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9화 (9/862)

9화. 튜토리얼 (7)

연우는 청년을 빤히 쳐다봤다.

그게 뭐 잘못되었느냐는 눈빛.

청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장소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청년의 눈가에 단단한 결심이 어렸다.

“좋아. 도와줄게. 뭘 어떻게 하면 되지?”

* * *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율’이라고 밝혔다.

“율?”

“응. 율. 다들 그렇게 불러.”

연우는 녀석이 가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면 바로 헤어질 사이였으니까.

“좋아. 율. 우선 내가 길을 열 테니까 바로 뒤쫓아 와라. 뒤처지면 그냥 놓고 간다.”

“알았어.”

“그리고.”

“응?”

“존댓말 쓰도록. 나는 아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아.”

“…….”

율은 이미 나이도 들킨 마당에 더 이상 센 척하는 게 필요 없다고 여겨졌는지 ‘알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고집이 센 건 원래의 성격이었는지 약한 모습은 끝까지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연우는 용마안의 결과 감각이 내놓는 길을 따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구리 인형이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연우와 똑같은 자세를 구사하면서 공격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연우는 옆으로 밀어 내는 것과 동시에 결에다 대검을 세게 박아 넣었다.

콰앙!

쾅!

연우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구리 인형의 팔다리 중 한두 개는 꼭 허공으로 튀었다.

간혹가다가 부서진 머리 조각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다.

여태껏 속도전에 치중했다면, 지금은 정면에서 부딪쳐 구리 인형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훈련을 대신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근력에 부쩍 힘이 실리면서 감각의 새로운 용도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율은 그런 연우의 뒤를 따르는 내내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평범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괴물 같았던 구리 인형이 족족 터져 나가니.

여태 자신들이 상대했던 것과 같은 게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연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눈치를 줬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눈빛.

율은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리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원래 선천적으로 마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연우는 잠시 걷다 말고 눈살을 좁혔다.

“혹시 혈계(血系) 쪽 능력인가?”

“비슷해요.”

지구에는 거의 없었지만, 다른 세상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유전 인자 속에 이능(異能)이나 초능(超能)의 인자가 새겨진 경우가.

이들은 보통 위대한 조상을 두고, 그들의 능력을 대대로 혈통을 따라 후손에게 물려준다.

그럼 후손은 특별한 시기에 능력을 개화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 위업을 떨치며, 다시 자신의 자손에게 물려주는 식이었다.

율도 그런 경우라고 했다.

“제가 물려받은 능력은 마력을 느끼고 보고 맛보는 등, 친화력에 가까운 편입니다. 그래서 구리 인형이 센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던 거고요.”

연우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정우와, 비슷한 케이스인가?’

동생이 가졌던 특성, 만통(萬通).

모든 것이 통한다는 건 마나와도 통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동생은 지구 출신이 흔히 겪는 어려움과 다르게 마나를 느끼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원래 잃었던 소중한 물건을 되찾았던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기까지 했다.

주변 동료들이 그걸 보고 경악을 해 댔다고 했으니까.

고룡 칼라투스의 선택을 받은 것도 바로 전부 그런 특징들 덕분이었다.

만물과 소통을 하니,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인간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용종(龍種)의 능력을 이어 받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동생이 일기장에 남겨 놓은 마력에 대한 기술(記述)은 연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뜬구름을 잡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율도 마찬가지.

혈계를 통한 능력 전승이나, 특성을 이용한 능력 각성이나, 연우의 입장에서는 똑같았다.

‘따지자면, 사실 두 사람은 천재에 분류되는 과.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연우는 어쩌면 율과의 거래가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서 율이 던진 한 마디가 연우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마나는 일종의 강이라고 보면 됩니다. 마력은 그런 강에서 논두렁이나 저수지로 끌어온 물이고요.”

연우가 작게 되뇌었다.

“저수지라고?”

뭔가 알 듯 말 듯하게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그 사이.

연우는 어느덧 마지막 남은 구리 인형을 처치하고, B구역으로 향하는 철문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A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그래도 다행히 팀플레이로 인식되지 않았군.’

연우는 한가득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구리 인형을 처치하는 내내 율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결했기 때문인지 인터페이스 시스템은 모든 걸 연우의 공적으로 표기했다.

‘800포인트라.’

탑에서는 공적치의 개념이 아주 중요했다.

공적치(Karma).

플레이어가 이루는 성취나 업적에 따라 주어지는 점수 체계.

탑과 관리자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보상을 제공하기도 하고,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화폐처럼 사용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게 가능했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최대한 많이 쌓아야 할 포인트(Point)였다.

그런 것을 A구획을 통과했을 뿐인데 벌써 이만큼이나 쌓았다.

남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테지.

