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192)

185화

“맞다. 신희야, 신우야, 너희 곧 학교 들어간다며?”

주신우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데 안 다녀도 된다니까, 자꾸…….”

“언니, 저 교복 맞췄어요! 사진 보여 줄까요?”

지금 말하는 학교란 다음 달에 개교하는 미성년 헌터 전문 교육기관을 의미한다.

예전에도 소규모 헌터 아카데미는 있었다. 하지만 전투 기술 등 헌터로서의 능력 향상을 위한 고가의 사설 기관에 불과했다. 워낙 소규모라 존재감도 없었고.

이번에 개교하는 이 학교는 미성년 헌터에게 기초 교과 및 전문화된 종합 교육을 실시한다. 일종의 중·고등학교랄까.

원래는 3월에 개교할 예정이었는데, 지난 마신 부활 사건의 여파로 두 달 미뤄졌다.

쌍둥이는 처음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했다. 학교에 다니라는 말을 듣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미 제 역할을 하는 헌터고, 그러니 이제 와서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쌍둥이를 나와 기유현이 설득했다. 긴 설득 끝에 입학하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다.

나는 주신희가 내민 핸드폰 속의 사진을 보았다. 둘이 교복을 입고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 예쁘다. 잘 어울려.”

“헤헤, 고마워요, 언니!”

쌍둥이는 여전히 천진하고 활달하다. 동시에 전보다 어딘가 어른스러워졌다. 환한 표정에서 예전과는 다른 차분한 눈빛과 단단한 심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변한 계기는, 아마…….

‘아스겠지…….’

그때, 복도 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큰 키의 남자가 보였다.

기유현이다.

“아, 이제 오셨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언니, 다음에 가게 놀러 갈게요!”

“뭐? 얘들아, 잠깐…….”

샤샤샥.

뭐라 붙잡을 틈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세 사람이 멀어졌다.

그 사이에 기유현이 성큼 큰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웅성거림이 커졌다가 다시 잦아들었고, 뒤통수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긴 그림자가 비스듬히 내 위로 드리웠다. 생긋. 부드럽게 웃으면서 기유현이 인사했다.

“엇갈리는 줄 알았습니다. 만나서 다행이에요.”

지금 기유현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신을 해치우고 돌아온 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드디어 마신을 해치웠다는 안도감, 기유현이 무사하다는 기쁨, 슬픔과 그리움 등…….

여러 감정에 휩싸인 나는 기유현과 입을 맞추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듯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나를 보고 웃는 표정은 사랑스러웠고, 내 뺨을 감싸는 손을 뜨거웠다.

그는 키스를 무척…… 잘……. 아니, 이건 일단 넘어가고.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때 키스하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로 또 한참 고민했을 테니까. 그런 고구마는 참을 수 없지, 음.

문제는 던전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소멸했다는 것이다.

한 번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눈을 마주치고, 그가 다시 입술을 붙였다. 그 잠깐 사이에 우리는 원래 있던 곳, 그러니까 인구 밀도가 끝내 주는 서울로 귀환해 버렸다.

무척 따뜻하고 다정한 키스였지만, 나는 창백하게 질려서 그를 밀어 낼 수밖에 없었다.

“음……. 하아. 헉, 유현 씨, 잠깐…… 잠깐만요! 좀 떨어져 봐요. 그만, 스톱!”

“리을 씨, 왜…….”

“지금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제발 주변을 좀 봐요…….”

윽,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접시 물에 고개를 처박고 싶어진다.

아무튼, 그 일의 여파로…….

아직 사귀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시점에 우린 거의 헌터계 공식 커플 취급을 받게 되었다. 나는 입맞춤을 할 때는 주위를 잘 살피자는 교훈을 얻었고.

지금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 기유현이 복도에 나타났을 때는 웅성웅성하더니 지금은 또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다만 이쪽을 흘깃거리는 열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위 시선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여기서 나 혼자뿐이었다. 기유현은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거리가 가깝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뭐……. 평소랑 똑같죠. 유현 씨는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 오늘 출범식, 리을 씨가 신경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에이, 아니에요. 저는 커피 만든 거밖에 없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이상하다. 평범한 말인데 왜 그가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가슴에 스미는 걸까. 나는 휙 그의 눈을 피하며 불쑥 말했다.

