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유현 씨는 지금 어디에 있지? 왜 유현 씨의 영혼을 문 안쪽으로 끌어들인 거야?”
빛의 그물이 빚은 족쇄는 《궁극의 문》 안쪽으로 이어졌다. 그의 영혼은 이 까마득한 공간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그런데 성녀는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테다.
성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자는…….】
【같은 시간대를 무한히 반복하는 세계가 지른 비명. 이 세계의 특이점이에요.】
【그래서 마신을 담는 그릇이 되었죠.】
【재구성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예상대로였다. 나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러면 세계를 리셋하지 않을 테니 유현 씨를 돌려줘.”
【그건 불가능해요.】
“뭐? 그건 무슨 소리야?”
【…….】
성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 말해 줘.”
【…….】
거듭 재촉한 뒤에야 성녀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초월자의 눈에 슬픔이 어린다.
【세계의 시간을 되감는 데에는 막대한 힘이 소모됩니다.】
【커다란 힘을 쓰기 위해서는 동급의 대가를 바쳐야 해요.】
섬뜩한 예감이 엄습했다. 단순한 감이라기에는 너무도 명징하여,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경고 같았다.
아. 이자는 지금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려고 해. 알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평행 우주의 소멸.】
【한 번의 루프 때마다 파생하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어떤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슈퍼 버프 커피> 사건에서 나타났던 괴물 나뭇가지, 아니, 다른 세계의 세계수.
그 나무의 이름이 뭐였더라.
“‘거짓된 세계의’ 세피로트 가지…….”
【그래요.】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벌인 마지막 발악이었죠.】
그리고…….
“‘이 세계는 다중 우주론이 아니다.’라고도 했지.”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백은 길드>에서 권지운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성녀가 한 말이다.
이제 알겠다. 그 말은, 파생하는 세계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구나.
【그러나 이제 세계는 한계에 다다랐어요.】
【대속(代贖)할 모든 세계를 잃었으니 더 이상은 시간을 감을 수 없어요.】
【그, 기유현의 영혼은……. 세계를 재구성하기 위한 대가입니다.】
“……!”
거기까지 듣고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을 정한 이상 더 이상 그녀와 할 말은 없다. 이 한없이 넓은 공간 어딘가에 있을 기유현의 영혼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성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기회는 이번뿐이에요. 나는…… 이 기회를 정말 오랫동안, 당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기다려왔어요.】
【한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버리는 건가요?】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도서관에 들어와서 수많은 별빛에 닿았기 때문일까. 예리해진 감각으로 보통 때라면 알 수 없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계의 기억을 보관하는 도서관이라.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긴 한데.
아무리 훌륭한 도서관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진짜 세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지식은 어디까지나 지식일 따름.
‘도서관에서 토목이 가능하면 문과의 위상이 더 높았겠지…….’
정확히 말하면, 세계의 재구성이란…….
세계를 복제하여 이 안에 가두는 거다. 거칠게 표현하면 가짜. 정교한 거짓.
인간의 지각으로는 차이를 느낄 수 없을 테고, 어쩌면 그 안에서 나는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오서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기억은 과거를 증명한다. 오늘의 내가 어제와 같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은 어제의 기억이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재구성한 세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아무도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제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라도, 세계의 리셋은 죽음과 다름없다.
할머니가 살려 주신 건 이 세계의, 지금의 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엉망진창이라도, 완벽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
“그러니까, 유현 씨를 찾겠어.”
【멈추세요. 이 안은 무한히 넓어요. 인간의 몸으로 잘못 발을 들였다간 돌아오지 못하게 될걸요.】
“……괜찮아.”
【……!】
성녀는 나를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앞을 막지는 않았다. 마치 제약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내 의사를 존중할 것. 결코 강제하지 않을 것. 할머니가 내건 조건이었다고 했지.
지금의 이 선택까지 알고 그런 조건을 거신 걸까. 알 수 없지만…….
‘죄송해요. 하지만 이 답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죄송해요.’
타다닷, 탁!
나는 몇 걸음을 달린 뒤 별빛이 가득한 무한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어둠에 몸이 삼켜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성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무지갯빛의 부글거리는 거품이었다.
그 거품에서는 인간의 인지를 초월하는 공포가 느껴졌다. 그리고 초월자의 고독, 슬픔…….
이제 그녀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는 무지갯빛 거품에게서 눈을 돌렸다.
* * *
나는 눈을 떴다.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우주. 세계의 기억을 간직한 찬란한 별빛의 강이 나를 에워쌌다.
“후우…….”
성녀 앞에서는 멋지게 지금의 세계에서 살아가겠다니 어쩌니 떠들어 댔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마신은 기유현의 몸에서 잠시 잠이 들었고, 퀘스트는 일시 보류 상태.
이대로라면 마신이 깨어나고 4분 15초 뒤 세계가 멸망한다.
기유현의 영혼을 제물로 세계를 재구성해서 이 안에 가둔다라. 성녀가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운 이유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멸망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하고 실패한 끝에 다다른 결론이었겠지.
