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유현 씨! 괜찮아요?”
나는 얼른 다가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라 아무리 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은 굳게 닫힌 채다.
어떡한다. 보통 이런 때는 입맞춤으로 깨우는 게 클리셰던데.
“역시 그건 말이 안 되겠지…….”
이렇게 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으로 그의 하얀 뺨을 감쌌다. 하지만 실천할 용기는 없어서 망설이는 그때.
파지직, 파직-
기유현에게 닿은 손끝에서부터 노이즈가 발생했다. 노이즈는 곧 시야 전체를 뒤덮었고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이점에 접촉했습니다.]
[에테르-위키 버추얼 모드에 진입합니다.]
응? 그런 거도 있었어?
‟……아.”
허공에 네모난 텔레비전이 나타났다. 할머니의 가게에서 내가 처음 각성했을 때 발견한 것과 똑같이 생겼다.
파앗!
갑자기 텔레비전 화면이 켜지더니 여러 숫자가 나타났다. 규칙성 없이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다가 사라지고, 다시 메시지가 떴다.
[특이점 : 기유현의 영혼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손상된 영혼이 복구됩니다.]
[이번 회차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에러 발생!
알 수 없는 에러 때문에 시스템이 예정된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선을 되감을 수 없습니다.
가능성 높은 원인 : 권리을(F)]
[해결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완료.]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진행 시간선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계속 진행할 시, 루프를 벗어나 미지의 시간선에 도달하게 됩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응.”
파아앗-
한순간에 노이즈가 사라졌다. 텔레비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깜빡.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기유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앗! 유현 씨, 정신이 들어요?!”
나는 그의 검은 눈에 빛이 돌아오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반짝거리는 검은 눈이 나를 향하더니.
띠링!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별빛을 따라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 * *
어둠 속으로 몸이 가라앉았다. 끝없이, 끝없이.
기유현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실패한 건가.
마신의 홀로 향하기 직전, 권리을의 커피를 마셨을 때였다. 달콤한 커피의 맛과 함께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까마득히 먼 과거의 기억들이었다. 기억 속의 자신은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뭐,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긴 시간을 반복하는 동안 지쳤다. 이제 쉬고 싶다.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의식이 녹아내리기를 기다렸다. 곧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잠이 들겠지.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의식은 명징하기만 하다. 기유현이 의아함을 느끼는 바로 그때.
“……?”
서늘한 감각이 뺨에 닿았다. 간지럽히듯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이 자꾸만 잠을 방해했다.
기유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은 막막한 어둠이 아니었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앗! 유현 씨, 정신이 들어요?!”
무척이나 듣고 싶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리고.
…….
…….
“……쿨럭!”
숨이 막히는 느낌에 기침이 터졌다. 주변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눈이 시큰거렸다.
기유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온 건가. 그는 마신과 대적한 홀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
“길드장님!”
“기유현 헌터…… 본인 맞습니까?”
“……네?”
파티원들이 무기를 들고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모두가 움찔 놀랐다. 더 움직였다간 당장이라도 무기를 들고 공격할 기세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보다 리을 씨는……. 기유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였다.
[손상된 영혼이 복구되었습니다.]
[위대한 자: □□□ □□와의 계약이 해지됩니다. 일부 스킬이 사용 불가능합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인간의 몸으로 《궁극의 문》 너머에서 생환하였습니다.
손상된 영혼을 복구하였습니다]
[스테이터스가 업데이트됩니다.
기유현(S)의 스킬 한계 및 제한이 소멸합니다.]
[마신 □□□□가 저항합니다. ……실패.]
[인과율의 제한으로 더 이상 그릇을 점유할 수 없습니다.
그릇과 마신 □□□□가 분리됩니다.]
갑자기 몸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안에 자리한 이물질이 날뛰는 것 같았다.
“……쿨럭, 쿨럭!”
기유현은 다시 기침을 토해 냈다. 주르륵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바닥에 고여 다시 사람의 형체를 빚었다.
【이럴 수는……. 크윽, 이럴 수는 없다……!】
희뿌연 빛이 몸을 감쌌다. 기유현은 제 안에서 흘러넘치는 힘을 느꼈다.
예리해진 감각이 이 공간의 모든 것을 감지했다. 주위를 둘러싼 파티원들의 모습, 그리고…… 다가오는 발소리까지도.
[마신 □□□□의 게이트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00:04:14]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00:04:13]
[완전 소환까지 남은 시간 00:04:12]
남은 시간이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충분하다.
기유현은 몸을 일으켜 작고 초라한 마신의 모습을 보았다.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은 지금은 어렵지 않게 이 마신의 끝을 예견할 수 있었다.
길고 긴 싸움에 끝을 낼 때였다.
* * *
[에테르-위키의 이용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사용자가 원래의 좌표로 이동합니다. 10, 9, 8…….]
[적격자님이 가꾸어 나가는 차원의 백과사전!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기유현이 눈을 뜬 순간 퀘스트가 완료되더니, 이런 메시지와 함께 나는 《궁극의 문》 안쪽에서 튕겨져 나왔다.
끼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나는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곧게 선 남자가 있었다.
