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화 (2/862)

2화. 회중시계의 초대 (2)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

연우는 재빨리 회중시계를 살폈다.

혹시 동생이 남긴 다른 흔적이 없을까, 다른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털썩.

연우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말없이 회중시계를 매만지기를 여러 차례.

곳곳에 남은 흠집. 빠진 분침. 낡은 흔적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녀석이 ‘저쪽’에서 겪었을 일들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연우는 천천히 태엽을 도로 반대로 감았다.

찰칵.

언젠가 이 일기를 들을 형에게. 만약 형이 이 일기를 들을 때쯤이라면…….

녀석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다시 들렸다.

연우는 다 듣고 난 뒤, 다시 감았다.

언젠가 이 일기를…….

연우는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회중시계를 되감았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동생의 목소리가 똑같이 들렸다.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어조. 똑같은 일기장.

[계승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때 연우 망막 아래에 자그마한 창이 떠올랐다.

인터페이스 시스템.

이면 세계에 있는 탑과의 연결이 성공했단 뜻이었다.

그리고.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쏴아아!

아랫배 안쪽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마치 뱀 한 마리가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느낌.

상쾌하면서도 이질적인 씨앗 같은 것.

마나.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기초 요소. 그리고 탑과 그쪽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루는 힘이기도 했다.

쾅!

단단히 응집했던 마나가 폭발했다.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몸 곳곳으로 퍼졌다.

체내에서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콰드득. 콰득.

사지가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발기발기 찢어지는 격통이 뒤따랐다.

몸이 샅샅이 분해되고, 그 속을 바늘로 마구 찌르는 것 같았다.

군사 훈련을 받을 때에 고문을 견디는 훈련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연우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제자리에 앉은 채, 회중시계의 태엽만 계속 감으면서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 이 일기를…….

골격이 뒤틀렸다. 뼈마디와 뼈마디가 새로 자리를 갖추고, 근육이 흐물흐물해졌다가 다시 단단해졌다. 찢긴 피부 사이로 검은 진물이 나와 악취가 났다.

체내에 있던 노폐물을 모두 배출하고, 근육과 골격이 알아서 제자리를 새로 찾았다.

뚜두둑. 뚜둑.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동생이 5년 동안 했던 고생에 비하면 이깟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작업이 완료되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계승 작업이 불완전하게 끝났습니다. 현재 작업량: 5%]

[계승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육체를 필요로 합니다. 육체를 완성시켜 계승 작업을 완료하십시오. 육체가 성장할수록 받아들일 수 있는 작업의 양도 같이 늘어납니다.]

[현재 상태는 ‘불완전한 용체(龍體)’입니다.]

[육체적인 능력이 일부 향상되었습니다.]

[특성을 깨달았습니다.]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등록은 오벨리스크에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연우는 이상한 목소리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끔찍한 고통이 있고 난 뒤, 진한 여운이 남았다.

“…….”

그런데도 연우의 시선은 한참 동안 회중시계에서 떠나질 못했다.

언젠가 이 일기를 들을 형에게…….

* * *

회중시계의 태엽을 몇 번이고 감는 동안.

연우는 일기장과 함께 녀석이 남긴 기억들도 똑같이 받아들였다.

동생이 탑을 오르는 5년의 세월.

동료들을 만나 클랜 아르티야를 만드는 모습. 어려운 공략에 성공해 다들 기뻐하는 모습. 전쟁을 치르며 등을 맞댄 모습.

피를 흠뻑 뒤집어써 지쳐 있는 모습. 사랑하는 연인과 첫 입맞춤을 하는 모습…… 배신당해 오열을 터뜨리는 모습.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적들을 향해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까지.

하나하나씩 쏙쏙 박히며 동생이 느꼈을 기쁨과 슬픔, 그리고 온갖 감정들이같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연우는 동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장면들이 끝났을 때.

“…….”

