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192)

192화

에필로그

“잘 들어라. 절대 눈치챈 티를 내서는 안 된다.”

한이성이 근엄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 알겠지, 평소처럼 말이다.”

“네, 저희만 믿으세요!”

쌍둥이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동자 안에서 반짝반짝 사명감이 빛을 발했다.

“그럼 다시 한번 구호를…….”

한이성이 주먹을 쥐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한이성 헌터, 여기 있었나?”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기유현이었다. 한이성은 주먹을 풀고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흠. 네, 길드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외출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나 해서.”

소리 없이 한이성과 쌍둥이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한이성은 재빨리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 지난주에 터진 균열 때문에 지원 요청이 왔던 거 같은데.”

한이성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태블릿 PC를 들고 화면을 빠르게 넘겼다. 휴우. 다행히 이미 종결한 건이었다.

“네, 처리했습니다.”

“김지나 요원이 요청한 자료는?”

“한 시간 전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네, 완료했습니다. 그것도 끝났고, 아, 그 건은 제가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모든 질문에 척척 대답하면서 한이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나라도 구멍이 있었다가는, 기유현이 당장이라도 아쉽지만 외출을 취소해야겠다고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이성은 모든 문답을 완벽하게 통과했고, 이윽고 기유현이 기다리던 말을 했다.

“그래. 당장은 별일 없겠군.”

“길드장님, 그럼 몇 시쯤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글쎄…….”

기유현이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쌍둥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늦게 오셔도 괜찮아요.”

“네, 완전 늦게 오셔야 해요!”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쌍둥이를 향해 기유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빙글. 한 걸음 내디딘 기유현이 한 걸음 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을 고쳤다.

“아니. 무슨 일 있어도 연락하지 마.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에는, 긴급한 건 아니면 부르지 말도록.”

가만 보니 뺨이 살짝 붉다. 역시 한이성과 쌍둥이의 예상이 맞았다. 오늘이 그 날이구나! 잠시 은밀하게 시선을 교환한 뒤, 주신희가 속닥거렸다.

‘그런데 사귄 지 한참 됐는데 이제 첫 데이트면 너무 늦는 거 아니에요?’

‘멍청아! 대신 카페에서는 자주 만났잖아.’

‘너야말로 이 멍청이가! 카페에서 만나는 거하고 데이트는 다르거든?’

‘헉, 그럼 길드장님이 차이면 어떡하지? 나는 리을 누나 좋은데.’

“……얘들아, 다 들리거든.”

한이성이 양손으로 쌍둥이의 입을 턱 틀어막고는 황급히 말했다.

“하, 하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하지 않을 테니 잘 다녀오세요.”

그때 기유현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누구의 연락인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돌아서는 기유현의 모습을 보며 한이성은 생각에 잠겼다.

새삼 이렇게 보니 많이 변했다.

정체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는 기대로 반짝였고 입술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오래전, 한이성이 기유현을 처음 만났을 때 보고 싶었던 표정이었다.

* * *

나는 옷장을 열고 생각에 잠겼다.

“으음…….”

“뀨우우?”

옷장 앞에서 할 고민이란 하나뿐이다. 바로 오늘 대체 무엇을 입을 것인가.

바야흐로 봄이었다. 낮에는 따뜻하다 못해 더울 정도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 외투를 챙겨야 할까, 말아야 할까. 오늘 몇 시쯤 돌아오려나.

“으으으음…….”

“캬갸갸옭! 왜 그러느냐! 아무거나 입으면 될 거 아니냐.”

내가 계속 고민만 하고 있자 지루해졌는지 옆에서 미음이가 투덜거렸다.

그래, 고민한다고 옷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이 체크무늬 카디건이나 입자.

그런데 겨우 마음을 정하고 옷장에서 꺼낸 카디건은 고양이털로 엉망진창이었다. 어제 미음이가 웬 체크무늬 깔개를 깔고 있더라니, 그게 내 옷이었어?!

“미음아?”

“왜오옭. 내가 아니다.”

미음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잡아뗐지만, 그다지 신빙성은 없었다.

“그래? 오늘 간식 몰수.”

“냐, 냐아아…….”