‘아직 이걸로는 부족해. 더 많이 쌓아야 한다. 최대한 많이.’

연우는 공적치를 표기한 창을 끄고, B구획의 대기실로 발을 들였다.

상쾌한 바람이 폐 속으로 들어갔다.

“무, 뭐야, 저 사람? 저 가면은 또 뭐고?”

“지금 막 A구획을 통과한 거 맞지?”

“뭐? 지금 이런 시기에?”

“잠깐.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디 있지? 혹시 저 한 사람뿐이야?”

먼지가 착 내려앉은 자리.

철문 너머에는 열댓 명가량의 사람들이 놀란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튜토리얼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데도 통과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통 이때쯤 되면 다음 회차를 노리지, 도중에 뛰어드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더 경악케 한 건 철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딱 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설마 그 살벌한 A구획을 혼자서 통과하기라도 한 것일까?

“뭐하는 거냐, 안 들어오고?”

그때 연우가 뒤쪽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율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철문을 건넜다. 살짝 떨리는 입술로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나왔어…….”

갖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목소리였다.

[B구획에 입장했습니다.]

B구획의 대기실은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다.

돔의 형태를 띤 광장은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넓었다.

사람도 많았고, 저마다 하고 있는 일들도 전부 제각각이었다.

숫돌로 칼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준비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늘어져라 잠을 자고 있거나, 팔다리가 잘려 병색이 짙은 환자들도 있었다.

율을 제외하면, 이쪽으로 넘어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하지만 연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을 모두 무시했다.

‘어차피 낙오자들에 불과할 테니까.’

살벌하기 짝이 없는 A구획을 겨우 겨우 통과한 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자들.

그들은 모두 더 이상의 도전을 멈추고 튜토리얼이 약속한 30일의 기한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튜토리얼은 ‘사용 지침서’라는 뜻과 다르게 자칫 한 눈이라도 판다면 바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위험한 곳이었다.

B구획의 대기실에는 그런 위험을 겨우겨우 뚫고 나와 의지가 꺾여 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눈앞에서 동료를 잃고, 연인을 잃고, 죽음을 눈앞에 두면서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나도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튜토리얼은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월등하게 높아진다.

당연히 낙오자들도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을 썼다가는 정신만 사나울 뿐이었다.

연우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근처에 사람이 없는 평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는 율을 불렀다.

“율.”

“예? 예!”

녀석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연우를 돌아봤다.

“마저 하던 이야기부터 끝내지.”

“아, 예!”

율은 다시 그쪽을 째려보고, 재빨리 연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맞은 편에 앉았다.

연우는 율이 보던 곳을 슬쩍 봤다.

네 명 정도 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 녀석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팀원들인가?”

“이‘었’죠. 지금은 저와 관계없는 자들입니다.”

율의 표정은 싸늘했다.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버려두고 떠난 자들.

분노를 드러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율은 녀석들과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다.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쓰레기와 계속 엮여 봤자 좋을 게 전혀 없을 테니까.

연우는 그런 율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원한과 만용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냉정하게 그 경계선을 볼 줄 안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죠?”

“마나 스트림(Mana Stream)인지 뭔지 하는 것.”

“아, 그건 말입니다.”

의외로 율은 마력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이론에 대해서 빠삭했다.

보통 마법적 능력을 타고난 일족들은 이론에 대해서 약한 경우가 많았지만, 율은 가문의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렸을 때부터 이론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야만 했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연우는 마력과 마나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었다.

여전히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틀이 잡히니 정우가 일기장에 기록했던 것들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예?”

“마력이 어떤 것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쓸 수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쉽게 다룰 수 있는 법. 아니, 느낄 수 있는 법은 뭐지?”

“음. 그게.”

율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쾌하다는 느낌? 사실 저는 원래 처음부터 다룰 수 있었던 거라, 어떻게 설명 드리기가 어렵네요.”

“그런가. 뭐, 어쩔 수 없지.”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과 비슷한 케이스라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건 해소했으니까.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거래 내용도 어차피 지나가던 길에 같이 데리고 나온다는 것뿐이었으니 딱히 손해도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너는 이대로 튜토리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갈 생각이겠지?”

“예? 아, 예.”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연우를 보면서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곧 가만히 끄덕였다.

어차피 탑으로 가고 싶다고 해도, 튜토리얼 내에서도 순위권에 든 사람들만 탑에 입성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율은 넘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율은 조금 미련이 남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뒤로 돌아섰다.

이제야 겨우 A구획을 통과했을 뿐이었다. F구획까지는 아직도 6개가 남아 있으니, 시간을 지체한 만큼 선두와의 간격을 빠르게 좁힐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연우가 자리를 뜨려는 찰나.

갑자기 이쪽으로 4명의 플레이어들이 다가왔다.

율을 버렸던 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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