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4화 (14/862)

14화. 블랙 루트 (3)

꿀꺽. 꿀꺽.

핏물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입가를 따라 많은 양이 범람했지만, 연우는 최대한 많은 핏물을 삼키고자 했다.

독성이 가득해 목이 탈 것 같았다.

악취가 진동해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핏물을 들이켰다. 가죽보다 훨씬 질긴 심장 근육을 질겅대며 삼켰다.

그 순간.

화아악!

미리 섭취했던 하얀 이끼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달의 기운을 모은 순수한 정기(精氣).

이것은 붉은 오공이 그동안 쌓은 화기와 탁기를 물리치고 융화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촉매제였다.

그리고.

콰드득. 콰득.

연우의 육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부러졌던 뼈가 붙었다. 찢겼던 근육이 아물었다. 벗겨졌던 피부가 새로 돋았다.

아니, 단순한 그 정도가 아니었다.

뼈는 훨씬 단단해졌다. 근육은 훨씬 질겨졌다. 피부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체질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다.

[붉은 오공을 무사히 처치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잡을 수 없는 적을 상대해 잡았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만큼 획득했습니다.]

[힘이 7만큼 올랐습니다.]

[민첩이 6만큼 올랐습니다.]

[체력이 5만큼 올랐습니다.]

[육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물리 내성’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7.2%]

[붉은 오공의 심장을 섭취했습니다. 하얀 이끼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숨겨진 효능이 드러납니다.]

[‘불꽃 심장, 서리 문장’에 대한 단서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진행률: 1.5%]

[현재 사냥한 몬스터의 수: 1]

연우가 붉은 오공의 시신에서 빠져나온 건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온통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었지만, 더 이상 지쳐 보이지는 않았다.

“후우.”

연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숨을 돌렸다.

부상은 다 나았지만 정신적 피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긴 버렸군.”

이상한 기운이 올라와 육체를 조금씩 바꾸는 느낌은, 처음이 아니어도 뭔가 꺼림칙했다.

그래도 그 뒤에는 상쾌함이 찾아온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연우는 붉은 오공을 잠시 쳐다보면서 여전히 입에 남아 있던 심장 조각을 ‘퉤’하고 뱉어 냈다.

‘이런 놈들이 가득한 던전이라. 끔찍한 장소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가득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불꽃 심장과 서리 문장이 손에 들어왔어.’

이 두 가지가 바로 하얀 이끼와 짐승의 심장을 한꺼번에 섭취했을 때 일어나는 작용.

골격과 근육을 강화시켜 주는 히든 피스였다.

1.5%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몸이 조금씩 개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육체가 단단해지는 만큼 피로가 풀리는 회복 속도도 빠르다고 하더니. 다행이야.’

연우는 달라진 몸 상태를 더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상태창을 불렀다.

[플레이어: 차연우]

특성: 냉혈

힘: 60 민첩: 65 체력: 62 마력: 21

스킬: 용마안(3.1%). 감각 강화(17.8%). 시간 예지(0.0%). 물리 내성(7.2%). 전투 의지(3.2%).

‘보스룸을 통과할 때보다, 붉은 오공 한 마리를 잡아서 얻는 스탯이 훨씬 더 많을 줄이야.’

연우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힘든 역경을 극복해 내는 만큼 더 많은 스탯이 주어지는 건 당연했고, 블랙 루트는 그만큼 위험한 장소였다.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육체는 착실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벌써 대부분 계수가 60을 넘고 있었다.

‘마력이 낮은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나?’

연우는 처음에는 가장 높았지만 지금은 어느새 가장 뒤처진 마력 계수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당장 마력을 쓸 방법이 없어 손을 놓고 있다지만.

그래도 다른 능력치들과 이렇게 계수 차이가 벌어지려 하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나를 느낄 만한 방법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

율 덕분에 마력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게 잡았다. 그렇다면 느끼는 방법만 고안해 내면 그만이었다.

‘방법. 방법이라.’

사실 천재 쪽에 속하는 동생과 다르게, 연우는 철저한 노력파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무엇이든지 쉽게 해내던 동생과 다르게 연우는 뒤에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프리카로 파병되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고문관에 가까울 정도로 약했지만, 나중에는 부대를 대표하는 특전사가 될 수 있었다.

연우는 스스로를 한계까지 내모는 데 익숙했다.

한계의 벽이 깨질 때까지 몇 번이고 부딪쳐서 성장했다.

그리고 다시 벽이 생기면 그것을 또 깰 때까지 부딪치고 부딪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튜토리얼에 참여한 여러 플레이어들 중에 자신이 가장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구역으로만 걸었고, 그때마다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재능이 없으니 몇 번의 경험으로 실마리를 잡고, 이를 토대로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는 방식이었다.

마나라는 것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계속 부딪쳐서 마나를 다룰 실마리를 찾아내고, 사용법을 터득해야 할 것만 같은데.

문제는 실마리까지 다가설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마력 스탯은 상태창에서 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둬서는 안 됐다.

‘당장은 스킬에 의존하면 그만이지만. 앞으로 마력이 쓰일 일이 많아질 거야. 고수가 되면 될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질 테고.’

