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스가 나를 위해 희생했고, 그 때문에…….
그 때문에, 아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소름끼치도록 분명히 알았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함께 온 거였어?
가슴에 슬픔이 사무쳤다. 아스를 원망하고 싶지만, 원망을 들을 당사자는 곁에 없다.
미래가 바뀌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은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기유현도 아스도 구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걸까.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고, 의식이 몽롱해졌다가 차츰차츰 또렷해졌다.
나는 눈물에 젖은 눈을 떴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이라도 무사히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
그런데 주위는 낯선 공간이었다.
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일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그 거대한 문 너머? 아스가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걸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빠! 신희야! 권미음, 어딨어!”
소리 내어 불러 보았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다. 나 혼자 여기로 들어온 모양이다.
여기는 어디고, 어떻게 나가야 할까.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우리 집 이공간에 있는 커피나무와 무척 비슷하지만 훨씬 더 거대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긴 가지를 머리 위로 드리웠다.
사방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로 빚은 듯했다. 천장도 바닥도 없는 공중에 혼자 남아 있으니,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다.
아름답다.
동시에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듯한 막막함이 느껴졌다.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은 듯한 고독이었다.
‘저건 뭘까.’
나뭇가지의 끝에 자그마한 별빛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어 그 별빛을 만져 보았다. 곧 어떤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고액 루비 환전 시 세금 최대 30% 환급받는 방법》
분류: 헌터를 위한 합법적으로 세금 아끼는 100가지 방법
헌터 A씨는 던전 파밍으로 얻은 소득 2000루비를 환전하려 한다. 이 경우 원천 징수 되는 세금은…… [더 보기]
……잉?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별빛을 만졌을 때 뜨는 정보치고는 상당히 세속적이다. 어째서 이런 게 뜬 걸까.
나는 다른 별빛도 만져 보았다.
[동굴흑곰에게 들키지 않고 던전 클리어하기]
[장비 아이템 제작 입문 ~방어구편~]
[최초의 균열 기록]
등등…….
과거에 있었던 일부터 낯선 신화 생물의 생태, 잡다한 생활 정보까지. 신비한 별빛을 만질 때마다 일관성 없는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거 꼭 그거 같은데.
그거 있잖아. 이제까지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던 사전. 이름이…….
그래, 에테르-위키다.
하지만 왜 이 자그마한 별빛들에 정보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적격자여.】
【겨우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되는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던 공간에 희뿌연 빛이 비쳤다.
수많은 별빛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하늘하늘하게 몸을 감싼 드레스는 판타지풍 RPG를 연상시킨다.
바로 성녀다.
【후후, 오랜만이에요.】
성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이제껏 몇 번이나 위기의 순간에 성녀와 만났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일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전보다 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단순한 환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은은한 빛으로 감싸인 하얀 몸의 뒤에는 진줏빛 거품이 흘렀다. 거품을 쳐다보기만 해도 감각이 교란되는 것 같다. 어쩌면 저 거품이 그녀의 본체일까.
【역시 감이 좋군요.】
【드디어 환영이 아니라 실체로서 당신을 만났어요.】
“설마……. 나 또 죽은 거야?”
회귀 전, 나는 죽은 뒤에 낯선 공간에서 성녀와 만났다. 그리고 성녀가 나를 회귀시켰지.
또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 걸까.
……그건 싫다.
나는 회귀 후 두 번째 삶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시간, 그 추억들. 다시 시간이 되감기고 없던 일이 된다고 생각하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엄습했다.
다행히 성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물음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럼 여기는 어디야? 나는 어떻게 된 거고?”
【이곳은 세계의 기억을 보관하는 도서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정보가 모이는 장소.】
【모든 지식의 보고.】
【인간 중에서는 유일하게 당신만이 이곳에 접속할 권한이 있습니다.】
신비한 공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단함이었다. 모든 지식이라니 범위가 어마어마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성녀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신에게는 에테르-위키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겠군요.】
“……뭐?”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던 그 에테르-위키 말하는 거 맞아? 에테르-위키가 그렇게 대단한 거였다고?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녀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당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어요.】
【지식이란 결코 좋기만 한 것이 아니랍니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은 정신을 붕괴시킬 뿐이니까요.】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네, 당신에게 방어 효과가 적용되었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시야의 구석에서 깜빡거리는 시스템 알림을 다시 보았다.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의 버프 효과가 적용됩니다.
