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 *
“네, 누구세요? 어, 할아버지!”
나는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마왕숭배교 <황혼>의 교주 할아버지였다.
“허허허……. 오랜만이네. 잘 지냈는가?”
“네, 저야 뭐 늘 그렇죠.”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온 다음, 나는 마왕숭배교 <황혼>을 한번 찾아갔었다. 아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교주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스를 손자처럼 잘 대해 주셨는데. 내가 멋대로 게이트에 데려가서.
데려가서…… 그렇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너무 슬퍼하지 말게나. 시간은 길어. 마왕님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다 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걸세.”
그 말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마왕숭배교 <황혼>은 여러 봉사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보육원을 하나 새로 지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아니다, 여기서 서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 전에, 여기를 봐 주겠나.”
“네?”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을 보고 나는 흠칫 놀랐다. 아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할아버지의 옆에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작은 키에 검은 머리카락, 동그란 뺨……. 아스가 서 있었다.
그런데…….
“크으읏, 뭐지? 이 느낌은……?!”
아스로 추정되는 소년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아스, 왜 그래? 아스 맞는 거지?”
“핫……?! 어떻게, 처음 보는 인간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설마! 훗, 그렇군. 심연의 힘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인가.”
“……뭐?”
“큭……! 또 날뛰는군. 이 왼손에 잠든 마력이……!”
아스로 추정되는 소년이 왼쪽 손등을 반대쪽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기억은……! 전생?! 그래, 전생인가. 전생의 나는……. 이곳에 있었나?”
“…….”
“크큭, 크크큭……. 이제 알겠군. 역시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마왕의 환생이었군……!”
“…….”
“아아, 전생의 인과가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인가. 나는…… 자, 잠깐?!”
와락!
나는 아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소, 아니 상당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스가 맞다. 얘가 아스가 아닐 리가 없다. 드디어 아스가 돌아왔다.
“떠, 떨어져라, 인간! 이 몸은 인간이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흑, 정말 잘 왔어. 보고 싶었어……. 흐윽…….”
“크읏……. 알 수 없군. 어째서 이렇게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거지?”
아스는 당황했지만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다만 나를 보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꾸만 낯선 기억이 떠오른다. 크으윽……. 이 기억은 대체 뭐지?!”
아스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거의 다 나았던 중2병이 재발, 아니 심화된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스는 아스였으니까.
“호오, 이곳, 아르바이트를 구하는군. 할아버지한테 계속 신세를 질 순 없지. 인간,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붙여만 놓고 잊고 있었던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보고 아스가 물었다. 아스라면 당연히 대환영이지만…….
마왕숭배교 <황혼>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고? 가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흑…….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그건 내가 설명하마, 왜오오옹!”
미음이가 느린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예전 아스의 존재 자체가 소멸한 것은 맞다, 왜오옹!”
“……응.”
“아스는 원시의 혼돈으로부터 분리된 불완전 화신체. 이름하여 마왕 아스모데우스!”
“후훗……. 역시 나는 마왕의 환생이었군. 크큭, 그럴 줄 알았다.”
아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굉장히 뿌듯한 표정이다.
“아스는 더 근원에 가까운 화신체, 마신과 접촉하며 사라졌다. 이것은 세계의 법칙이자 순리. 그분이 개입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왜오옹!”
“…….”
“그러나 너는 아스에게 꾸준히 커피를 마시게 했지.”
“어, 커피? 카페모카 말이야?”
다소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음이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 왜오옭! 세계수의 열매는 곧 인과의 파편. 커피를 마셔서 얻은 힘은 이 세계에 속한다고 내가 설명했을 거다.”
“어…… 응…….”
그랬었나?
퍼억!
풀쩍 뛰어오른 미음이가 다짜고짜 내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미음이가 돌아온 기쁨에 냥냥펀치든 몸통 박치기든 맞아 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아프다. 진짜 아프다.
“세계관 설명 타임을 스킵하지 말거라, 왜오오옭!”
“으악! 아파!”
이번에는 진짜 억울했다. 그냥 커피를 많이 마시면 좋다는 말밖에 안 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아스의 상태가 더 궁금했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왜우우웅……. 즉, 커피를 마셔서 회복한 마력은 심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세계에 그대로 남았다. 위대하신 그분께서 그 마력을 모아 인간의 몸을 빚었다.”