[플레이어: 차연우]

특성: 냉혈

힘: 10 민첩: 15 체력: 12 마력: 21

스킬: 용마안. 감각 강화. 시간 예지.

연우는 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바로 앞에 홀로그램처럼 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진짜였구나. 전부 다.’

아니길 바랐었는데. 차라리 꿈이나 환상이길 바랐는데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연우의 눈매가 깊어졌다.

동생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누가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왜 동생이 5년 만에 이런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99개의 층계를 통과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탑.

하지만 연우가 봤을 때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무법지대에 불과했다.

동생은 그런 곳에 사는 아귀들에게 물어뜯긴 거였다.

그렇다면.

‘돌려줘야겠지.’

그곳의 법칙에 따라서.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이미 동생의 능력은 연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플레이어. 탑을 오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연우의 두 눈에서 슬픈 감정이 사라지고.

“…….”

어느덧 싸늘한 분노만 남아 있었다.

* * *

연우는 가만히 투명한 창을 들여다봤다.

“이게 ‘상태창’이라는 건가?”

상태창은 크게 3가지 항목으로 분류되었다.

특성, 능력치, 스킬.

특성 항목은 플레이어의 성격이나 재능을 의미했다.

동생이 처음 얻은 특성은 ‘만통(萬通)’, 만물과 소통하는 능력이라고 했었다.

덕분에 어떤 물건이나 스킬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감응 능력을 이용해 많은 위험을 돌파했다고 했다.

그 외에 능력치는 플레이어가 가진 능력의 계수를.

스킬은 플레이어가 탑에서 쓸 수 있는 정형화된 기술을 뜻했다.

‘꼭 게임 같아.’

동생은 오벨리스크를 두고 ‘게임 같지만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재 내가 가진 특성은 냉혈.’

[특성: 냉혈]

어떤 상황에서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한다. 마인드 컨트롤 계통의 저주나 세뇌에 뛰어난 면역력을 자랑한다.

연우가 원래 자체적으로 갖고 있던 재능이었다.

아마 직업 군인으로서 이런저런 훈련을 받다 보니 생긴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전장을 지휘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게 하는 힘.

‘나쁘지 않아.’

아니, 이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좋았다.

온갖 해괴하고 다양한 마법과 스킬이 가득한 세상에서 몸을 돌볼 수 있는 카드가 있다는 건 중요했으니까.

‘다만, 능력치가 아직 많이 약해.’

플레이어로서 각성을 완료하고, 체질이 거기에 맞게 바뀌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평균적으로 대부분 20도 안 되는 능력치들.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탑을 오르기엔 한없이 미약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럴 법도 했다.

마나를 다루는 법은 알지도 못하고, 이렇다 할 기술도 없었다. 스킬이란 건 개념조차 아직 제대로 머릿속에 잡히질 않았으니까.

믿을 수 있는 건 전장을 누비면서 얻은 본능적인 감각뿐.

스킬 항목도 마찬가지.

[용마안(龍魔眼)]

용의 눈. 진리를 꿰뚫는다. 타인과 사물이 가진 능력도 일부 엿볼 수 있다.

[감각 강화]

오감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시간 예지] (특수)

일정 시간의 앞을 내다볼 수 있다.

용마안은 동생이 그에게 태엽시계를 통해 계승 작업을 하면서 유일하게 남긴 흔적이었다.

‘정우는 11층에서 우연히 고룡(古龍) 칼라투스와 계약을 할 수 있었다고 했지. 그 흔적인가?’

본래 용종(龍種)이란 오만하고 포악하면서도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들.

그들의 특성에 일부 노출되면서 진리를 엿보는 눈을 갖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그로서도 미지수였다.

‘감각 강화는 내 특성에 맞춰서 나온 것 같고.’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다섯 가지 감각의 강약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연우는 이 스킬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전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적들을 찾아야하는 수도 있고,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할 수도 있다. 멀리서 떨어진 적의 발걸음 소리를 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감각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탑을 오를 때 충분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이건데.’

