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어라, 알아보시는군요.”
진달래가 왼쪽 눈을 휘며 웃었다.
“왜 이런 한적한 던전에 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제임스 헌터와는 무슨 관계죠?”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모두 과거의 영광인 걸요. 지금은 뒷골목에서 전당포 겸 정보상이나 운영하는 처지랍니다.”
“누가 그 말을 믿죠?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진달래는 손에 든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제임스에게 내밀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거나 배달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요. 자, 받아요. 제임스에게 전달해 달라더군요.”
제임스는 쑥을 캐던 칼을 내려놓고 종이를 받았다.
“드디어 이날이 왔군.”
“그…… 그게 제임스 헌터가 기다리던 물건입니까? 뭐죠? 이제 미국에 갈 수 있나요?”
제임스는 야속하게도 곧장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하지만 그 전에 종이의 제일 윗줄에 적힌 큰 글씨는 읽을 수 있었다. 헌터는 더듬더듬 방금 본 내용을 읊었다.
“어…… 카페 리을 재오픈……?”
* * *
최로나가 불쑥 최세드릭을 불렀다.
“오빠.”
“……어.”
“후회해?”
최세드릭과 최로나는 이세인의 면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구속당한 이세인을 보니 뒷맛이 씁쓸하다. 그 때문에 남매 사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니.”
최세드릭의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짧지만 그만큼 힘이 실린 말이었다. 최로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후회해. 더 나은 방법이 없었을까 자꾸 생각하게 돼. 세인 언니를 더 일찍 막을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랬으면 지금쯤은 셋이서 함께 있었을 텐데.”
최세드릭이 쩔쩔 매며 황급히 말했다.
“어, 그래도, 그 뭐냐, 로나 너는 그때 아팠잖아.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는데, 어떻게 이온을 막을 수 있었겠어. 최선을 다했잖아.”
“으응…….”
이 다정한 오빠는 그렇게 말하지만.
최로나는 잠시 지난 마신 봉인 퀘스트를 떠올렸다.
요정안의 힘으로 인과율을 읽어 내고, 마도서의 힘에도 완전히 익숙해졌다. 지금 그녀는 어지간한 헌터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느낀 무력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자만했는지도 모르겠어.”
옆에서 최세드릭이 펄쩍 뛰었다.
“아, 아니? 전혀 안 그런데? 우리 로나, 정말 겸손의 아이콘인데? 우리 로나만큼 겸손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최세드릭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는 삽질도 못 하겠다.
최로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쑥 말했다.
“오빠, 나 역시 학교에 가야겠어.”
“어? 정말? 진짜지? 잘 생각했어, 로나야! 그럼 뭐부터 해야 하지? 그래, 일단 얼른 교복부터 맞춰야겠다. 또 가방도 사고…….”
“그건 다음에 하고. 얼른 가자. 카페 오픈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어, 어어!”
최로나가 손을 내밀었다. 최세드릭이 그 손을 잡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려 했다.
그때, 골목 맞은편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남매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최세드릭, 최로나 남매 맞으시죠?”
“……누구지?”
바로 최근 영화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헌터 출신 배우, 오서호였다.
오서호가 호의가 듬뿍 담긴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지만, 최씨 남매의 발걸음은 급했다. 그대로 오서호를 지나쳐 가려 했다.
“잠깐. 제 이야기 좀 듣고 가시죠.”
오서호가 다시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최세드릭은 최로나를 제 뒤쪽으로 감싸면서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누구건 우리 지금 바쁘니까 갈길 가쇼.”
“<카페 리을>에 가는 길이시죠?”
최세드릭의 등 뒤에서 고개만 삐죽 내민 채로 최로나가 대신 대답했다.
“커피 구매권은 안 팔 거예요. 귀속이 걸려 있어서 팔 수도 없고요.”
“하하하, 그게 아니라…….”
“컴퓨터 두 대, 핸드폰 두 대로 정정당당하게 손에 넣은 거예요. 우리도 이 날만 기다렸다고요.”
“하, 하하…….”
최근에 개봉한 영화는 관객 천만 명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남매는 전혀 오서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음에 작은 상처를 입은 오서호는 얼른 용건이나 말하고 가기로 했다.
“여러분이 마지막입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저는 이 종이를 전달하러 왔습니다.”
“이게 뭔데요?”
최세드릭이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종이의 제일 윗줄을 읽었다.
“카페 리을 재오픈 기념 서프라이즈 파티……?”
최세드릭의 등 뒤에서 고개를 쏙 내민 최로나가 박수를 쳤다.
“와아,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 * *
뚜르르, 뚜르르르…….
알람이 울리자마자 나는 바로 눈을 떴다. 이른 시간인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늘이 왔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아침의 투명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나는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방을 환기했다. 그리고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음……. 멋진 풍경이야.”
던전이 사라지면서 앞이 탁 트였다.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왜오오옹. 뭐가 멋지단 말이냐!”
미음이가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미음이는 그 사이에 밥을 잘 먹어서 완전히 예전의 몸매를 되찾았다. 포동포동한 몸이 무척 귀엽다.
