은 성벽과 첨탑은 고딕 양식과 비슷했고, 정면의 문 앞에는 머리 세 개 달린 개의 조각이 있었다.
안 움직이는 것 맞겠지? 조각의 실감나는 만듦새에 소름이 돋았다.
“…….”
여전히 다른 몬스터의 기척은 없다. 그런데도 입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안쪽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입구를 지났다.
곧 넓은 홀의 모습이 드러났다.
홀은 어딘가 종교적인 제단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벽에는 기묘한 조각이 가득했고, 정면에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끝은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이다.
‘본 적 있어…….’
할머니의 수첩을 통해 본 환영에도 저런 문이 나왔다. 저것이 그 《궁극의 문》일까.
“저, 저기!”
일행 중 누군가가 손을 들어 계단 위를 가리켰다.
파아앗!
그 순간 일제히 홀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고, 보다 또렷하게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다.
과거의 환영과 현재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궁극의 문》은 한 뼘 정도 열린 상태였다. 문 너머까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희뿌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의 문》 앞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이 성의 이름이기도 한 암흑의 옥좌였다.
그 검고 불길한 옥좌에 마신이 앉아 있었다.
‘이미 부활했다고……?’
과거의 환영과 다르다.
문은 열렸고 마신은 부활했다. 어찌된 일인지 당황하는데, 마신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또각또각.
고요한 홀에 마신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신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우리 앞에 당도했다.
그는 마치 그림자로 빚은 사람 같았다. 몸의 모든 부분이 검어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다. 남김없이 빛을 흡수하는 검정이 시야를 교란했다.
이 기묘한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연한 체하려 했지만 온몸이 떨렸다. 두렵다. 이제껏 상상조차 하지 못한 본능적인 공포에 감각이 뒤엉켰다.
“리을 씨, 괜찮아요.”
옆에서 기유현이 나지막이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겨우 정신이 또렷해졌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다.
마신의 강렬한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다른 일행들 역시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호오. 여기까지 다시 도달하다니. 재미있구나.】
머릿속으로 직접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 음산한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미세한 대미지를 입혔다.
……다시?
【그렇단다. 나는 모든 과거를 기억하거든. 망각은 인간들에게나 허락된 축복이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신이 대답했다.
“어떻게…… 벌써 부활한 거지?”
기유현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역시 이 상황에 의문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 없는 자, 혹은 미쳐 버린 혼돈…….】
【너희는 이온이라고 부르던가.】
【이온이 자신을 제물로 바쳤단다. 나를 깨우기 위해.】
이 마신, 최종 보스면서 혓바닥이 길다.
예상 밖의 상황이었지만, 마신이 이미 부활했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저 마신을 해치우면 되는 거잖아.
“……유현 씨.”
나직한 부름에 기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어붙은 눈으로 마신을 노려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나 긴장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한 의지다.
의지는 전염된다. 파티원들 역시 마음을 다잡고 마신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대형을 이루면서 곧 시작될 전투에 대비했다.
나는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후방에서 대기했다. 내 역할은 이미 끝났다. 크투가를 소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걸림돌일 뿐이다.
“뀨우우웃!”
라임이가 몸을 막처럼 얇게 퍼뜨려서 나와 아스, 미음이를 감쌌다. 제법 든든한 방패였다.
【크크큭……!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후회하게 해 주마!】
마신이 제법 최종 보스다운 말을 외쳤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아주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최종 보스란 결국 끝에 가서 패배하는 법이다.
‘제발……!’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눈앞에 기유현의 곧은 등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굉장히 소중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휙!
그때, 화살이 공중을 날았다. 화살은 똑바로 공간을 가르고 마신의 몸을 꿰뚫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