‟몸을 빚었다고? 그게 저 아스의 몸이야?”
‟그렇다, 왜오옭! 그분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
감격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러면, 아스는…….”
“마왕이 아닌 진짜 인간이 되었다. 마력은 사용할 수 있지만, 몸은 인간이다. 왜오옭!”
나는 아스를 보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아스가 아스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상관없다.
내 생각에 확신을 더하듯 미음이가 말했다.
“왜우웅……. 쟤는 네가 아는 그 김아스가 맞다.”
“좀 이상해진 건?”
“걔는 원래 이상…… 캬갸갸옭!”
아스가 미음이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미음이는 털을 쭈뼛 세우며 아스에게 앞발을 날렸다.
“만지지 마라, 왜오옭!”
“크읏……. 이상하군. 어쩐지 자꾸 익숙한 느낌이……. 설마, 이 고양이, 전생의 나를 따르던 부하였나?”
“캬갸갸옭! 착각하지 마라! 네가 내 부하였다!”
“뀨우웃! 뀨우!”
라임이도 아스에게 다가와 몸을 튕기며 환영했다. 셋이서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투닥거리는 통에 잠시 정신이 없었다. 정말 그리웠던 소란스러움이었다.
겨우 아스에게서 떨어진 미음이가 덧붙였다.
“냐아아……. 헉, 허억……. 기억의 혼란이 중2병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내버려 두면 점점 기억을 찾아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뀨우우!”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 네가 저 녀석을 살렸다. 네 커피의 힘 덕분에 저 녀석이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왜오옭!”
‟응…….”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카페 주인이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군. 슬슬 깨어날 때가 되었다곤 생각했지만……. 왜 이 할아버지가 데리고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왜옭!”
“아, 그건 말일세.”
인자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교주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그 사람이 내게 데려왔네.”
“그 사람이요?”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계속 찾았다고 하더군.”
할아버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놀랍게도…… 기유현이었다.
마신을 해치우고 돌아오자마자 기유현은 헌터들을 모아 던전을 수색했다고 한다. 목적은 물론 아스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갔던 붉은 게이트는 이미 닫혀 접근이 불가능했다. 아스가 살아있다는 흔적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기유현은 수색을 그만두지 않았다. 계속 끈질기게 여러 던전을 조사하다가 며칠 전, 한 소년을 발견했다.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스다.
발견됐을 때 아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잠시 눈을 뜬 적도 있지만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려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달리 몸에 지닌 물건도 없다.
진짜 아스가 맞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유현은 일단 마왕숭배교 <황혼>의 교주 할아버지에게 아스를 맡겼다.
그리고 아스가 눈을 뜬 것이 오늘 오후.
할아버지는 우선 힐러를 불러 아스를 치료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아스가 어디로 가야만 한다며 병실을 뛰쳐나왔다. 기억이 불완전한 상태였는데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우리 가게를 향했다고 한다.
“……리을 씨!”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기유현이었다.
기유현은 카페 입구 앞에 우리가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맑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물기가 남은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치며 그가 말했다.
“오늘 리을 씨가 계속 표정이 안 좋아서, 걱정돼서 와 봤는데……. 오길 잘했군요.”
“유현 씨, 왜…….”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그동안 왜 말 안 했어요? 아스 찾았던 거.”
“만에 하나 찾지 못했을 경우, 리을 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기유현이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토닥이면서 덧붙였다.
“아스가 깨어나면 말하려고 했는데……. 제가 한발 늦었군요.”
품에 라임이를 끌어안은 채 나와 기유현 쪽을 보고 있던 아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크읏……. 어째서지? 앞에서 저 꼴을 보니 기분이 나쁜데.”
“뀨우우?”
“그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란다, 왜오옭! 다른 말로 하면 눈꼴사납다고 하지.”
“흥, 그런 것쯤 나도 알아.”
“캬갸갸옭! 이제 돌아온 신입 주제에!”
나는 뭐라고 변명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활짝 웃음 지었다.
이제 겨우 진짜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