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이야아압! 10연속 속사!”
타타탓!
주신희가 마신의 등 뒤로 몸을 날리며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크으읏……!】
대미지가 들어갔다. 마신은 곧 제 몸에 꽂힌 화살들을 소멸시켰지만, 잠시 비틀거렸다. 버프 덕분에 평소보다 공격력이 훨씬 강해 보였다.
“3중 저주 영창!”
그 틈에 주신우가 주문을 완성했다. 거대한 말뚝이 마법진의 중앙에 내리꽂혔고, 마신이 비명을 삼키며 괴로워했다.
【인간들이여, 어리석은 짓을……!】
【오라! 가장 깊은 혼돈의 주민들이여!】
마신 역시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신의 손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오더니 소형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저주받은 붉은 박쥐(A)가 나타났습니다.]
[저주받은 붉은 박쥐(A)가 나타났습니다.]
[저주받은 붉은 박쥐(A)가 나타났습니다.]
역시 마신은 마신. 대량으로 소환한 잡몹조차도 A급이었다.
엄청난 수의 박쥐였다. 어찌나 많은지 홀의 천장이 박쥐에 뒤덮여 붉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조심하세요!”
박쥐 떼가 파티원들을 덮쳤다. 그들은 곧장 산개해서 박쥐를 처리했지만 수가 워낙 많아 끝이 없었다.
박쥐 중 몇 마리는 뒤쪽에 물러난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읏!”
하지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쥐 떼는 라임이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모두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헉, 라임아, 괜찮아?!”
“뀨우우!”
통!
박쥐 떼를 튕겨 내며 라임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반투명한 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정말 믿음직한 슬라임이었다.
‟……얼음 폭풍이여!”
최로나가 마도서의 힘을 사용했다. 허공에 반투명한 책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거대한 얼음 폭풍이 휘몰아쳤다.
툭! 투둑!
가차 없는 얼음 폭풍에 순식간에 박쥐들이 얼어붙었다.
【응답하라! 심연의 마검이여!】
마신이 분노에 차 외치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검은 기운이 마신의 손으로 몰려들더니,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부웅!
마신은 곧장 마검을 휘둘렀다. 전열에 있던 강현우와 지존은 미처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쑥 라테의 반사 효과 덕분에 오히려 마신 쪽이 대미지를 입었다.
“이야아아압!”
이번에는 타이밍 좋게 지존이 나섰다.
“으하하, 맞춰 봐라, 이놈아!”
스킬 ‘참 잘했어요’를 발휘하여 시간을 멈춘 지존이 재빨리 공격을 피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공격을 교란한다.
“……치유의 빛!”
마신의 공격에 파티원들의 체력이 깎일 때마다 곧장 권지운이 힐링 스킬을 썼다.
“헉, 허억……. 권지운 헌터, 감사합니다.”
체력을 회복한 강현우가 검을 들고 다시 마신의 앞을 막았다.
【포기하라, 인간이여!】
“으으윽, 누구 맘대로……!”
조금씩 뒤로 밀렸지만 강현우는 잘 버텼다. 권지운은 계속해서 강현우에게 힐링 스킬을 걸어 주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온힘을 다했다. 최적의 버프를 두른 그들은 강했고, 서로 협력해서 마신을 몰아붙였다.
과거와는 다르다. 곧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마신의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지고 약간의 틈이 생긴 순간.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 끝을 내죠.”
파아앗-
공중에 작은 빛의 입자가 나타났다. 입자가 서로 엉키어 실을 잣고, 다시 그물을 만들어 마신의 검은 몸을 붙잡았다. 백광의 권능. 기유현의 스킬이다.
‘됐어. 이거라면……!’
그는 강하다.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강력한 스킬이라면 저 마신을 해치울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애타는 눈으로 기유현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그때,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였다.
“……아스?”
“아니야, 저건…….”
아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아주 두려운 광경을 본 것처럼 눈이 흔들렸다.
“아스? 왜 그래?”
그러나 나는 아스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변이 일어났다.
“어……?”
【크큭……. 크, 크핫, 하하하하하하!】
빛의 그물에 붙잡힌 마신이 광소했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뭐, 뭐야. 허세인가?! 여유 있는 척해도 소용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존이 외쳤다.
여유? 혹은 패배를 앞둔 자의 마지막 발악?