“저기…….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일찍 가 봐야 해요.”

“아. 그 일이 오늘이었군요.”

“네. 그치만 잠시라도 유현 씨 보고 가서 좋네요.”

“바래다 드릴게요.”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요. 유현 씨도 오늘 출범식 때문에 온 거잖아요. 내가 시간을 뺏을 수는 없죠.”

“리을 씨한테 시간을 뺏긴다면 영광이고요.”

기유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했다.

이게 보통인가? 다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저렇게 다정한 말을 하고 사는 건가?

모르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반 애한테 빼빼로 한 번 받은 거 말고는 그런 쪽 경험이 전무한 내가 알 리가 없다.

“괜찮아요. 그냥 갈게요.”

내가 거듭 거절하자 기유현은 말을 바꿨다.

“그러면 저 앞까지라도 같이 가요.”

앞이라고 해 봐야 몇 발짝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 역시 기유현과 잠깐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리을 씨, 춥지는 않으세요?”

“괜찮아요. 오늘 따뜻한데요, 뭐.”

우리는 행사장이 있는 건물을 나와서 출구를 향해 나란히 걸었다. 건물 주위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완전히 봄을 맞이한 날씨가 제법 따뜻해 산책하기 좋았다.

자연히 걸음은 느려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근황 따위를 이야기했다. 최로나도 쌍둥이와 같은 학교에 입학을 고민 중이라거나, 제임스가 아직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다는 소식 등이었다.

나는 대화에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살짝 눈을 돌리면 보이는 그의 옆모습이나 발걸음 소리, 말에 섞이는 웃음소리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유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평온한 태도로 대화를 나누고 규칙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살짝 내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다.

아, 혹시 그건가?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도 키스 정도는 할 수 있는 타입? 그때는 그냥 감격해서 입을 맞췄을 뿐, 지금은 지금?

……일 리가 없지.

벌써 기유현과 만나고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나름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방금 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 틀림없다.

‘리을 씨는 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눈썹을 찌푸리고 이렇게.

‘제가 그렇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보이세요……?’

아하하. 상상이지만 제법 현실감이 넘쳤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그만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휴, 꼴사납게 넘어질 위기였다. 나는 중심을 잃을 뻔한 몸을 얼른 바로 했다.

아, 손이.

“…….”

비틀거리다가 기유현의 손등에 내 손등이 살짝 닿았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잡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제껏 그의 손을 잡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닿으니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슬쩍 눈만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까지 평온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뺨과 귓불이 달아오른 것이 분명히 보였다.

“…….”

“…….”

느슨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먼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온 신경이 손등에 쏠린 상태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금방 끝이 왔다.

“여기까지면 됐어요, 유현 씨.”

“아. 다 왔군요.”

기유현이 아쉬움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손이 떨어졌다. 손등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다.

“그럼, 저 이만 갈게요.”

“네, 다음에. ……다음에 뵙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무슨 사이냐면…….

한마디로, 썸 타는 사이라고 할까.

이런 상태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신을 해치우고 돌아온 다음. 사건 수습 때문에 정신없던 것도 조금 진정되었을 무렵, 기유현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에,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죠.”

“……네.”

“리을 씨만 괜찮으시면, 그 말을 하고 싶습니다. 들어 줄 수 있어요?”

“…….”

나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겨우 대답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

“유현 씨가 저한테 그 말을 하면…… 고백 받으면, 나는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네.”

“그러니까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이제 확실하게 안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도저히 그와 곧장 연애를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스와 미음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잖아.

연애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그 애들한테 말해주고 싶었는데, 지금 옆에 없으니까.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고 선을 긋고,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 당장은 버거웠다.

기유현은 그냥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평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평범한 지인 관계가 된 것은 아니다. 만나면 기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금 전처럼 손이 스치기라도 하면 뺨이 화끈거렸다.

기유현이 나를 미소로 배웅했다.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마음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겠지만…….

모르겠다. 정리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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