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건…… 기유현에게 너무한 일이니까. 그러나 마신은 환희에 차 눈을 희번덕거리며 긍정했다.
【그렇다.】
“……!”
【원시의 혼돈에서 끓어오르는 무한한 악. 악몽 그 자체. 심연에 있는 신. 나이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져, 그릇 없이는 눈을 뜰 수 없었지.】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신이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유일하게 적합한 그릇이 이 몸이었단다. 다른 인간은 내 본체를 보기만 해도 미치거나 죽어 버렸거든.】
기유현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에 구멍을 내었다. 그 구멍에 거미 여신이 실을 짰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려 그물이 완성되었고, 이온이 그를 내게로 인도하였다.】
나는 환영을 통해 엿본 기유현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고?
기유현의 얼굴을 했으나 너무나도 낯선 존재가 앞에 있었다. 그의 낯 어디에도 내가 아는 그의 흔적은 없다.
가슴을 가득 메우는 이 감정은 허탈함일까.
아니, 슬픔과 분노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이 우스운 싸움에 끝을 내야지.】
마신이 머리 위로 마검을 치켜들었다. 시커먼 기운이 검을 휘감고 연기처럼 타올랐다.
【하하하! 아쉬워할 것 없다. 곧 다른 자들도 따라갈 테니.】
부웅! 검게 빛나는 마검이 우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챙!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강현우였다. 그는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의무를 떠올리고 검을 들어 마신의 공격을 막았다.
“으, 으윽……!”
그러나 마신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한 번은 겨우 막아 냈지만, 이어지는 공격은 쉽지 않았다. 계속된 힘겨루기에 강현우의 검에 금이 갔다.
“이야아압!”
그 틈에 주신희가 화살을 쏘았다. 수많은 화살이 마신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마신은 여유롭게 웃으며 화살을 피했다. 마검에 닿은 화살이 불타 사라진다. 주신희가 다시 화살을 시위에 메기며 애타게 소리쳤다.
“길드장님! 정신 차리세요!”
【윽……. 머리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헉, 길드장님! 정신이…….”
깜짝 놀란 주신우가 마신에게 다가가려 했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안 돼! 신우야, 멈춰!”
“네? 무슨…… 윽! 쿨럭, 쿨럭!”
【크하하하! 우습구나!】
주신우를 공격한 마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연기였다.
마신은 우리를 놀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털썩!
주신우가 분노도 표출하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졌다.
계속 전투가 이어졌지만 마신에게 유효한 대미지를 줄 수는 없었다. 겨우 공격을 피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크읏……!”
“로나야!”
마도서의 힘을 쓰려던 로나가 공격을 맞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지존이 그녀의 몸을 받치고 날아드는 마검을 막았다.
피부가 찌릿찌릿 아팠다. 마신이 뿜어내는 검은 기운 때문이었다.
시스템 창의 시간은 자꾸 줄어갔다. 나는 무력하게 무정한 숫자를 노려보았다.
‘안 돼…….’
【지루하군.】
【‘그릇’의 동료들이라 내 친정(親征)하려 했건만, 그럴 가치조차 없구나. 끝이다.】
마신이 힘을 모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힘이 마신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돼. 이 공격은 정말로 버틸 수 없다.
그 사실을 직감한 모두의 얼굴이 절망으로 흐려졌다.
털썩!
버티지 못하고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고개를 들고 마신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힘든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몸은 미지의 공포 앞에 굴복했다.
……그때였다.
아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운 강력한 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뚜벅뚜벅 마신을 향해 똑바로.
나는 왈칵 불안해졌다. 바닥에서 겨우 상반신만 일으킨 채 아스를 불렀다.
“아, 안 돼……. 아스, 위험해. 가지 마.”
“…….”
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마신이 아스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흠칫 놀라더니 묘한 표정으로 아스를 볼 뿐이었다.
【…….】
“안 돼. 아스, 가지 마…….”
할 수만 있다면 저 아이의 손을 잡아채고 싶다. 너는 네 안전만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좋아하는 사람은 마신에게 몸을 빼았기고 영혼이 길을 잃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애가 앞으로 나섰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회귀씩이나 하고도 무력한 채로.
나는 절망으로 애원했다.
“약속했잖아. 나하고 약속했잖아.”
“…….”
“아스, 안 돼…….”
아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나를 지나친 아스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안 돼. 안 돼, 아스. 제발 가지 마.”
