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2화 (12/862)

12화. 블랙 루트 (1)

[블랙 루트에 입장했습니다.]

[무사히 연못을 건너 건너편 지점까지 도착하십시오.]

연우는 대검에 묻은 핏물을 옷가지로 대충 훔치면서 허리춤에 대충 찔러 넣었다.

간만에 피 맛을 봤기 때문일까.

몸이 잔뜩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것 같군.’

비록 자잘한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한 충돌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한 번 부딪쳐 보니 해볼 만한 수준이란 확신이 들었다.

분명 아직까지 기량이나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비슷하거나 연우가 부족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것을 메우고도 남을 만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경험.’

전장과 사선을 수도 없이 건너 본 경험.

그리고 거기서 단련된 감각과 본능. 그리고 투지.

이런 건 절대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연우는 자신이 가진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기량과 기술은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부분이다.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지금까지 달렸던 것처럼. 여기서도 똑같이 달리기만 하면 돼. 내 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4난이도, 블랙 루트란 말이지?’

블랙 루트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넓은 공동을 따라, 아래에는 아주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연못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여길 통과하라는 건가?’

구불구불하게 길게 이어진 공동을 따라, 연못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헤엄을 쳐서 연못을 건너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천중수(千重水)의 연못]

거인 미미르가 물을 나르다가 실수로 쏟아 버려 만들어졌다는 연못. 평범한 생명체가 살지 못한다.

연우는 자세를 숙여 물가에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보통 물과는 느낌이 달랐다.

부드럽지 않고 조금 억센 느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치에 구르고 다니던 돌멩이를 가볍게 던졌다. 돌멩이가 금세 부스러지면서 아래로 가라앉았다.

‘역시.’

연우는 인상을 좁혔다.

‘보통 물이 아니었어. 천중수라더니. 무거워서 붙은 이름이었나?’

일반적인 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거운 밀도와 수압.

평범한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짜부라질 것 같았다. 어떻게 육체가 견딘다고 해도, 얼마 헤엄치지 못하고 지쳐서 그대로 가라앉을 연못이었다.

부력으로 뜰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깊이도 너비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곳을 함부로 건너려 했다간 금방 죽겠지.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연우는 설명창에서 ‘평범한 생명체가 살지 못한다’는 말에 집중했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이상한 생명체는 충분히 살 수도 있다는 뜻.

없더라도 어떤 트랩이 설치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연우는 섣불리 도전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연못으로 이어지는 몰의 벽면을 세세하게 살폈다.

‘용마안.’

벽면을 따라 수십 개의 결이 잔뜩 그러졌다.

연우는 그중에서 유독 결이 한데 뭉쳐 있는 지점을 찾아 손으로 밀었다.

덜컹.

벽이 안쪽으로 쑥 들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싶더니.

그그긍!

벽이 뿌연 먼지를 내면서 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아래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계단이 나타났다.

‘됐다.’

연우가 엷은 미소를 폈다.

4난이도, 블랙 루트에 숨겨진 히든 피스. ‘바토리의 흡혈검’이 숨겨진 장소였다.

[던전에 입장했습니다.]

[히든 피스, ‘서리와 불꽃의 방’을 발견했습니다.]

[공적치를 300만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기분 좋은 소리를 뒤로한 채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이뤄져 깊숙한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깊은 동굴이라 그런지 빛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끊어져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감각 강화: 17.8%]

A구획의 보스룸을 단숨에 돌파하면서 다시 3% 가까이 오른 숙련도 덕분에, 이제는 시각에 집중하지 않아도 다른 감각들로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게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주변의 기척, 지형의 구조, 자신의 행동.

모든 것들이 속속들이 파악되었다.

사각지대도 없었다.

더구나.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스킬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식을 집중해야 했을 테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무의식적으로도 항상 발동 중이었다.

액티브 스킬이 패시브 스킬로 전환되었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연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던전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곧 살이 에일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휘이이.

곧 계단이 끝나면서 새로운 동혈이 나타났다.

‘찾았다.’

동혈은 벽면을 따라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이끼가 가득했다.

[하얀 이끼]

동굴로 흘러 들어온 달의 정기를 머금은 이끼. 하지만 섭취 시에 탈이 날 수 있다. 맛도 없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설명.

하지만 연우는 하얀 이끼에 숨겨진 효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블랙 루트는 위험한 만큼 그것을 해결케 하는 방법도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하얀 이끼였다.

하얀 이끼는 달의 정기를 잔뜩 품고 있는 영약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주식으로 삼는 동물이 아주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섭취해도 기운을 쌓지 못하고 도리어 몸에서 거부 반응을 보여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떻게 던전을 발견한 플레이어들도 하얀 이끼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블랙 루트를 선택한 플레이어들은 이 동굴을 발견해도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다.

