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5화 (15/862)

15화. 블랙 루트 (4)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빌드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카엔 일행을 보고 인상을 잔뜩 구겼다.

중요한 물건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

그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간만에 괜찮은 놈들을 주웠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니.

치료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듣자 하니 지금까지 겨우 살아 있었던 것도 어느 마음 좋은 플레이어들이 지나가면서 남은 음식들을 나눠 주면서 버티고 있었을 뿐.

그나마 상태가 좋은 놈은 하반신 마비, 카엔 같은 경우에는 목 아래로 아예 감각이 없었다.

빌드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유를 물어봤다.

하지만 네 명 중 아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허공에다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몇몇은 실성한 것처럼 ‘헤헤헤!’ 너털웃음을 흘려 대기도 했다.

빌드는 더 이상 카에 일행에게서 뭔가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신에 주변 목격자들을 탐문했다.

플레이어들 간에 벌어진 분쟁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밥그릇을 건드린 일이잖아? 짜증 나. 감히 아랑단이 비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건…… 우리를 그만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빌드는 아랑단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다.

정확하게는 아랑단을 포용하고 있는 청화도에 대한 충성심이었겠지만.

그래도 아랑단은 설립 초기부터 그가 자신이 모시는 분과 함께 피땀을 흘리며 일군 곳이었다.

무시당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얀 가면을 쓴 놈이라고?”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하얀 가면. 짧은 대검. 날렵한 몸놀림.

“예? 예. 그, 그렇습니다.”

“가면이라.”

빌드는 인상을 살짝 구겼다.

가면을 쓴 놈이라니. 이번 튜토리얼에서 그런 희귀한 행색을 한 참가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일단 한 번 찾아봐야겠군.”

빌드는 어디론가 몸을 던졌다.

쉭!

각 구획 간의 이동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통과한 플레이어는 튜토리얼 내 어디든지 다닐 수 있는 패스 티켓이 있었으니까.

‘어떤 행위를 해도 스탯이나 공적치와 관련된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때문에 빌드는 미처 듣지 못했다.

가면을 쓴 사람과 충돌하기 직전, 카엔 일행이 이야기를 나누던 한 청 년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 * *

키키킥! 키킥!

어둠을 틈타 3마리의 박쥐가 공간을 갈랐다.

입을 벌리고 초음파를 쏟아 낼 때마다 동굴 곳곳이 울려서 감각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쾅! 쾅! 콰앙!

연우는 그런 혼란 속에서 바람 소리만으로 박쥐의 위치를 정확하게 감지해 내고, 각 방향으로 손에 쥐고 있던 세 자루의 대검을 세게 던졌다.

머리통이 부서지는 소리, 날개의 피막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박쥐들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몸을 던져 남은 놈들의 명줄을 단번에 끊어 놓았다.

[초저음 박쥐 5마리를 무사히 처치했습니다.]

[현재 사냥한 몬스터의 수: 147]

“후우. 이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 감각이 익숙해지는군.”

연우는 가볍게 어깨를 풀면서 죽은 박쥐 몬스터의 사체 쪽으로 다가갔다.

던전에 들어오고 붉은 오공을 처치한 뒤.

연우는 통로를 따라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몬스터를 마주치는 족족 처치했다.

출몰하는 몬스터들은 흔히 해식 동굴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나 곤충 따위였다.

지네, 도룡뇽, 놀래기, 굴곱등이, 박쥐 같은 것들이 덩치만 확대되다 보니 보기 징그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붉은 오공이 힘들었던 만큼, 다른 몬스터들도 상대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횟수가 계속 반복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고, 어느새 100마리를 넘긴 시점부터는 사냥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가진 독특한 패턴에 한 번 익숙해져 놓으니, 그 뒤부터는 훨씬 손쉬웠던 것이다.

‘불꽃 심장과 서리 문장이 그만큼 발전한 이유도 크겠지만.’

연우는 허리춤의 가장 끝에 걸어 놓은 대검을 뽑아 박쥐 사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점을 분리하고, 내장을 천천히 분리한다.

아프리카에서도 몇 번씩 해 봤던 작업.

덕분에 연우는 별달리 꺼려하는 기색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취할 수 있었다.

‘초저음 박쥐는 눈알과 발성 기관이 나중에 귀하게 쓰인다고 했었지?’

모두 재료 아이템으로 쓰일 것들이었다.

동생이 나중에 중요하게 쓰일 거라면서, 탑에서는 구하기 어려우니 튜토리얼에서 반드시 얻어 둬야 한다면서 일기장에 명시해 둔 것들이었다.