그때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미음이랑 투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외투나 하나 걸친 뒤, 반성하는 척을 하는 우리 집 고양이를 내버려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현 씨, 안녕하세요. 헉…….”

“왜 그러세요?”

기유현은 편한 차림이었다. 봄을 맞이하여 한결 산뜻한 차림을 한 그는 정말이지…….

“……너무 멋져서요.”

“하하…….”

머쓱한 듯 웃음을 흘린 기유현이 손을 뻗었다. 내 머리에 붙은 미음이 털을 떼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리을 씨도 오늘 멋져요.”

기유현과 나의 연애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카페 리을>과 <청라 길드>를 오가며 만났다.

원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연애 상대로 만난 기유현은 정말 마음이 잘 맞고 멋진 상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잘생겼지, 다정하지, 가끔은 귀엽기까지 하지, 또……. 아무튼 완벽했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 어제,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사귀기로 한 이후로 계속 우리 가게나 <청라 길드>의 길드장실에서 만나지 않았나?

전에서는 어디서 만났더라. 길드, 카페, 길드, 카페, 카페, 길드, <헌터마켓>, 길드, 카페…….

…….

…….

아니, 그렇지만 바빴다고.

“리을 씨,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맞다, 저 곧 가게 준비를 하러 가 봐야겠어요.”

“……그래요.”

기유현이 내게서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의 그늘진 눈을 보는 순간, 강렬한 위기감이 몸을 엄습했다.

가만, 우리 아직 데이트한 적 없네?

오히려 사귀기 전에는 데이트 비슷한 일을 했었는데, 막상 사귀고 나서는 전무했다.

이대로라면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만나 주지 않았다고 차이는 결말밖에 없었다.

온갖 요란은 다 떨어 놓고서는 데이트도 한 번 하지 않고 결별이라니! 

머릿속에서 어두운 미래가 쫙 펼쳐졌다. <던전관리청> 등에서 기유현과 마주칠 때마다 수군거림이 엄청날 테다. 남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헐리우드식 쿨함을 가장하겠지. 그리고 후회물의 조연처럼 뒤늦게 후회하며 쓸쓸히 퇴장하는 거야…….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나는 가게로 돌아가려던 몸을 그대로 180도 돌려 기유현에게 다가갔다.

“어, 아까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유현 씨, 내일 시간 있어요?”

“시간이야 리을 씨가 말하면 언제든지 낼 수 있죠.”

“우리, 데이트해요!”

……이렇게 되어서, 사귀고도 한참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첫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기유현의 팔에 팔짱을 끼며 우리 집 동물들에게 말했다.

“그럼 갔다 올게. 아스한테 나 오늘 늦는다고 전해 줘.”

“왜오옭.”

“뀨우.”

이미 자기들끼리 노느라 바쁜 미음이와 라임이가 성의 없이 나를 배웅했다.

그리하여 대망의 첫 데이트를 위해 우리가 어디를 향했냐면…….

……바로 던전이다.

내 명예를 위해 분명히 밝히건대 본의가 아니다. 절대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첫 데이트니까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와 몇 번 갔던 제주도의 어느 해변은,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 일쑤라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밖에 흔한 데이트 장소인 영화관, 유원지 등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어디를 갈지 한참 고민하는 내게 기유현이 제안했다.

“인기척이 없는 곳이 좋으면 던전은 어떠세요?”

“네?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던전은 좀…….”

“최근에 열린 던전에서 새로운 허브가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허브요?”

“전에 허브티를 만들고 싶다고 했잖아요.”

기유현이 샘플이라며 허브 이파리를 건넸다. 냄새를 맡아 보니 민트와 비슷했다.

안 된다. S급 카페 주인의 삶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대망의 첫 데이트를 던전에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민트가 있으면 다양한 메뉴를 만들 수 있을 텐데…….

“리을 씨와 함께라면 저는 어디를 가든 좋아요.”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으로 예쁘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새로 발견된 던전.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던전은 고요하면서도 아늑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시내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이곳이 데이트하기 좋았다.

“와, 정말 멋진 곳이에요!”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나는 기유현과 손을 잡고 던전 안을 산책하다가, 민트가 잔뜩 자란 수풀 앞에 도착했다. 청량한 냄새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민트로 차나 에이드를 만들면 무척 깔끔한 맛이 나겠다.

