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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184/192)

184화

더군다나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온 이후로 권리을은 어딘가 이상하다. 평소처럼 굴려고 하지만 어쩐지 우울해 보인다고 할까…….

‘원인은 역시 그거 같다는…….’

그래도 오늘은 오랫동안 신경을 쓴 <아이템 퍼블릭 마켓>의 출범식이다. 오랜만에 권리을을 만날 테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운을 북돋아 줘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조금 전, 충격적인 소식이 주노을에게 당도했다.

바로 존재감이 없기로 유명한 <대한 헌터 협회>의 소식이었다. 주노을이 제비뽑기에 걸리는 바람에 2연속 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대한 헌터 협회>는 다음 분기부터 협회장을 제비뽑기가 아닌 투표로 선출하기로 했다. 주노을은 두 손을 들며 환영했다. 누가 뽑힐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는 아니겠지. 드디어 지긋지긋한 협회장을 때려치울 수 있다.

……그런데 과반수 이상 득표로 주노을이 당선됐다.

‘충격이라는…….’

어라? 혹시 나 그건가?

나름 비중 있는 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그냥 조연? 퀘스트에서 활약하는 것보다 이런 잡무가 어울리는 신세?

그런데 옆에서 부하가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저는 협회장 투표 길드장님 뽑았어요.”

“뭐?! 너무하다는…….”

배신자는 가까이에 있다더니! 8년째 인연을 이어 온 부하의 배신에 주노을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길드장님은 그런 게 어울려요.”

“어째서냐는…….”

부하가 막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아, 노을 씨, 여기 있었네요!”

그들을 발견하고 권리을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라는…….”

“한참 찾았어요. 오늘의 주역이 이렇게 구석에 계시면 안 되죠.”

권리을은 주노을의 손을 잡고 회장의 가운데로 잡아끌었다.

“주역이라니, 그런 거 아니라는…….”

“에이, 제일 신경 많이 쓰셨으면서. 맞다, 협회장 되신 것도 축하드려요.”

“감사하다는…….”

주노을은 당황하면서도 권리을을 따라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그 바람에 부하가 하려던 말은 끊기고 말았다.

‘모처럼 칭찬해 드리려 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네. 칭찬 복이 없으시다니까.’

지금 시대에 헌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해치우는 헌터가 있다면, 또 누군가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을 모색한다.

주노을은 후자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이 <아이템 퍼블릭 마켓>만 해도 그렇다.

“회현 시장 대표가 참가 수락했다는…….”

“잠적 중인 정보 길드 길드장 말이냐는……. 전에 현피 뜬 적 있어서 헌챈 아이디 안다는…….”

“<헌터 마켓> 만족도 설문조사 결과라는…….”

등등등…….

그동안 적극적인 헌터 채널 생활로 쌓은 인맥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순조롭게 출발하기란 어려웠을 테다.

부하는 잠시 8년 전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그녀는 게임 길드 ‘너하나접는다고섭종함’의 정모에 참석하느라 들뜬 고등학생이었다.

쭈뼛거리는 그녀를 주노을이 발견하고 다가 와 말을 걸어주었다.

‟님이 원길외길다솜님 맞으시냐는…….”

‟네, 네. 맞는데요.”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는…….”

‟네……. 저어,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만남에서 아직까지 인연이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시간은 흘렀다. 게임은 섭종했고, 그들은 헌터가 되었다. 세상이 바뀐 만큼 그들이 하는 일도 달라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처음 말을 걸어주었을 때 주노을의 친절함이나, 세상을 더 좋게 할 다양한 일을 떠올리는 사고의 유연성 같은 것들.

부하는 아까 투덜거리던 말은 잊고 환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주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쨌건…….

‘재밌게 지내면 됐지, 뭐.’

* * *

주노을의 축사를 끝으로 식순이 일단락되고, 다음은 티타임이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며 주변을 살폈다. 미리 커피를 여러 잔 만들어 둔 만큼 양은 충분했다. 하지만 더 다양한 커피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달리 더 할 일도 없고…….’