【크흣, 흣 흐하하핫!】
마신은 이목구비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 덩어리였는데도 생생하게 감정이 전해졌다. 저건…… 환희다. 마신은 백광의 그물을 보며 진심으로 환희했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에테르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그물이.】
스르륵-
이윽고 빛의 그물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 그물은 서로 얽히더니 족쇄 모양으로 변했다.
족쇄의 한쪽은 기유현의 몸을 붙잡았고, 다른 한쪽은…… 《궁극의 문》의 너머였다.
마신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때까지 입은 대미지는 온데간데없이 더욱 강해졌다. 마신이 뿜어내는 강력한 힘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유현 씨!”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라임이가 몸으로 나를 막았다.
“멈춰라, 왜옭.”
미음이 역시 나를 만류했다.
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왈칵 불안해졌다.
이상하다. 분명 미래는 바뀌었고,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럴 것이었는데, 왜 이렇게 두렵고 불안한 거지.
눈앞의 광경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털썩!
“……읏.”
짧은 비명을 토해 낸 기유현이 쓰러졌다. 그의 몸을 옭아맨 빛의 그물을 통해 푸르스름한 기운이 빠져나왔다.
저것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푸른 기운은 그대로 《궁극의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길드장님! 정신 차리세요!”
그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아무리 불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끼이익, 탕!
계단 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들렸다.
【아아,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방금까지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던 마신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윽고 검은 연기로 변한 마신이 기유현의 몸을 덮쳤다.
파티원들이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저 검은 연기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사람의 살갗을 태웠다.
“으윽……!”
움찔.
정신을 잃은 기유현의 몸을 검은 연기가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눈과 귀, 입을 통해 연기가 흡수되었다.
모두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깜빡.
소름 끼치는 정적 속에서, 그가 눈을 떴다.
“헉, 유현 씨! 괜찮……!”
나는 애타게 외치며 달려가려다 발을 멈췄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것은…… 탁하고 무감정한 눈동자였다.
* * *
“이게 어찌된……. 기유현 헌터, 정신 차리세요!”
권지운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이 자리의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기유현이 아니다. 원래 기유현의 것이었던 몸을 차지한 마신이었다.
탁한 보랏빛 눈,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해 보이는 피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저런 것이 인간일 리가 없다.
【하핫! 크, 하하하하하핫!】
【드디어……. 이 몸을 손에 넣었구나.】
기묘한 기운에 물든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마신은 입술을 잡아당기며 킬킬 웃었다. 벌어진 입술 틈에서도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고, 그가 웃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마신은 강해졌다.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섬뜩하고 강력한 힘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에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시스템이 절망적인 알림을 띄웠다.
[마신 □□□□의 힘이 강화되었습니다.
소환 예상 시간이 재조정됩니다.]
[마신 □□□□의 게이트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00:10:00]
“……!”
10분? 고작 10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이대로 끝?
이 모든 것이 10분 뒤면 끝나 버린다니,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말도 안 돼…….”
가차 없이 줄어드는 시스템 창의 숫자를 보며 권지운이 탄식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저 절망할 수는 없었다. 나는 라임이 방패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뀨우우…….”
라임이는 끝까지 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자 결국 원래대로 몸을 동그랗게 되돌렸다.
또박또박…….
나는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기유현의 몸을 입은 마신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최대한의 용기를 그러모아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당신 누구야? 유현 씨를 어떻게 한 거지?”
【크큭……. 칙칙한 낯짝이군.】
“대답해!”
【모른다.】
“뭐?”
마신이 한껏 과장된 포즈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특별히 관용을 발휘한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몸의 주인. 그의 영혼은 마침내 완성된 빛의 그물에 붙잡혀 에테르계로 이끌려 갔다.】
【그 이후는 알 바 아니다. 영원히 에테르계를 떠돌거나, 혹은…… 소멸하겠지.】
“……!”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너무 매끄러웠다.
게이트의 발생, 퀘스트, 강하고 뛰어난 헌터들로 이루어진 파티, 파티원들이 전력을 다하면 아슬아슬하게 승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드러낸 마신. 또…….
기유현이 스킬을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이변까지도.
이건 마치…….
나는 섬뜩한 추측을 입 밖으로 꺼냈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어? 유현 씨의 몸을 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