좋아, 이왕 온 김에 잔뜩 뜯어 갈까.

그렇게 한참 민트 채취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으앗!”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기유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 주었다.

“리을 씨, 조심해야죠.”

“으……. 고마워요. 유현 씨 덕분에 살았어요.”

나는 그의 넓은 품에서 몸을 떨어뜨리려다가 멈칫했다. 지금은 데이트 중이고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다. 그러면 굳이 바로 떨어질 필요가 없지 않나? 조금만 더 이렇게 안겨 있을까.

내가 몸을 떼지 않고 그대로 안겨 있으니 그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 팔로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

대화가 끊긴 던전은 너무도 고요해서, 그의 심장 소리와 떨리는 숨소리마저도 잘 들렸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고, 천천히 키스를…….

……하려 했는데.

“으아아악?!”

“리을 씨, 조심하세요……!”

갑자기 발밑에 웬 게이트가 생겨났다. 기유현이 나를 붙잡고 스킬을 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게이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빨아들였다.

…….

…….

쏴아아, 쏴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게이트 너머는 어느 해변이었다. 뜨거운 햇볕과 푸른 하늘, 푸른 바다가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풍경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이런 해변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인간, 오랜만, 환영!”

설마 이 목소리는…….

“페페!”

이 독특한 말투를 잊어버릴 리가 없다. 크투가의 부하인 작은 불의 정령이 내 앞에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게이트는 크투가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구나. 오랜만에 페페의 모습을 보니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유현 씨는 어디 간 거지? 동시에 게이트를 통과했으니 분명 같은 곳으로 왔을 텐데.

“페페, 다른 사람은 못 봤어? 내 옆에 한 사람 더 없었어?”

페페는 대답 대신 근처의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 막 정신을 차린 기유현이 있었다.

“……유현 씨!”

“윽……. 리을 씨,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네, 저는 괜찮…….”

“인간, 초면, 누구.”

내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페페가 끼어들었다. 뜨거운 불꽃을 마구 뿜어 대는 모습이 기유현을 경계하는 듯했다.

“불법, 침입, 분노!”

아차. 전에 이곳에 왔을 때 기유현은 옆에 없었지. 그러니 페페가 그를 처음 보는구나. 페페가 기유현의 옷을 전부 태워 버리기 전에 다급히 외쳤다.

“아, 아, 아, 안 돼! 페페! 이 사람은 그러니까…….”

“대답, 궁금, 누구.”

“……그러니까?”

아니, 유현 씨는 왜 기대하는 표정으로 보는 건데요.

“나랑 사귀는 사람이야. 그……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화내지 마, 페페.”

활활 타오르던 페페의 불꽃이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페페는 나와 기유현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박수를 쳤다.

“커플, 축하, 축하!”

“하하……. 고마워.”

“커플, 환영, 연회!”

페페는 다른 불의 정령들을 불러 모으더니 연회 준비를 하겠다며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화르르, 커다란 불꽃이 타오르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손녀여, 오랜만이구나!”

“어제도 제가 불러서 오븐 고쳐 주고 가셨잖아요.”

“흐음, 저 인간은 누구냐? 제법 강한 힘이 느껴지는군.”

“그게, 하하…….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페페가 접시에 산더미같이 굴 구이를 쌓아 놓고 우리를 불렀다. 자연스럽게 이 불꽃의 정령들과 파티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는 실패로 끝나는구나…….

나는 내 옆에 앉은 기유현에게 귓속말을 했다.

“미안해요. 데이트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네요.”

“아니요. 전에도 말했지만, 리을 씨와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어디든 좋으니까요.”

“……고마워요.”

“돌아가면 아까 그 게이트를 안정화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겁니다.”

“유현 씨…….”

어떡하지. 진짜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크투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짧은 물음을 던졌다.

“손녀여, 지금 행복하느냐.”

나는 고개를 돌려 기유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위로 몰려든 불꽃의 정령들과 놀아 주는 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제까지 겪은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싫은 일도 좋은 일도 있었지.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하고 다다른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나는 다시 크투가를 보았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초월자를 마주하자, 거짓 한 점 없는 대답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네, 행복해요. 진심으로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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