슬로모션을 건 것처럼 주위가 느리게 보였다. 아스는 점점 마신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마신은……. 두려움? 아니, 믿을 수 없는 경이를 목도한 양 눈을 크게 떴다.
아스가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
둥근 뺨, 끝이 살짝 위로 치솟은 눈매, 가냘픈 몸, 그리고…….
생긋. 아스가 웃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눈물이 번진 시야에 아스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아스는 입 모양만으로 내게 말했다.
‘안녕.’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데?
영원 같은 찰나가 흘렀다. 이때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아스가 손을 뻗어 마신에게 닿았다.
치지직.
그 닿은 곳에서부터 노이즈가 발생했다. 마치 성립할 수 없는 접촉이라는 듯이. 노이즈는 점점 커져 마신과 아스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마신 □□□□의 화신체가 회수됩니다.
충격에 유의해 주세요.]
“……!”
모든 사물을 지워 버릴 정도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격을 확인 중입니다. ……완료.]
[적격자: 권리을 확인되었습니다.]
[에테르-위키]
[적격자님이 가꾸어 나가는 차원의 백과사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보 수집률: 100%]
* * *
아스는 가만히 마신을 보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이트를 넘어 온 순간부터 느껴지던 마력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기유현의 몸을 입은 마신 역시 아스의 존재를 의식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마신이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띠링!
[※주의: 모순 발생!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자가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아스는 알림을 흘긋 보고 삭제했다.
그렇다.
저 마신과 자신은 이론적으로 동일한 존재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본체에서 분리된 파편. 차이점이라면 저 마신이 훨씬 완전하고 강하다는 것뿐.
[※주의:
마신 □□□□의 화신체는 동시에 복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순이 발생할 시 불완전한 화신체가 소멸합니다.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아스는 다시 알림을 삭제하고 홀의 중앙, 마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끝없이 경고하는 알림 창을 읽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마신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신의 깊은 곳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
세피로트 가지 사건에서 던전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아스는 마음에 안 드는 그 인간…… 기유현의 영혼에 난 흔적을 발견했다. 영혼이 조각나고 유실되어 온 흔적이었다.
기억이 적지 않게 지워졌을 텐데, 어떻게 저 인간은 멀쩡한 척 웃는 거지? 그런 의문을 느꼈었지.
그 흔적을 본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어렴풋하게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곳에 있는 거야.’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몸이다. 언젠가는 이 몸을 부수고 본체로 돌아가야 했다. 다만 지금의 생활이 즐겁고 재미있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아. 이제 분명히 알겠다.
불완전체인 자신이 아직까지 세상에 남아 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순간,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다. 지금 저 마신을 막을 방법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안 돼. 아스, 가지 마…….”
그러니까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이 우는 얼굴이어서야. 웃는 쪽이 어울리는데.
【…….】
기유현의 몸을 입은 마신이 아스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개별적인 화신체는 불안정한 상태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이자 자신이 아닌 자. 다른 화신체를 보고 존재에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더 이상 접근할 시 개별 화신체의 경계선이 붕괴할 수 있습니다.]
아스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동일한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마신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부드럽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도, 슬픔에 일그러진 붉은 입술도.
아스는 <카페 리을>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했다.
사소한 일로 투덜거리다가, 또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웃음을 터뜨리던 리을의 모습.
자신 앞에서는 어른인 체 굴며 어린애 취급을 하던 모습. 때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용기 있던 모습까지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마시는 커피의 달콤함.
옆에 와서 귀찮게 구는 동물들, 처음으로 사귄 친구.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죽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독립된 자아는 사라질지언정 본체인 혼돈으로 돌아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결국 나오는 말이라고는 이것뿐이다. 아스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바람결에 흐트러졌다.
‘안녕.’
[대상과 접촉에 주의해 주세요.]
치지직, 치직-
노이즈가 발생했다. 노이즈는 점점 커져 곧 아스의 몸 전체를 뒤엎었다.
[Warning! Warining! Warining!
모순 발생!]
[분리된 자신과 조우했습니다. 개별 개체의 경계선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마력 고갈!
불완전체가 소멸합니다. 존재의 재구성이 진행됩니다.]
[원시의 혼돈이 화신체를 회수합니다.]
[문이 열립니다.]
…….
…….
[《궁극의 문》이 열렸습니다.]
[열쇠 보유자: 권리을(F)이 문의 너머로 입장합니다.]
[인과율을 재부팅합니다.]
[시스템 재가동에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Now Loading…….]
빛이 터져 나왔다.
아스는 빛 속에 파묻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