손을 움직이는 동안은 쓸데없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다.

미리 행사장 한쪽에 커피 제조 카트를 설치해 두길 잘했다. 나는 카트로 가서 몇 가지 음료를 더 만들었다.

음, 추가로 아인슈페너도 만들까? 냉장고에 생크림이 남아 있었나.

“아스, 냉장고에서 생크림 좀 꺼내 줘.”

…….

…….

아, 없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냉장고에서 생크림을 꺼냈다.

“하아……. 이것이 만드라고라던전생강으로 만든 진저라테……!”

그때, 앞에서 음료를 마시던 사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맛보는군요. 정말 맛있어요!”

진저라테 잔을 들고 감격하는 사람은 바로 이초록이었다.

이초록은 ‘가정에서도 손쉽게 기를 수 있는 만드라고라던전생강 키트’의 성공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요즘은 던전 농원 경영하랴, 던전 식물 홍보를 위해 방송 활동하랴 무척 바쁘다고 한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대성공이다.

다음으로는 ‘이빨당근 수경 재배 세트’로 이빨당근의 대중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던데.

으음……. 이초록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집마다 이빨이 달린 당근을 키우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제발 이빨당근이 대중화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 이초록은 이 <아이템 퍼블릭 마켓>의 큰 투자자였다. 설립 계획을 듣자마자 엄청난 금액을 투자금으로 내어 놓았다.

투자를 하면서 이초록이 내건 조건은 아주 단순했다. 바로 <아이템 퍼블릭 마켓>에서 던전 식물도 취급하라는 것.

김덕이 할머니는 바로 수락했고, 요즘은 둘이서 던전 식물을 사용한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덕업일치란 바로 이런 거겠지.

그리고 다음은…….

“……아.”

근처 테이블에서 아이스크림 커피 잔을 집어 들던 최이찬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미처 못 본 모양이다. 최이찬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어색함이 감춰지지 않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 저기, 리을아, 안녕.”

“어……. 안녕. 잘 지냈어?”

“…….”

“…….”

“어? 어어, 나야…… 잘 지냈지. 너는?”

“나야 늘 똑같지 뭐.”

다시 침묵.

살려 줘…….

최이찬과는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난다. 나에게 이런 때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스킬 따위는 없다. 자연히 대화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어색하다.

누가 좀 도와줘…….

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끊지를 못하잖아.

‘누가……. 누구 없어요? 이 상황을 스무스하게 수습해 줄 구세주가……!’

“어, 우리 조카가 아닌가! 오랜만이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큰아버지와 권지운이 나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찬이도 여기 있었구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느냐?”

“제 표정이요?”

“꼭 청춘의 쓰라린 상처에 사흘 밤낮 동안 슬픈 발라드만 들은 인간 같구나.”

“아버지, 제발 좀…….”

아, 그러나 이 구세주는 그다지 눈치가 빠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눈치는 빠르지만 눈치를 안 보았다.

“그……. 하하, 저는 이만…….”

창백하게 질린 최이찬이 내게 눈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멀어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고백을 거절했고, 그가 마음을 정리했다고 해서 갑자기 예전처럼 친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직 최이찬한테도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최이찬 쪽을 흘긋 보았다. 전에 그 노란 옷을 입은 기분 나쁜 자가 옆에 없어서일까, 전보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잘 지내면 좋겠네.

그리고 나의 가족인 이 두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전하다.

권지운은 권지운대로 바쁘고, 큰아버지는 큰아버지대로 유튜버 생활이 즐거우신 것 같다.

실은 얼마 전에 이 두 사람에게 다시 같이 살자는 말을 들었다.

“꼭 그 건물 2층에서 지낼 필요는 없잖니. 카페를 다시 열더라도 출퇴근하면 되고.”