‘이런 자잘한 것들로 좋은 아티팩트를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이득이지.’

연우는 재료 아이템으로 쓸 것들만 백팩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심장 부위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붉은 오공을 잡았을 때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로 물어뜯다시피 했었지만, 사실 몬스터가 가진 정수를 제대로 섭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솜씨를 필요로 했다.

박쥐의 심장이 깨끗하게 도려진 채로 밖으로 나왔다.

연우는 하얀 이끼를 뜯어 입 속에 한 움큼 밀어 넣고, 심장을 차례대로 섭취했다.

콰드득.

콰득.

안쪽에서부터 육체가 조금씩 변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몸이 개운해지면서, 어떤 경로를 따라 뭔가가 빠르게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전투 의지로 집중력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흐름.

역시나 익숙한 흐름이고, 느낌이었다.

‘마력.’

모공을 따라 탁한 노폐물이 조금씩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불꽃 심장, 서리 문장’의 조각을 얻었습니다.]

[현재 진행률: 16.2%]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체내를 맘껏 돌아다니던 마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연우는 입맛을 다셨다.

불꽃 심장과 서리 문장의 진행률이 증가하면서 체내를 따라 도는 마력의 느낌도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연우는 육체의 변화에도 마력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마력은 그를 놀리듯이 맛보기만 실컷 보여 주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불꽃 심장과 서리 문장이 진행될수록 마력의 양도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마력에 대한 감각도 또렷해지고 있으니.

진행률이 완전히 100%에 다다랐을 때, 마력도 확실히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연우의 짐작이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당장 급한 건 바로 여기부터인데.’

연우는 박쥐 사체의 남은 부위 중 이빨이나 발톱, 뼈 같은 단단한 부위만 골랐다.

그리고 하얀 이끼와 독기(毒氣)가 가득하던 붉은 오공의 피를 일정 비율로 적절히 배합한 용액을 그 위에다 발랐다.

치이익!

그러자 신기하게 용액을 바른 부위가 지글지글 연기를 내면서 녹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독기(毒氣)를 피 속에 품고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맹독을 품고 있어 사냥할 때 피가 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 동료 중에는 조금, 아니, 아아아주우 괴팍해서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놈이 있었다. 귀찮아서 직접 싸우기는 싫다나?

게으름이 괴물을 한 놈 만들어 낸 것이다.

한때 탑 내에서 랭킹 6위에 올랐던 팀, 아르티야.

거기서 최고수를 가리라 한다면, 동생과 함께 한 명을 더 꼽을 수 있었다.

아니, 다수를 상대로 한 대군(對軍) 전력에서는 오히려 동생도 한 수를 접어 줘야 했다는 플레이어.

안티 베놈, 베이럭.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 중 한 명이었지만, 녀석에게서는 배울 만한 것들이 많았다.

‘베이럭은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원래 연금술을 공부하던 학자였다고 했지. 이를 토대로 몬스터의 독혈(毒血)을 연구해서 큰 성과를 얻었고.’

덕분에 동생은 베이럭이 만든 여러 성과물 중 상당수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연우에게로 전해졌다.

지금 연우가 초저음 박쥐의 단단한 부위에 바른 용액도 바로 그런 성과물 중 하나였다.

[용산용액(溶酸溶液)]

단단한 물질의 결속력을 약화시킨다. 농도가 짙을 경우 물질을 해체시킨다.

‘훔칠 수 있는 기술이라면,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식이라면, 무엇인들 가릴 이유가 없지.’

원수는 원수더라도, 빌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빌려 낸다.

아니, 오히려 원수들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죄책감이 없이 마구 사용할 수 있었다.

연우는 발톱과 이빨이 많이 물렁해지자, 대검의 손잡이 뒷부분을 이용해서 곱게 빻기 시작했다.

어느새 힘 스탯이 70 가까이 되어 가기 때문에 작업은 훨씬 순조로웠다.

그리고 가루를 한껏 모아 미리 네모나게 잘라 둔 박쥐의 질긴 피막에 가득 담았다.

그러고 나서 주둥이를 위로 모아 힘줄로 한껏 묶었다.

가루를 가득 담은 주먹만 한 크기의 주머니.

던전 입구부터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모은 가루의 양이 제법 많았다.

주머니만 벌써 15자루 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쓸모없어 보이는 작업처럼 보였지만.

다음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

‘개미굴. 바로 저기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지.’