지금의 세계에서 있는 그대로 살아가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 세계가 멸망해서야 소용이 없다.
가만, 나 너무 폼을 잡았나?
성녀 앞에서 멋지게 떠들어 댄 말을 떠올리자 민망함에 뺨이 홧홧했다.
괜찮아. 아무도 들은 사람 없어.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멋진 대사를 할 수도 있지, 음.
아무튼…….
나도 아무 대책 없이 무작정 세계를 리셋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이 안에 들어온 때부터 시스템에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커피 한 잔의 인연.’
[커피 한 잔의 인연(B)
상세: (Lv.1) 궁극의 커피를 마신 상대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다. (00:05:00)
쿨 타임: 24:00:00
사용 가능 대상: 기유현, 최이찬, 김태운, 지존]
사용 가능 대상에 기유현이 추가되었다.
예전에 나는 기유현의 커피 만족도를 100%까지 채우고 싶었다. 오기 반, 호기심 반이었다. 그러나 어떤 커피를 마시게 해도 그의 만족도는 98% 언저리에서 멈춰 실패했었지.
이제 알겠다.
애초부터 기유현의 영혼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100%를 채울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 이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건…….
나는 이미 기유현에게 궁극의 커피를 마시게 했다는 뜻. 그리고 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그의 완전한 영혼이 있다는 뜻이다.
[대상: ‘기유현’을 선택합니다.]
[백광의 권능(S)
상세: (Lv.max) 빛의 그물을 소환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스킬을 선택했다.
[※ 주의: 사용자의 신체에는 지나치게 강한 스킬입니다.]
>[과도한 사용은 사용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사용 가능 횟수를 계산합니다. ……완료.]
[단 한 번,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응, 사용할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파아앗-
촘촘한 빛의 그물이 나타났다. 빛의 그물은 한없이 넓은 공간의 끝까지 뻗어 나가며 세계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읏…….”
수많은 기억들이 데이터가 되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 스킬을 쓸 때마다 그는 이런 감각을 느낀 걸까.
정보량이 어마어마했다. ‘어떤 경우에도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커피의 버프가 아니었다면 머리가 터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커피 한 잔의 버프만으로 이런 엄청난 효과가 있다니 신기하다.
세계수의 열매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돕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찾았다.”
빛의 그물을 통해 읽어 들인 기억 중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이 있었다. 그가 분명했다. 이토록 강렬한 그리움이 그가 아닐 리가 없다.
나는 그 기억의 파편을 향해 걸어갔다.
수없이 많은 세계의 기억이 은하수처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세계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시간이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별빛 속을 헤매지 않고 나아가, 그중 단 하나, 원하는 이를 찾아냈다.
탁!
자그마한 어깨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안녕. 우리 만난 적 있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기유현을 2/3 크기로 줄인 듯한 자그마한 소년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았다.
나는 예전에 이 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 크투가의 정원에서 돌아오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나를 도와줬었지.
소년은 정말로 어린 기유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그리고 나를 잘 모르는 듯했다.
“너는…… 유현 씨와 같은 존재야?”
“음. 엄밀히 말하면 아니에요.”
소년이 생긋 웃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 최초로 그에게서 분리된 영혼의 파편이에요. 여러 곳을 떠돌며 그 사람의 궤적을 지켜보았죠. ……실패의 궤적을요.”
“…….”
“그러니 나는 그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소년은 슬픈 표정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요.”
“아하하……. 아니야. 나는 너를 찾고 있었어. 너를 유현 씨에게 데려가기 위해.”
“그 사람은 이곳에 있어요. 하지만 잠들어 있어서 불러도 답이 없어요.”
“안내해 줄 수 있어?”
“좋아요.”
소년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눈앞에 좁고 긴 길이 나타났다. 나는 소년의 안내를 따라 이 막막한 공간 속을 나아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왜 나였을까?”
계속 느끼던 의문이다. 어쩐지 이 소년한테는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어린 시절의 기유현을 닮았지만 분리된 존재라서일까.
“스테이터스는 F급이고. 그렇게…… 세계를 리셋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소년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아, 그래. 그렇구나…….”
“내 말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 정해진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냥, 그렇게 되는 거죠.”
“…….”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운명이기도 해요.”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윽……!”
찬란한 별빛이 이리저리 휘몰아친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소년의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이곳을 떠돌며 계속 기다렸어요.”
‟…….”
“당신의 운명이 그 사람에게 닿는 순간을.”
…….
…….
다시 눈을 뜨자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주위를 밝히던 별빛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사방은 오직 어둠.
그때 바람이 살랑 등을 밀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듯이.
마지막으로 들린 말은 이러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그 아이는 잠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뿐.”
“…….”
“하지만 곧…….”
곧 바람조차도 멎었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한참을 걸었다. 사방은 어둠이라 정확히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앞에 그가 있으리라는 믿음과, 오직 그가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로 그가 보고 싶었다.
그저 걷고 또 걷다가 도달한 끝에.
그, 기유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