“그래, 조카야. 벌써 제일 큰 방 비워 두었다.”

이들이 진심 어린 호의와 걱정으로 어렵게 꺼낸 말임을 안다. 내가 아직 지난 일을 끌고 있으니까. 가게 건물에서 생활하면서 우울해할까 봐 신경 썼겠지.

나는 고민 끝에 답을 보류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이들은 선선히 수긍했다.

“알았어. 리을이 네가 그렇다면 별수 없지. 아직 마음의 정리도 필요할 테고.”

“그럴 마음이 들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그리고 또 하나.

나는 《궁극의 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세계의 재구성 운운하는 부분은 빼고, 그 안에서 어떻게 기유현의 영혼을 찾아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큰아버지는 놀라운 말을 하셨다.

“나도 그 문 너머에 들어간 적이 있단다.”

“네에?! 그게 정말이세요?”

“그래. 쑥만 씹으며 미로 던전을 헤매던 와중이었지…….”

성녀의 개입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할머니의 피를 이은 큰아버지에게도 어떤 힘이 작용한 걸까.

미로 던전에 조난당했을 때 큰아버지는 《궁극의 문》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열쇠의 힘이 없는 큰아버지는 문에게 거부당해 금방 튕겨져 나왔다.

큰아버지가 머문 시간은 수 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손에 닿은 별빛을 통해 극히 일부의 지식을 얻었다.

이따금 큰아버지가 미래의 일을 아는 듯해 보였던 것은 이 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편,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권지운은…….

“아얏! 아파! 아프다고!”

……다짜고짜 내 등짝을 후려갈겼다.

“그렇게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안 아픈 거 다 알아. 엄살부리지 말고.”

“내가 일부러 위험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 방법밖엔 없었……. 으악! 아프다니까? 등에 자국 남겠어.”

“정말? 그, 미안. 치료해 줄 테니까 보여 봐.”

“거짓말인데. 으악! 이번엔 진짜 아파, 진짜!”

나는 《궁극의 문》 안에서 본 재구성된 세계를 떠올렸다. 그 세계에서도 나는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다가 권지운에게 등짝을 얻어맞았었지.

비슷한 듯 다른 상황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하하…….”

“왜 그래?”

권지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내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확신은 없다. 누구한테 물어서 답을 얻을 수도 없는 일이니만큼 앞으로도 100% 확신이란 없겠지.

하지만…….

나는 큰아버지와 권지운을 다시 바라보았다. 서로 많은 일을 겪었다. 내 가족은 역시,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따가 저녁 같이 어떠니? 모처럼인데.”

불쑥 권지운이 말을 꺼냈다. 애초에 내게 이 말을 하기 위해 다가왔던 듯했다.

“으음……. 아니. 같이 먹고 싶긴 한데,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일찍 가 봐야 해.”

“아. 오늘 그 일이 있댔지.”

“응, 그거.”

중요한 식순은 다 끝났겠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슬쩍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 * *

인파를 피해 행사장 뒷문으로 나와 복도를 걷던 길이었다. 타다닷! 앞쪽에서 빠르고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안녕하세요, 누나.”

주신우, 주신희 쌍둥이였다. 나를 발견한 쌍둥이가 인파를 제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권리을 헌터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마침 다 같이 행사장을 향하던 길이었는지 옆에 한이성도 있었다. 한이성이 사교성 좋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주신희가 내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응,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일찍 가 봐야 해.”

“다행이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누나랑 엇갈릴 뻔했네요!”

“이 멍청아! 네가 늦잠 자서 그렇잖아.”

“너도 늦게 일어난 거 다 알거든?!”

쌍둥이는 나를 가운데 놓고 빙글빙글 돌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한이성은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능숙하게 둘을 떼어 놓았다.

“하하……. 고생이 많으시네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한이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쌍둥이와 한이성은 꽤 나이 차가 날 텐데, 무척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최근에 들은 쌍둥이의 소식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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