연우는 마지막 스킬에 시선이 못 박혔다.

‘시간 예지, 라.’

연우는 손에 쥐고 있는 회중시계를 살폈다.

‘이거 때문이겠지?’

스킬은 플레이어의 특성에 맞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플레이어의 환경이나 소중한 물품을 통해서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특수’라는 단어가 붙는 건 고유 스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 일단은 해 보자.’

연우는 호흡을 크게 골랐다.

자신은 분명 동생의 도움으로 다른 플레이어보다 더 잘 마련된 발판에서 시작하는 거였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었다.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들은 탑에서도 순위에 꼽히는 강자들.

적게는 수년, 많게는 수백 년까지도 살면서 강해지고 또 강해진 녀석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잡으려면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다.

사진 속 동생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너는 그냥 내가 엘릭서만 찾고 조용히 살아가길 바란 것 같지만.’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핏대가 잔뜩 섰다.

‘난 그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 * *

연우는 신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봐, 차 중사!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전역 신청이라니?]

휴대폰 너머에서 부대장이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죽었다는 말에 마음 정리를 하라고 기껏 한국에 보내 놨더니 다짜고짜 전역 신청을 해 버렸으니. 만약 연우라고 해도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이렇다 할 변명도 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면 불만이라도 있었어? 그런 게 있다면 나한테 말해. ‘카인’이 여기서 빠져 버리면 어떻게 하……!]

“죄송합니다.”

연우는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전원을 강제 종료시키고, 길거리 쓰레기통에다 던졌다.

자신을 아들처럼 아껴 줬던 부대장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단호하게 끊어야만 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집도 부동산에 내놨다.

파병 간 뒤로 원래 쓰지 않던 집이었지만 더 이상 놔둘 이유가 없었다.

돌아올 장소를 두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남은 돈으로 여러 가지를 샀다.

새로 구매한 백팩에다가 기본 옷 몇 가지와 전투 식량을 최대한 집어 넣고, 부대에서 쓰던 것과 동일한 대검 수십 자루, 그리고 응급 키트 등 서바이벌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마음 같아서는 암시장에서 총화기나 폭탄류도 챙기고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탑은 플레이어의 기량을 시험하려고 만든 곳이다. 그런 건 오히려 피하는 게 좋아. 게다가 탄창을 지속적으로 보급할 수 없다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연우는 깊은 새벽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나왔다.

검은 후드티에 청바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오른쪽 어깨에 짐이 가득 실린 백팩을 짊어졌다. 이미 나오기 전에 입었던 군복이며 가방은 모두 태운 뒤였다.

‘현실과 오벨리스크 간의 시간차를 고려한다면, 지금은 회차가 시작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인가?’

탑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한 곳에 다다라야만 했다.

튜토리얼.

탑으로 입성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들의 자격을 시험하는 곳.

그런 곳에 일주일이나 늦게 입성한다는 건, 불리한 스타트밖에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굳이 이 시기를 고집했다.

‘늦게 스타트를 한 플레이어에게는 그만한 어드밴티지가 주어진다. 앞서 달리는 선두 주자를 따라잡으면 따라잡을수록 더 많은 점수를 쌓을 수 있고, 후발 주자에게만 주어지는 히든 피스도 있어. 그리고.’

연우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그 놈’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쯤일 테니까.”

연우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차근차근히 정리하면서.

딸칵. 동생이 남긴 회중시계의 태엽을 반대로 감아 눌렀다.

그러자 공원 한가운데에 빛무리가 번지면서 그림자가 위로 불쑥 올라왔다.

그림자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멍울이 맺혔다.

문(門).

탑이 있는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게이트였다.

연우는 일절 망설임 없이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오늘부터 난.’

이 너머에 있을 놈들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리라.

너희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를.

‘차정우다.’

그리고 게이트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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