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192)

180화

* * *

섬광이 잦아든 마신의 홀.

권지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강력한 빛의 여파로 눈이 시큰거렸다.

몸이 가볍다. 조금 전까지 전신을 꽉 짓누르던 마신의 영향력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다들 괜찮습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강현우가 파티원들을 살폈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도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헉, 길드장님……!”

쌍둥이가 홀 중앙에 쓰러진 기유현의 몸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마신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쌍둥이가 아무리 애타게 부르고 몸을 흔들어도 기유현은 깨어나지 않았다.

권지운이 곧장 힐링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치유의 빛은 공중을 떠돌다가 몸에 흡수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건…… 몸에 영혼이 담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대로는 힐링 스킬을 써도 효과가 없어요.”

“마신은 몸속에서 잠든 것 같아요.”

기유현의 몸을 살핀 최로나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주신희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구도 섬광이 터져 나온 순간에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과율을 재부팅합니다.]

[시스템 재가동에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Now Loading…….]

시스템 창은 이 메시지를 끝으로 완전히 멈췄다. 퀘스트 창은 물론이고, 다른 정보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인과율을 재부팅한다니? 짧지 않은 헌터 생활 동안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

그때, 권지운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창백하게 질렸다.

사람이 모자라다. 섬광이 터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그의 여동생, 권리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권리을의 동행이었던 작은 소년까지도.

“리을아! 권리을! 어디 있어!”

파티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기색이다. 모든 것이 멈춘 홀에서 권리을과 아스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권지운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아주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상황을 알아낼 방도가…….

그래. 섬광이 터진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문이.

권지운은 홀 중앙의 계단을 허겁지겁 올랐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쾅 하고 두드렸다.

“리을아! 안에 있으면 대답해!”

쾅!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저 굳건하게 서서 권지운의 앞을 가로막는다.

“큭…….”

무기가 있으면 문을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권지운이 다른 파티원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소용없다. 그만두거라, 왜오옹.”

삼색 털을 한 통통한 고양이가 홀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기색이다. 권지운은 미음이의 앞으로 달려와 세차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을이는?!”

“왜오옭……. 고양이를 윽박지르다니 너무하구나.”

“대답해!”

왜우웅. 미음이는 한 번 더 길게 운 다음 말했다.

“저 문은 열리지 않는다. 오직 자격 있는 자가 조건을 갖추었을 때만 열 수 있느니라.”

“그 사람이 리을이라고?”

“그렇다, 왜오옹!”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 리을이를 돌아오게 하려면? 마신은 어떻게 된 거고?”

미음이는 질문을 쏟아 내는 권지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뭐라고?”

“앞으로의 일은 문에 도달한 자, 권리을의 선택에 달렸다.”

“…….”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나도 모른다.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거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왜오옭!”

휙, 미음이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더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할 의무는 없다는 양 바닥에 앉았다.

미음이는 굳게 닫힌 《궁극의 문》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재구성인가, 혹은 유지인가.

그녀가 어떤 답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녀라면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릴 듯도 하다.

‘이제 내 역할도 끝이구나. 왜오옹…….’

시스템이 부여한 자신의 사명은 권리을을 《궁극의 문》으로 인도하는 것.

이제 사명은 끝났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지.

‟왜우웅…….”

언제고 이 날이 올 줄 알았다. 알고 있었는데도,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미음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문 너머에 있다.

그동안은 즐거웠는데, 쓸쓸해지겠구나.

“뀨우우?”

이상한 기색을 느낀 것일까. 옆에서 붉은 슬라임이 말을 걸었다. 이별은 언제 겪어도 슬픈 법이다. 미음이는 라임이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냥 눈을 감았다.

* * *

“저기, 잠깐, 잠깐만.”

뭐? 재구성?

아무리 내가 결론만 말하라고 했다지만 스토리 진행이 너무 급하다.

왜 갑자기 세계를 재구성한담? 무슨 리셋 증후군이야? 캐릭터 키우다가 망하면 무조건 삭제하고 새로 키우는 타입?

【왜 그러죠?】

“미안한데 처음부터 천천히,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줄래?”

【말 그대로예요.】

【이 세계를 리셋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랍니다.】

“…….”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이제까지 불쑥 나타나서는 의미심장한 소리만 늘어놓더라니. 성녀는 남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마음은 슬프고 초조하다.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찾고 싶다. 그러나 당장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이상 성녀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왜 세계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이대로는 세계가 멸망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세 살짜리처럼 다시 물었다.

“왜 세계가 멸망하는데?”