마력은 육체적인 능력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게 해 준다.

신비. 혹은 이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가능케 하는 힘.

기상천외한 일들로 가득한 곳이 탑일 텐데, 그런 힘을 포기하고 들어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연우는 아직 계승이 덜 끝난 상태였다.

용체(龍體).

혹은 용골지체라 불리는 특성.

고룡 칼라투스로부터 비롯된 이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수였다.

용종이야말로 모든 마나와 신비의 시조라 불리는 지고한 종족이었으니까.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당장 어떻게 고민한다고 해서 해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당장은 취해야 할 것부터 취한 뒤에 마력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해답을 얻을 수 없다면, 부득이하게 쓸 수 있는 편법도 있었다.

‘플레이어들 중에는 정말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들도 많다고 하니까. 정말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그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잡아다가 방법을 캐내 봐야겠지.’

별 연관도 없는 사람에게 위해를 끼치는 건 그가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연우는 마나와 마력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뒤로하고, 이번에는 새롭게 얻은 두 스킬에 대해서 살폈다.

[물리 내성]

등급: E-

숙련도: 7.2%

물리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진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 상태 이상에 대한 높은 저항이 발동된다.

[전투 의지]

등급: D+

숙련도: 3.2%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와 불굴의 정신으로 전투에 대한 의식을 불태운다. 전투에 집중하는 동안 사고 가속을 통해 여러 판단을 가능케 한다.

‘등급?’

연우는 새롭게 추가된 항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능력이 그만큼 강해지면서 여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등급은 스킬이 가진 능력을 반영한다.

높을수록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며, 마력이나 정신력 소모가 줄어든다.

등급을 조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깨달음을 얻고 스킬에 적용시켜 인터페이스 시스템의 인정을 받거나, 숙련도를 채워서 올리는 것.

두 스킬이 받은 등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전투 의지만 두고 본다면 아주 좋았다.

‘D+이면 웬만해서는 튜토리얼에서는 받기 힘들 정도니까.’

연우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두 스킬의 내용에 대해 정리했다.

‘물리 내성은 외부 충격에 대한 효과가 커. 충격을 최소화시켜 주고, 통증을 완화시킨다.’

접근전을 주로 치르는 연우에게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스킬이었다.

여태 수련을 하는 내내 몇 번씩이고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으니까.

그때마다 냉혈 특성을 이용해서 의식은 차리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사람이 계속 통증을 겪다 보면 정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스킬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태 이상에 대한 높은 저항도 괜찮아.’

중독, 화상, 동상, 공황(스턴), 환각, 저주 등은 공략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것을 피하게만 해 준다면?

여러 이점을 지니게 되는 셈이었다.

물리 내성은 여러모로 연우에게 흡족하게 와 닿았다.

큰 기술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완벽하게 지원해 줄 수 있는 보완재였다.

하지만 연우가 물리 내성보다 더 마음에 든 건 바로 전투 의지였다.

‘사고 가속을 이루게 한다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재빠른 판단은 아군을 살리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지만, 아군을 전멸시키는 최악의 패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판단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따른 생각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가능케 하는 스킬이라.

이미 여기에 대한 효과는 붉은 오공을 잡으면서도 톡톡히 겪지 않았던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붉은 오공의 집게 입이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빨라진 사고 능력을 통해 내린 판단은 연우를 승리로 이끌었다.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건 가장 큰 메리트야. 게다가 이건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

전투 의지의 메리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극한의 집중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감각 강화와 용마안에도 아주 큰 효과를 미친다.

더 세밀하고 정밀해지기 때문에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것들도 포착해 내는 데 효율적이었다.

이참에 연우는 한 번 더 전투 의지를 다뤄 보자는 생각에서 눈을 감았다.

이미 감각 강화는 패시브 스킬로 동원되고 있었다.

현재 연우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전방 10~15미터 내외.

거기에 전투 의지를 곁들인 순간.

-^#$$#$%^$#!##*!!!

“……!”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정보량의 압박감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리고 울컥 치솟는 현기증. 구토감.

“뭐야, 이거?”

연우는 극단적인 인내심으로 헛구역질을 참을 수 있었지만, 정신은 멍했다.

효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보였고, 들렸고, 맡아졌고, 느껴졌고, 맛봐졌다.

거기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마치 제한 장치를 해제한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지다 보니 무엇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야가 엉키고, 소리가 노이즈를 일으키고, 후각이 피부를 찔렀다.

그대로 있다간 두뇌가 타 버릴 것 같은 느낌에 재빨리 해제를 해야만 했다.

그 많은 정보량에서 취사선택이 가능이나 할까?

‘도통 쉬운 게 없구나.’

연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식은땀이 흐른 턱 주변을 손으로 훔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냥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한 순간이지만, 분명 연우는 두 스킬의 조합으로 몸이 붕 떠오른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으니.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해 보자.’

연우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아 전투 의지와 감각 강화를 동시에 시동시켰다. 뇌가 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인상이 팍 찡그려졌지만.

연우는 물리 내성도 같이 병행시켜 지끈거리는 두통을 어떻게든 견디면서 던전의 통로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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