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0화 (10/862)

10화. 튜토리얼 (8)

“율.”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 중에 리더로 보이는 사내였다.

건장한 체구에 잘생긴 인상. 허리춤에 커다란 검을 달고 다니는 검사였다.

율은 그들을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뭐야? 아직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남았나?”

“어떻게…….”

“어떻게 나왔는지 너희들이 알 건 없잖아?”

“…….”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두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별 필요 없다고 여겨서 보스룸 한가운데에 버리고 온 팀원이 살아서 돌아왔다.

이걸 두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율은 그들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살의까지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해도, 이곳은 힘이 전부인 세계.

율에게는 당장 이들에게 복수할 힘이 없었다.

그냥 무시하는 게 정답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꺼져. 어차피 너희들도 내가 보기 껄끄러울 테고, 나도 너희들 보기가 역겨우니까.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모른 척하자고. 알다시피 어차피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할 만한 힘은 없잖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네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도저히 율의 옆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끼리 서로 간에 눈치를 보기 바빴다.

“대체 뭐하는 거야, 너희들?”

율도 더 이상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인상을 팍 하고 찡그렸다.

결국 남은 세 사람의 눈총을 받은 리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갑자기 허리를 팍 숙였다.

“지난 일, 어떻게든 사과하마.”

율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뭐하는 개수작이야?”

“대신에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부탁?”

“이번에 있었던 일, 제발 비밀로 해 다오.”

“뭐?”

“우리는 조만간에…… 아니. 자세한 건, 어떻게 말해 주긴 힘들지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어디 가서 이야기는 하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남은 세 사람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야.”

“율, 부탁할게.”

“제발. 이전까지 있었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허리를 반듯하게 숙인 이들을 보고 있자니 당시의 일이 아직도 떠오르는 것 같았다.

며칠에 걸쳐 겨우겨우 통과해야만 했던 보스룸.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미끼로 내쳐진 자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울부짖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길을 떠나던 녀석들.

처음 A구획의 대기실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괜찮은 동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모두 예의 발랐고, 실력도 제법 좋았다.

탑이 위험한 세계라고 누누이 가문의 어른들로부터 경고를 받았었다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고 여기게 해 줬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썩 꺼져. 더 이상 너희들 면상 따위 더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면서 율은 홱 하고 등을 돌렸다.

리더는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율을 놔둬서는 모처럼 잡은 기회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려.’

리더, 카엔은 생각이 복잡했다.

처음 A구획을 빠져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구리 인형의 발목을 잡기 위해 율을 미끼로 던졌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만 여겼다.

무엇보다 율이 가진 능력은 단순히 마력의 흐름을 읽는 것.

공략에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빠진다고 해도 팀의 전력에 크게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도리어 율의 희생을 발판 삼아 위험에 처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카엔은 동료들을 이끌고 곧장 B구획의 대기실에 있던 한 사람을 찾았다.

빌드.

처음 튜토리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들을 스카웃하려 했던 플레이어였다.

“우리는 아랑단이라고 한다. 너희들,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들어. 보통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놈들은 뭔가 일을 일으켜도 크게 일으키거든. 우리와 함께 하자. B구획 대기실에 있을 테니, 생각이 있거든 언제든 찾아와.”

처음에는 뭔 이런 이상한 놈이 다 있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뒤늦게 알았다.

아랑단이 얼마나 큰 이름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들은 오랫동안 튜토리얼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최고의 조직이었다.

듣자 하니 탑과도 어느 정도 연계가 되어 있다던가.

아랑단은 튜토리얼 내에 벌어지는 혼란을 막고자 결성된 자경단 같은 존재들이었다.

오로지 플레이어들이 실력으로만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고, 그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협잡과 속임수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단원을 뽑는 것도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편이었다.

자원한 사람이 나쁜 행각을 벌이지는 않았는지.

평범한 사람을 겁박하거나 강탈을 시도하지는 않았는지.

모든 걸 세세하고 꼼꼼하게 따졌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카엔과 일행으로서는 율의 갑작스러운 생환이 날벼락 같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이 녀석이 어디서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빌드와 만나기로 한 것은 오늘 저녁쯤이었다.

이미 카엔 일행은 율이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해서 그들을 구했다고 말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서 훼방을 놓는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아랑단은 탑 내 거대 길드의 직속이라는 소문이 있어. 여기서 눈 밖에 났다가는 정말 큰일 나.’

그런 소문이 있었다.

아랑단은 탑 내 어떤 클랜이 클랜원을 선발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곳이라는 소문.

카엔으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율은 전혀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도리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등까지 돌렸으니.

‘차라리.’