【아. 제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나요?】

두통이 심해졌다. 거대한 세계수의 가지 아래 별빛이 반짝거리는 신비로운 공간. 이 지끈거리는 두통만이 현실감이 엄청났다.

【이 세계의 시간은 끝없이 반복된답니다.】

“뭐……?”

또다시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곳으로 튀었다.

【시간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아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정해진 법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나는 시간축을 감아 하나의 고리를 만들었어요. 시작과 끝이 이어져 닫힌 고리. 우리는 무한나선이라고 부른답니다.】

“…….”

【그로 인해 우리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고, 벌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반복했어요.】

“왜 그런 일을 했는데?”

【후후, 정말로 긴 이야기가 되겠군요.】

이어진 성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까마득히 먼 옛날, 이 세계가 미래를 잃어버리기 전 최초의 시간선.

이온은 마신 □□□□를 부활시켜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다. 이유는, 자신의 권능을 제한하는 세계의 인과율에 저항하기 위해.

성녀는 이온을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동급의 신격에게 간섭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신이 깨어나 세계가 멸망할 운명.

【내가 나름대로 이 세계를 사랑해서 그런 선택을 했음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성녀는 마신이 깨어나기 직전에 시간을 감아 영원히 반복하는 고리를 만들었다. 세계는 ‘마신이 깨어나 멸망한’ 미래에 도달하지 않고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반복되는 루프 속에서 성녀는 멸망을 피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시스템, 각성자, 퀘스트 등……. 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 대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계속.

……계속.

【그리고 당신이 나타났어요. 열쇠의 힘을 지닌 자.】

【엄밀히 말하면 처음 세계를 재구성할 힘을 지닌 이는 그대의 할머니였어요. 그러나 알다시피 그녀는 당신을 살렸죠.】

성녀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당신의 의사를 존중할 것. 결코 강제하지 않을 것.】

【당신이 새로운 적격자가 되는 대가로 그녀가 내건 제약이었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났다.

성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 선언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군요. 자, 루프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죠.】

【당신은 어떤 세계를 원하나요? 열쇠를 지닌 이여,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상하는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답니다.】

【각자 다른 타입의 일곱 미남을 거느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성녀는 역하렘 취향이었구나…….

“엑, 그런 건 별로……. 상상력이 좀 쩨쩨하지 않아?”

【어머, 멋진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소중한 사람이 살아 있는 세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요.】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안에 떠오른 답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했다. 나는 성녀를 똑바로 보고 그 답을 말했다.

“싫어.”

【네?】

성녀는 진짜로 당황한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죠? 이대로라면 멸망뿐이라니까요? 마신이 깨어나서 이 세계가 끝을 맞이하길 바라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싶어.”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어요. 세계의 재창조. 신인 나조차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라고요.】

“그래도 상관없어.”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요. 모르겠다면 보여 드리죠.】

성녀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서 생겨난 무지갯빛 구슬이 점점 커지더니 나를 감쌌다.

파아앗-

그 안에는 무척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다.

부모님과 나는 최초의 균열에 휘말렸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큰아버지는 실종되지 않고 길드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헐, 대박. 권지운, 이제 힐러 됐다고 은발로 염색했어. 그런다고 눈에 띌 줄 알고……. 아얏! 아프잖아!”

이런 시답잖은 소리나 늘어놓다가 나는 권지운에게 등짝을 맞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자리에서 카페를 오픈했다. 번화한 거리는 아닌 한적한 주택가였다. 거대한 던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 경영은 처음에 무척 힘들었다.

이 세계의 나는 그야말로 F급 카페 주인 정도의 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드는 커피는 약간 체력이 회복될 뿐이라 포션이나 힐러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꾸준히 카페를 열자 조금씩 단골이 생겼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할머니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리을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된단다.”

“……어?”

“그러면 계속 여기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답은 변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할머니랑 같이 사는 게 싫어?”

“그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는 거듭 사과하며 고개를 세차게 옆으로 저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의 재구성이 걸린 선택에서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내렸다. 이 답을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눈물에 흐려졌다.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셨다.

툭. 부드러운 손길이 마지막으로 이마에 닿았고.

파아앗-

아름다운 세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깜빡, 눈을 떴다. 사나운 표정의 성녀가 꼿꼿이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까지 나를 도와줘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뜬금없는 내 말에 성녀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럴 때의 그녀는 꽤 인간적으로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한들 네 도움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얻었고, 위기를 넘어 이곳에 도달했으니까.”

【……그리고요?】

“그런데 너는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사실을 전부 말해 주지는 않더라고.”

나는 성녀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끄집어냈다.

“재구성한 세계에 유현 씨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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