빛이 들지 않아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고, 쓸데없이 길고, 필요 없는 것만 가득한 곳.

앞으로 달리기에도 바쁜데 누가 이런 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려고 할까.

하지만 동생은 아주 뒷날에나 알게 되었다.

이곳이 품고 있는 비밀을.

하지만 친하게 지낸 연단가에서 듣고 알게 되었다. 하얀 이끼는 일종의 재료로써, 독특한 섭취 방식이 따로 있다는 것을.

‘하얀 이끼는 성질이 너무 물러. 무르기 때문에 그냥 섭취했을 때는 녹아 버리지. 하지만.’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다 말고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끼기긱.

기긱.

갑자기 하얀 이끼 사이로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 팔뚝만 한 길이의 지네였다.

단단해 보이는 불그스름한 껍질을 지닌.

[붉은 오공]

하얀 이끼를 주식으로 삼는 지네. 해식굴에 서식해 눈이 퇴화된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해 있다. 가끔 이끼가 아닌 육식을 즐기기도 한다.

카아악!

녀석은 침입자가 자신의 먹이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수십 개의 발을 놀려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천장에서부터 벽면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징그러워하면서 놀랄 법도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오히려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얀 이끼를 주식으로 삼는 곤충이나 짐승은 달의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열기를 마구 발산시키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런 열기는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어 화(火) 속성을 갖추게 되었고.’

대검의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반면에 하얀 이끼는 얼음에 가까운 수(水) 속성. 심장과 이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복용하면 다른 두 성질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영약이 된다. 근골을 단단하게 만드는.’

탑에는 수많은 영약들이 존재한다. 마력을 증강시키는 영약이 있는가 하면, 특정 스탯이나 속성에 영향을 주는 영약도 있다.

그중에서 연우가 가장 먼저 섭취하고자 하는 건 근골의 완성을 도와주는 영약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아주 무르다. 쉽게 탈이 나고, 부러지며, 찢어진다.

하지만 하얀 이끼와 짐승의 심장은 그런 육체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단단한 골격으로. 질긴 근육으로.

더 싸우기 수월한 육체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팟!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앞으로 세게 던지면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대검이 붉은 오공의 단단한 갑주에 그대로 꽂혔다. 핏물과 체액이 튀었다.

키에엑!

녀석이 분노를 드러내면서 잔뜩 몸을 뒤틀어 집게 입을 크게 벌렸다.

쿠쿠쿠-

녀석이 지난 자리로 깊은 흔적이 남았다.

[불꽃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히든 퀘스트 / 서리와 불꽃]

내용: 서리와 불꽃의 방에는 하얀 이끼를 먹이로 삼는 독특한 몬스터들이 가득합니다. 이들이 던전 밖으로 나오게 될 경우, 외부의 생태계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하십시오.

보상: 사냥한 몬스터의 숫자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100마리 이상: 100Point

-300마리 이상: 300Point

-500마리 이상: 500Point + 업적에 따른 추가 보상

-1,000마리 이상: ???

‘떴다.’

서리와 불꽃의 방은 육체를 강화시키고, 바토리의 흡혈검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 외에 한 가지 장점이 더 있었다.

바로 사냥한 몬스터의 숫자에 따라, 추가 공적치 획득이 가능하고, 500마리 이상이 넘어갈 경우에는 추가 보상까지 주어진다는 것.

사냥한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육체도 강화되고, 공적치와 보상까지 한꺼번에 획득할 수 있는 노다지인 셈이었다.

그리고.

‘1천 마리가 넘어가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해.’

팟!

연우는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고 재빨리 몸을 측면으로 틀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쾅!

붉은 오공이 머리를 처박은 자리. 바위가 집게 입에 의해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엄청 강하다. A구획을 몇 번씩이고 돌면서 강해진 몸으로도 잡기 힘들 만큼. 정면에서 부딪쳤다가는 정말 위험해져.’

연우는 판단이 서자마자 붉은 오공의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따앙!

‘역시. 단단해. 너무.’

대검은 녀석의 껍질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났다. 파고 든 깊이도 살짝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붉은 오공은 그마저도 신경이 거슬렸던지 몸을 크게 틀어 집게 입으로 연우를 잡고자 했다.

연우는 다시 한 번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있던 자리로 구덩이가 깊게 파이면서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꿈쩍도 않아. 껍질의 내구도가 너무 단단해. 방금 전에 던진 대검이 운 좋게 파고들어 갔지만…… 너무 얕아. 힘을 빼 놓기엔 무리야.’

그렇다고 지구전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붉은 오공의 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연우가 있는 위치는 던전 입구에 불가했다.

던전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단시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콰앙!

다시 한 번 연우가 있던 자리로 붉은 오공이 머리를 처박았다.

키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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