무사히 정신을 차린 기유현을 보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기유현이 마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반투명한 검을 만들어 손에 들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것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기유현밖에 없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간이 감히 나, 원시의 혼돈에서 끓어오르는 무한한 악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마신은 말을 끝까지 끝맺지 못했다. 기유현은 한번 무표정하게 마신을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푸욱!
검을 내리꽂았다.
[마신 □□□□의 소환이 해제됩니다.]
[축하합니다! ‘공통 퀘스트: 마신 □□□□의 부활 저지하기’를 완료했습니다!]
타다닥, 탓!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모두에게 다가갔다.
“리을아!”
“……언니! 다행이에요, 돌아오셨군요!”
그런데 마음이 성급한 나머지 마지막 계단을 딛다가 그만 중심을 잃었다. 그대로 바닥으로 크게 구르려는 찰나였다.
풀썩!
기유현이 내 몸을 붙잡아 주었다.
“으아아, 미안해요. 괜찮…….”
나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몸을 떨어뜨리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안은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떨림은 금방 내게도 전염되었다.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행입니다……. 리을 씨가 돌아와서, 여기 있어서……. 정말로…….”
떨리는 숨에 뒷말이 흐트러졌다.
뒤통수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할 말을 삼키기에는 너무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기유현을 마주 안았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자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요. 유현 씨가 돌아와서, 여기 있어서…….”
【크으으읏!】
【이대로 끝날 줄 아느냐……!】
눈치하고는…….
바닥에서 검은색 거품이 부글거리며 일었다. 이 거품은 자그마한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온 세계의 인간들에게 나의 파편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혼돈의 씨앗에서 다시 부활하리라.】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고, 파멸을 불러들이고 말겠다……!】
최종 보스라도 패배할 때는 삼류 악당 같은 말을 하는구나.
마신의 말대로라면 심각한 상황이기는 했다. 엄청나게 많은 수로 나뉜 파편을 일일이 찾을 방법은 없으니까. 그 파편에서 다시 마신이 나타나면, 멸망이니 루프니 하는 끔찍한 일을 되풀이하게 될 테다.
하지만 내가 태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길어서 아직 다 확인하지 못한 시스템 창을 띄웠다. 바로 퀘스트 보상이었다.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별빛을 따라서’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수령해 주세요.]
[카페 주인의 진정한 힘을 획득했습니다.
[카페 주인의 진정한 힘의 효과로 스테이터스가 재조정됩니다.
권리을(F) → 권리을(S)]
[내 손 안의 카페(S)
상세: (Lv.max) 가게 안에서 음료 제조 시 완성도가 더더욱 높아진다.]
[스마일(A)
상세: (Lv.max) 웃으면 복이 와요.]
[바리스타의 추출(B)
상세: (Lv.max) 무엇이든 완벽하게 추출한다.]
[바리스타의 눈(B)
상세: (Lv.max) 던전에서 완벽한 상태의 재료를 발견할 수 있다.]
[던전 탐험도 커피 한잔 후(A)
상세: (Lv.max) 던전에서 음료 제조 시 완성도가 더더욱 높아진다.]
[커피 한 잔의 인연(S)
상세: (Lv.max) 궁극의 커피를 마신 상대의 스킬을 복사할 수 있다. (01:00:00)]
[영겁의 불꽃(S)
상세: (Lv.max) 크투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등급이 F에서 S로 비약적으로 상승한 데다가, 모든 스킬이 최대치까지 성장했다.
최종 보스를 처리해서 그런가. 늘 보상이 쩨쩨하더니 이번에는 제법 통이 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장한 스킬은 바로 이것이다.
[바닥이 반짝반짝 (S)
상세: (Lv.max) 세상을 빠르게 청소할 수 있다.]
대체 왜 카페 주인에게 세상을 청소하라는 거야. 가게 청소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런 태클을 걸고 싶어지기는 하지만, 어쨌건 지금은 유용한 스킬.
나는 비산하는 혼돈의 파편을 향해 이 어이없는 스킬을 사용했다.
‘바닥이 반짝반짝!’
[※ 주의: 매우 강한 스킬입니다.
쿨 타임이 매우 길어 1년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파아앗-
내게서 뿜어져 나온 거센 힘이 순식간에 혼돈의 파편을 없애 버렸다. 녹아서 사라지는 혼돈의 파편이 반짝반짝 빛이 나, 마치 눈 같았다.
쿠쿠쿵, 쿵-
[암흑의 옥좌가 소멸합니다.
방문자들은 원래의 좌표로 자동으로 이동합니다. 이동에 대비하여 주세요.
100, 99, 98…….]
홀의 기둥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이어 벽과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현실의 공기가 느껴졌다.
너무 큰 힘을 쓴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시 비틀거리는 몸을 기유현이 꽉 안았다.
주위에서 우리를 향해 뭐라고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의 허리를 꽉 껴안은 채 고개를 기댔다.
“리을 씨,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리을 씨를 떠올렸어요. 단 하나, 리을 씨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여기 있어서, 그래서…….”
거리가 가깝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나는 우리가 지금 같은 생각을 했음을 알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분명 지금 그도 나와 같겠지.
나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수줍은 듯 그가 뺨을 붉히며 웃었다. 아.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살짝만 턱을 들고,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간질이고 잠시 뒤.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따뜻한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