효과: 어떤 경우에도 제정신을 유지합니다.]
이 버프가 이곳에 들어와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었어?
시스템이 부여한 최적의 버프가 우연히 이 상황에 맞아떨어졌다기에는 지나치게 공교롭다.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계획된 일인 걸까.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성녀가 나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는 잠시 안타까워하는 빛이 감돌았다.
【당신이 인과율을 모아 더 많은 지식을 열람하리라 기대했는데.】
【하지만 별로 관심이 없더군요.】
어…… 미안.
그렇게 중요한 건 줄 몰랐지…….
* * *
밤하늘을 닮은 광활한 허공에 별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나는 손으로 다시 별빛들을 건드려 보았다. 사소한 것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한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어떤 별빛은 한 사람의 인생 전부가 담겨 있어서,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기도 했다.
세계의 기억이라.
그러면 이 안에 내가 아는 사람의 기억도 있을까.
가만히 나를 보던 성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의 정보를 읽어도 무사한 건.】
【오직 커피의 힘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그래?”
【열쇠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궁극의 문》을 넘을 수는 없어요.】
【당신의 영혼이 충분히 성장해야 했어요.】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당신은 강해지고 성숙해졌어요.】
【그리고 문을 열기 위한 마지막 단계가 그 아이와의 관계였어요.】
나는 흠칫 놀라 성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설마, 방금 말한 ‘그 아이’라는 건…….
【그 아이는 마신 □□□□의 불완전한 화신체. 원래는 소멸되어야 했으나 예상 밖의 사건으로 아직까지 살아남았죠.】
“……뭐라고?”
【그러나 당신이 무사히 이곳에 도달했으니, 그 아이도 사명을 다한 셈이군요.】
성녀는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초월자의 눈은 까마득히 먼 곳을 보는 듯했다.
나는 왈칵 거부감을 느꼈다.
어쩐지 방금 그 말은…….
아스가 죽었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나중에 알게 된 사건 전말에 따르면, 용산 사건에서 아스를 죽이려고 한 배후는 이온이다.
예상치 못한 일로 아스가 도망치고 우리 가게 앞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스는 그대로 힘을 빨리고 죽었을 거다.
그런데 성녀는 아스가 살아난 일이 예상 밖의 사고라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마치 이온이 아스를 죽였어야 한다는 것처럼.
나는 회귀 후 지금까지 겪은 여러 일을 떠올렸다. 그중 얼마만큼이 이자의 안배였을까. 모두 나를 여기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성녀를 보았다. 그녀가 낯설었다.
애초에 그녀는 누굴까.
“…….”
【후후, 의문이 많은 얼굴이군요.】
【괜찮아요. 시간은 많으니 당신의 의문에 모두 답해드리죠.】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신도 전부 이해하게 될 테니까.】
성녀가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커다란 소파가 생겨났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으니, 그녀는 먼저 맞은편 소파에 앉고는 얼른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다른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던 그 사람들은 괜찮은 거야?”
【무사하답니다. 봐요.】
성녀는 다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나타났다.
“……!”
텔레비전에는 가장 먼저 바닥에 쓰러진 기유현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몸을 삼킨 마신은 잠이 든 걸까. 그는 의식을 잃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쨌건 현재는 무사한 것 같다.
[마신 □□□□의 게이트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00:04:15]
시스템 창의 남은 시간은 4분 15초에서 멈춘 상태였다. 잠시 살펴보았는데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퀘스트는 어떻게 됐지?”
【그 아이가 일시적으로 마신을 막았어요.】
【화신체가 소멸하며 생긴 영향으로, 시스템을 재부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거든요.】
【당신이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깊은 서글픔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럼 이제 말씀드리죠.】
“길게 떠들지 말고, 결론부터 말해 줘.”
【당신은 유일한 열쇠로서, 이곳 전지(全知)의 도서관에 도착했고.】
【세계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뭐?”
눈앞의 성녀가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