“왜, 좋잖아. 편의점 뷰라고.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니까.”
“왜우우웅…….”
내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 미음이가 길게 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늘 하루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후후후……. 드디어 오늘이 되었구나.”
“왜오옭!”
“뀨우우!”
그래서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
바로 <카페 리을>이 다시 영업을 시작하는 날이다.
아스와 미음이가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곧장 인테리어 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건은 물론 인테리어 콘셉트를 변경하는 것이었다.
역시 모던하고 심플한, 블랙&화이트 콘셉트는 이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카페 인테리어를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으로 수정을 요청했다.
이 경우, 인테리어 공사의 규모가 대폭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업자는 반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업자는 내 요청을 무척 기뻐했다.
“하하하!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역시 그 건물에 모던하고 심플한 건 아니죠?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음……. 그렇게 안 어울리는 콘셉트였나?
내가 강하게 요청해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의 미의식이 모던&심플을 거부했던 모양이다. 업자는 선뜻 멋진 시안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가게 전체를 갈아엎는 대신 낡은 곳을 보수하고 약간만 디자인을 바꿨다. 아늑하면서도 깔끔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업자는 서비스로 미음이와 라임이의 놀이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매일 우당탕탕거리는 미음이와 라임이는 잔뜩 신이 났다.
이렇게 규모가 줄어든 인테리어 공사가 겨우 그저께 끝났다. 이제는 꽤 오래 휴업한 <카페 리을>을 다시 열 때가 되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약간 떨린다. 모처럼이니까 힘을 내 볼까.
“아스, 잘 잤어?”
“……응.”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스가 벌써 일어나 있었다. 언제 봐도 참 부지런한 애다.
아스는 며칠 사이에 기억 대부분을 되찾았다. 이제 완전히 예전의 아스로 돌아왔다.
아직 가끔은…….
“이 거품기는 뭐지……? 이걸 잡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크윽, 기분이 불쾌해지는군. 이건…… 전생의 기억인가?!”
이런 말을 하곤 했지만.
나는 자그마한 소리로 미음이에게 물었다.
“기억을 찾으면 원래대로 돌아온다며?”
“돌아왔다. 저건 그냥 저 녀석 성격이다, 왜오옭!”
그런 건가…….
“아스, 얼른 이쪽으로 와. 아침부터 먹자.”
“……알았어.”
아스는 당장 전동 거품기를 내려놓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카페 오픈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 간단하게 차려서 다 같이 아침을 먹었다.
미음이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텔레비전에 열중했고, 라임이는 밥을 먹는 대신 통통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언제 봐도 참 산만한 녀석들이다.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아침을 먹으니 정말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있잖아.”
한참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아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응? 아, 계란말이 더 줄까?”
“그게 아니라……. 그 인간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응? 그 인간이라니?”
“알아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그 인간, 기유현 말이야.”
“아, 하하…….”
“한 달 정도지? 내가 없던 기간. 기억을 찾고 나서 보니 어째 분위기가 달라졌던데.”
“왜오옹! 예리하구나! 나도 느꼈다. 내가 그분의 곁에서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뀨우우! 뀨웃!”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나는 후다닥 남은 음식을 먹어치운 뒤 식탁 앞에서 일어났다.
“그건 노코멘트!”
“왜오오옭!”
“뀨우우!”
“자, 오늘은 바쁠 예정이니까 얼른 준비하자.”
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항의를 무시하고 카운터 앞을 향했다.
* * *
<카페 리을> 재오픈 기념 신메뉴를 정하기 위해 나는 무척 오래 고민했다.
제일 최근에 만든 메뉴 달고나 크림 콜드 브루의 효과는 ‘마신 사람에게 알맞은 최적의 버프를 제공합니다.’이다.
개인 맞춤형 버프. 말하자면 종결 아이템이다.
무엇을 만들든 이보다 좋은 효과를 얻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몇 가지 메뉴를 새로 만들어 보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맛은 있었다. 맛있기는 한데, 뭐랄까…… 좀……. 버프 효과도 어중간한 데다가, 팟 하고 오는 게 없다고 할까.
계속 여러 메뉴를 만들면서 머리를 부여잡자 시식 담당을 맡은 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부 다 맛있는데. 그냥 이대로 괜찮지 않아?”
우리 집 동물들도 아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왜오옭! 지금 만든 커피도 충분히 맛있어 보인다!”
“뀨우우!”
“으으음, 그래도……. 좀 더 이렇게, 팟! 하고 임팩트 있는 커피를 만들고 싶은걸.”
“‘팟!’이 대체 뭐냐, 캬갸갸옭!”
이렇게 답도 없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어느 신입 헌터가 내게 답을 내려 주었다. 그 헌터는 내가 기념 메뉴 때문에 고민 중이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다 장식 하나만 추가하면 되겠네요.”
“……!”
그래, 어차피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메뉴는 한계가 있다. 종결 아이템이 이미 나온 시점에서 더 좋은 버프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음료나 만들자. 그리고 장식을 더해서 기념 메뉴로 만드는 거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가 선택한 신메뉴는 바로 모카 프라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