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튜토리얼 (9)
연우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카엔의 동료들은 몸이 쭈뼛 굳고 말았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어, 어째서냐! 너는 이놈과 아,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 그, 그런데 왜 끼어드는 거야!”
한 녀석이 겨우 용기를 갖고 소리를 질렀다.
튜토리얼 내에서, 플레이어들 사이의 일은 서로 웬만하면 개입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서로가 가진 입장 차이라는 게 있고, 분란의 이유도 제각각이었으니까.
그리고 타인의 개입을 싫어하는 건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플레이어들 모두가 가진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연우가 이 일에 개입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딱 잘라 말했다.
“기분 나빠서.”
“무, 뭐?”
“기분 나빠서 그런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
“……!”
연우가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너희들도 너희들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지.”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폭거라고.
하지만 가면을 뚫고 치솟는 안광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더 달려들었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은 예감.
연우가 말했다.
“무기 버려.”
“…….”
“…….”
우드득.
“크으으윽!”
“버려.”
“버려! 버리라고! 제바알!”
결국 카엔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세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쨍그랑.
“이, 이제, 카, 카엔을 놔줘.”
한 녀석이 연우의 눈치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피식.
“병신들.”
연우가 비웃음을 던지더니 발에 잔뜩 힘을 줘서 카엔의 경추를 완전히 부러뜨렸다.
쿵!
카엔의 두 눈이 회까닥 뒤집어지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야, 약속과 다르…… 켁!”
한 녀석이 사색이 되어 소리치다 말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느새 연우가 자신에게로 대검을 던진 것이다.
녀석은 얼결에 대검을 위로 쳐 냈다.
하지만 그사이 연우가 앞까지 날아와 손날로 목젖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몸을 안쪽으로 바짝 붙이면서 순서대로 팔꿈치로 가슴팍을, 무릎으로 명치를, 주먹으로 복부를 두들겼다.
쾅! 쾅!
콰드득. 콰드득.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모조리 박살 났다. 턱이 으스러지고, 부러진 이 조각 서너 개가 밖으로 튀었다.
주르륵.
결국 녀석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입가로 숨만 겨우 헐떡였다. 언제 완전히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뒤져엇!”
“죽으라고!”
그때 연우 뒤쪽으로 남은 두 녀석이 불쑥 나타나 각각 목과 허리 쪽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들에게는 발악밖에 남지 않았다.
동료 두 사람이 어떻게 손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도망치는 건 이미 글렀으니 어떻게든 저항이라도 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연우는 지면에 바짝 몸을 낮춰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대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스걱! 스걱!
“으, 으아아악!”
“아아악! 내 바아알!”
동시에 아킬레스건과 동맥이 끊어져 버린 두 놈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퍽! 퍽!
날아든 주먹에 두 머리가 뒤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쿠르륵.
입가에 피 섞인 게거품이 가득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율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
얄미웠어도, 어떻게든 자력으로 A구획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한둘도 아니라 네 명이나 단번에 박살 내버릴 줄이야.
연우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압도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네 사람은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당장 고급 신관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거나, 최고급 포션을 마시면 또 모를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뒈지거나, 평생 사지도 제대로 못 움직이는 병신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아마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율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놈들이 죽은 것보다, 평생 저런 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통쾌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연우는 가볍게 산책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고 아무렇게나 허리춤에 꽂아 넣으면서 뒤돌아봤다.
“침 떨어진다.”
율은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입 주변을 문질렀다.
피식.
순간, 연우가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들었다.
여태껏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무뚝뚝한 눈동자를 하고 있어서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비웃는 소리는 몇 번 들었지만, 이렇게 웃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홱 하고 몸을 반대로 돌리고 있었다.
“잘 지내라. 앞으로 사람 조심하고.”
“어, 어, 저……!”
율은 엉겁결에 연우를 붙잡았다.
하지만 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만 갈 뿐이었다.
그래서 율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고, 고마워요! 형! 언젠가 저도 꼭 형처럼! 형처럼 될게요!”
율은 생각했다.
약한 자신을 벗어 버리고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때.
연우는 잠시 걷다 말고,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렸다.
율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잠시 움찔거렸다.
“프레지아의 화원으로 가 봐라.”
“예?”
“너에게 꽤 도움이 될 테니까.”
연우는 그냥 그 말만 남기고 별다른 말없이 손만 흔들고 사라졌다.
율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무슨 뜻인지를 알아채고 주먹을 꽉 쥐었다.
‘프레지아의 화원, 이라고 했지?’
무언가를 다짐한 듯, 그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오! 저것 봐라?”
낙오자들이 뭉쳐 있는 곳.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늘어져라 하품을 해 대던 남자가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더벅머리에 촌스러운 복장, 흐리멍덩한 눈빛.
어딜 봐도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건만.
언제부턴가 문가 쪽을 발견한 뒤로 그의 눈빛이 확 바뀌어 있었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악동의 시선이었다.
“야야. 그만 좀 자고 일어나 봐.”
“으하아암! 또 왜 그래? 잠도 못 자게.”
더벅머리 청년은 옆에서 뒤척거리던 소년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그러자 앳된 인상의 소년이 눈가를 비비적대면서 일어나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부스스한 머리. 졸린 눈빛.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탄성이 나올 만큼 고운 얼굴이었다.