연우는 통로 너머로 언뜻 비치는 공동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서리와 불꽃의 방은 각 영역이나 환경 별로 거주하는 몬스터들이 조금씩 달랐다.

이 너머도 마찬가지.

이곳에는 아예 한 종류만 서식하고 있었다.

여태껏 지나쳤던 수많은 통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동.

벽면과 천장을 따라 수도 없이 나 있는 하얀 알들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군대개미의 서식지였다.

[푸른 군대개미]

30센티에서 크게는 1미터까지 다다르는 크기.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군집 사회를 이루고 있다.

개미 사회 특성상, 일꾼 개미들은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불사한다.

그런 놈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

여태껏 던전을 통과했던 것이야 끽해야 한두 마리, 많아도 다섯 마리 안팎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냥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수백 마리가 떼로 몰려올 걸 감안한다면.

‘미친 짓이지.’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갈가리 찢겨 새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쉬웠다.

문제는, 연우가 반드시 저 지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

‘저 너머의 방에, 바토리의 흡혈검이 있다.’

아티팩트 넘버링 352.

바토리의 흡혈검을 상징하는 번호였다.

흡혈군주 에르체페트 바토리의 유품이 거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냈을 때는. 정말이지 얼마나 식겁을 했던지.

탑 내에는 플레이어들의 원활한 성장과 공략을 위해 수십 개의 클래스가 존재하고, 그중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들은 ‘군주’가 될 수가 있었다.

하나하나가 뛰어난 고수들이며, 밑에 수많은 수하들을 품을 수 있는 절대자들.

흡혈군주는 오래전에 죽은 군주 중 하나였다.

타인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힘을 강화하고, 나아가서는 스킬까지 강탈해서 수많은 파괴와 멸망을 안고 다녔다던가?

여전히 그때의 피해를 떠올리면서 치를 떠는 플레이어와 클랜도 꽤 많다고 들었으니.

그런 존재의 유품이니 만큼 넘버링도 아주 낮았다.

‘넘버링은 숫자가 작을수록 뛰어난 물건이란 뜻. 세 자릿수, 그것도 300번 대의 아티팩트라면 최고급이지. 더구나 이건 탑과 튜토리얼을 통틀어 딱 하나밖에 없는 유니크(Unique). 절대 놓칠 수 없어.’

하지만 그 입구에 보란 듯이 수백 마리의 군대개미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정면에서 안 된다면, 잔머리라도 써야겠지.’

연우는 주머니를 묶은 힘줄을 매듭으로 묶어 어깨에 걸쳤다. 반대쪽 줄을 잡아당기면 바로 풀릴 수 있도록 만든 매듭이었다.

“후우!”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팟!

단숨에 개미굴 입구까지 가로질렀다.

키릭?

키이익!

개미들이 기척을 느끼고 하나둘씩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녀석은 집게 입을 잔뜩 드러내며 괴성을 질렀다.

“미안하지만, 길 좀 내줘야겠다.”

연우는 기민한 동작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녀석들 사이를 단번에 통과, 개미굴 안쪽으로 손에 쥐고 있던 주머니들을 냅다 던져 넣었다.

아프리카에서 심심하면 해 봤던 투척이었기 때문에 떨어지는 지점은 정확했다.

그러고 나서 반대쪽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허공에서 차례로 주머니의 입구가 열렸다.

공동을 따라 가루가 수북하게 뿌려지면서 붉은 안개가 깔렸다.

개미들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다시 소리를 질러 댔지만.

딸칵!

연우는 마지막으로 여태 백팩에 들어 있던 지포라이터에 불을 붙여 같이 냅다 던졌다.

동시에 개미굴 입구 바깥쪽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최대한 숙였다.

그리고.

파아앙!

쾅! 콰콰콰-

키에에엑!

거친 폭발이 공동을 가득 채웠다.

열 폭풍을 동반한 불꽃이 벽면을 마구잡이로 할퀴어 댔다.

졸지에 불벼락을 맞게 된 군대개미들이 줄줄이 터져 나가면서 일제히 괴성을 질러 댔다.

가뜩이나 화 속성을 가득 내포하고 있던 몬스터 가루였다. 그런 것이 한가득 뿌려진 마당에 불길을 점화해 버렸으니. 그것도 잔뜩 밀폐된 공간에서.

평소 물리적 현상으로 목격할 수 있는 분진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

거친 폭발이 공동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르르!

[개미굴을 성공적으로 폭파했습니다. 217마리의 푸른 군대개미가 폭사, 89마리의 푸른 군대개미가 분사, 92마리의 개미가 질식사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만큼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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