그러다 카엔은 이를 악물었다. 두 눈에 잔뜩 독기가 어렸다.

한 번 버리는 게 어려울 뿐. 두 번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엔은 슬쩍 다른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쪽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가려 달란 뜻이었다.

다행히 워낙 구석진 위치라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신을 치우는 건 쉽다. 어차피 빌드도 율의 얼굴은 모르고 있으니. 그냥 보스룸에서의 피해로 죽은 변사체라고 위장하면 그만이야.’

동료들은 당혹해하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카엔이 계속 눈치를 주자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카엔은 조심스럽게 검의 손잡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빠르게 일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튜토리얼 내에는 아랑단이라는 청화도(靑花島)의 직속 조직이 있어서, 그곳에서 뉴비들을 선발한다고 하지. 하지만 청화도는 참 까탈스러운 놈들이라, 먼지 묻는 걸 아주 껄끄러워 한다더군. 정작 자신들은 그러질 못하면서.”

“무슨…… 크아악!”

카엔은 갑자기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쪽으로 검을 뽑으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고통이 팔을 타고 찌르르 울렸다.

자신의 오른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피를 콸콸 쏟으면서.

“내 손! 내 소오온!”

카엔이 오른 손목을 붙잡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율도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확 하고 뒤돌아봤다.

다른 동료들도 당혹감에 젖은 눈빛으로 칼을 뽑아 뒤쪽으로 겨누었다.

그곳에, 연우가 서 있었다.

대검에 묻은 핏물을 가볍게 털어 내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노릴 정도의 독기가 있다면, 당연히 손모가지 하나쯤 날아갈 건 각오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 * *

가면 아래.

연우는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이딴 것에나 신경 써야 하다니. 기분 더러워.’

원래대로라면 그냥 무시하고 B구획으로 바로 넘어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땅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율의 모습이 눈가에 아른거린 탓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한 율의 모습이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배신, 이라.’

율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지고 말았다.

동료들에게 등에 칼이 꽂혀야만 했던 동생.

율도 같은 처지였다. 그리고 한 번 배신했던 녀석들이 다시 율을 찾아 가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보통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

연우는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놈들이 어떻게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건데.

참 더러운 꼴을 보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흐르는 물에 당장 눈이라도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손! 내 소오온! 이 새끼! 너 이 새끼! 감히 내 손으으을!”

카엔은 잘려 나간 오른손을 붙잡으면서 울부짖다가 곧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흉흉한 눈빛으로 연우를 잔뜩 노려봤다.

“죽여 버리겠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칼을 연우에게로 겨누었다.

하지만 섣불리 달려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카엔의 손목이 날아갈 때까지. 분명 그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연우가 율을 구해 준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움을 준 사람으로만 여겼다.

아니, 율을 도와준다고 해도 연우 하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연우는 그런 놈들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너희들 주제에?”

“이 새끼가, 진짜!”

카엔은 두 눈이 뒤집힌 채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왼손으로 칼을 뽑아 연우의 목 쪽으로 휘둘렀다.

“카엔!”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 그를 불렀다.

연우의 실력이 아직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여기서 부딪쳤다가는 자칫 정말 아랑단으로의 가입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엔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똑같이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뿐.

연우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대체 이런 놈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자신이 다른 사람의 등에 칼을 꽂는 건 되어도, 자신이 당하는 건 참지 못하는 놈들.

정말이지, 기분이 나빴다.

팟!

연우는 머리를 노려 오는 칼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팔을 불쑥 뻗어 녀석의 겨드랑이를 감았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가볍게 뒤로 젖혔다.

우드득.

기괴한 각도로 왼팔이 돌아갔다.

“크아악!”

녀석이 울부짖든 말든.

연우는 팔이 꺾인 그대로 제비 돌기를 해서 녀석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마치 고양이처럼 기민한 동작.

그러고 나서 발을 세게 굴려 놈의 어깨를 마저 부러뜨렸다.

콰드드득!

“아악! 아아악!”

“카엔!”

“너, 너 이 새끼!”

“그거 안 놔!”

챙그랑.

칼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엔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지면에 찍었다.

하지만 녀석의 동료들은 여전히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워낙에 연우가 날쌘 데다가, 연우는 카엔의 등 위에 올라 타 있었다.

기괴하게 꺾인 왼팔을 뽑아 버릴 듯이 더 크게 돌리면서, 목과 척추가 연결되는 경추 부위를 발로 지그시 밟았다.

이 이상 접근한다면 바로 부숴 버리겠다고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크으윽……!”

카엔의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다.

“더 덤벼 봐. 아예 이놈을 두 번 다시는 걷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가면 아래.

연우의 두 눈이 차갑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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