만약 살짝 튀어나온 목젖이 아니었다면 여자라고 해도 믿었을 인상.
“아까 봤냐?”
“뭘?”
“그, 아랑단에 곧 가입될 거라고 어깨 으쓱대던 놈들. 당했는데?”
으하암. 소년은 늘어져라 하품까지 했다.
“그게 뭐 어때서?”
눈치도 없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을 때부터 예상했던 거잖아. 언젠가 임자 만나서 실컷 두들겨 맞을 줄 알았지. 별것 아닌 놈들이기도 했고
소년은 그렇게 말을 덧붙이려다가, 더벅머리 청년이 덧붙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자서 두들겨 팼는데?”
“응?”
졸린 눈빛이 번뜩 뜨였다.
“혼자서?”
“어. 그것도 A구획, 솔로 플레이로 통과한 거 같더라.”
소년은 ‘오’하고 가볍게 탄성을 터뜨리면서 A구획으로 이어지는 문 쪽을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남자들도 가슴을 벌렁대게 만들 만큼 귀여운 미소였다.
“진짜? 이런 시기에? 대단하네에.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카엔인가 뭔가 하는 놈은 제법이었잖아.”
그러다 귀엽게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랑단을 했다며. 그럼 이제 청화 놈들이 지랄해 대겠네?”
더벅머리 청년이 음흉하게 웃었다.
“정확하게는 희망자였지. 흐흐흐. 그래도 말이다. 별 기대도 안 하고 왔을 뿐인데, 처음부터 너무 재미난 걸 봐 버렸어. 그래서 말인데, 어떠냐?”
“뭘?”
“팀원으로 삼는 거. 괜찮을 거 같지 않냐? 솔로 플레이로 뛰었다는 건 아직 이렇다 할 소속도 없다는 거고. 이만한 사람 없을 것 같은데.”
“글쎄. 아직은 모르겠어. 청화 놈들이랑 귀찮게 부딪쳐야 할지도 모르는데.”
“하! 네가 언제부터 그딴 걸 신경 썼다고?”
“히히. 그것도 그렇지만.”
“하여간. 다시 확인해 볼 겸, 한 번 따라가 볼래?”
“형, 그거 악취미야.”
“그래서? 넌 안 가려고?”
더벅머리 청년의 질문에 소년이 쀼루퉁하게 볼을 부풀렸다.
“설마.”
그러다 배시시 웃는다.
“사실 이런 건 내가 형보다 훠어얼씬 더 좋아하는 거 몰라? 헤헤.”
* * *
‘고맙다, 라.’
연우는 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갈 길이 멀다지만, 그래도 이런 작은 인연쯤은 기분 전환으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더구나 용마안으로 엿봤던, 율의 혈계 능력.
인챈터(Enchanter).
‘사람이나 장비에 마력을 심을 수 있는 능력. 그런 것을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피식.
탑에서도 보기 어려운 능력이기 때문에 제법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녀석을 옆에 둘 수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지.
‘물론, 그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율의 간절한 얼굴을 떠올리는 내내. 연우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나저나.’
연우는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B구획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어디지?’
카엔 일행과의 다툼 때문일까. 주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대기실 중앙을 가로질렀다.
우측 벽 끝 쪽에 4개의 문이 순서대로 나열해 있었다.
스타트 존을 뜻하는 노란색 라인을 벗어나자, 자동적으로 망막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B구획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B구획에는 총 4개의 통로가 있습니다. 이중 한 곳을 선택해 통과하십시오.]
거대한 공동 끝에는 총 4개의 문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각자 크기와 모양은 같아도 색깔은 달랐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곳은.’
하얀색,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
‘검은색.’
연우는 각 문들을 쭉 훑어보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가장 우측에 있는 문 쪽으로 향했다.
B구획의 대기실은 분명 낙오자들로 가득한 장소였다. 하지만 나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옆에는 무사히 이곳을 나가자고 약속한 친구들이 있는데, 나만 힘들다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대신에 4개의 문을 선택하라는 B 구획의 지시에 나는…… 하지만 나중에 그 결정을 후회하고 말았다.
‘정우가 택했던 건 푸른색이었지.’
각 문은 우측으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은 방으로 안내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동생이 택한 건 두 번째 난이도.
A구획이 너무 힘든 나머지 조금 쉴 겸 해서 동료들과 함께 비교적 쉬운 곳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동생은 탑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튜토리얼에 대한 비밀을 알고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고 말았다.
B구획에서 선택하는 문의 색깔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문, 블랙 루트(Black Route)에서는 하얀 이끼와 식인충을 만날 수 있다.’
A구획은 단순히 플레이어의 기량만 시험한다.
하지만 B구획에서부터는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필요로 했다.
판단력, 사고력, 주의력, 집중력, 결단력 등.
같은 환경을 눈앞에 두고 플레이어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어떤 사고를 하는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주변 상황을 얼마나 잘 파악하는지까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관리자들이 보물찾기처럼 꽁꽁 숨겨 둔 히든 피스를 찾을 수 있는지도.
‘여기서 반드시 바토리의 흡혈검을 손에 넣어야 해.’
연우는 B구획 내 히든 피스가 숨겨진 위치를 떠올리면서.
천천히 검은색 문에 손을 갖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