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9화 (19/862)

19화. 블랙 루트 (8)

갑자기 나타난 것도 수상쩍기만 한데.

동료가 되라니?

연우는 ‘뭔 이런 놈이 다 있냐?’하는 표정으로 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도일은 팔꿈치로 그런 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야! 왜? 갑자기?”

“그딴 짓 좀 그만해. 형은 쪽팔리는 것도 모르냐?”

“뭐가?”

칸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일이 한숨을 푹 내쉬는 동안.

연우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백팩을 고쳐 메면서 칸과 도일의 옆을 그냥 지나쳤다.

“야, 야! 어디 가! 아직 내 말 덜 끝났어!”

칸이 부랴부랴 연우를 붙잡았다.

연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뭐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직 대답을 안 했잖아. 동료가 되라니까!”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계속 이 한심한 놈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차갑게 대꾸했다.

“불가.”

“왜?”

“너희들이 뭘 하는 놈들인지도 모르고, 굳이 파티나 팀을 이룰 만한 매력도 느끼지 못하니까.”

칸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너 나 몰라?”

“모른다.”

“어? 왜?”

당연히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냐는 투.

“알아야 하나?”

“아니, 어떻게? 정말 모른다고? 나를? 어떻게 나를 모를 수가 있지? 튜토리얼 최고의 대스타를?!”

칸은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연우의 얼굴이 서서히 짜증으로 변해 가던 그때였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도일은 정말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이 형이 좋게 말하면 자애심이 대단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뻑이 심하고 좀 모자란 면이 있어서 대화 나누기가 좀 피곤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까 이해해 주시길 바랄게요.”

순간, 칸은 뭐가 잘못되었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도일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동생이 그래도 형보다는 훨씬 똑똑해 보였다.

연우는 이제야 겨우 대화가 편해지겠다는 생각에 도일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만, 간단히.”

“우선 저희 소개부터 드릴게요. 저는 도일, 이쪽에 있는 모자란 형은 칸이라고 해요.”

“도일? 칸?”

연우는 순간 익숙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튜토리얼 랭킹 11위와 3위?”

도일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조금 부끄럽네요.”

가면 아래, 연우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3위의 칸과 11위의 도일.

최상위 그룹들이다.

그런데 저만치 앞서 나가 있어야 할 사람들이 왜 이런 뒤쪽에 있는 걸까?

혹시 사기를 치는 일당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음. E나 F구획쯤에 있어야 할 저희들이 여기 있다는 게 의심스러울 수도 있으시겠지만.”

“아니. 너희들이 도일과 칸이라는 건 믿도록 하지.”

“어? 정말요?”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도 생각했지만, 이만한 강자들이 자신을 속인다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연우는 이들이 최소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용마안.

가느다랗게 열린 스킬을 따라 두 사람을 체크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용마안으로 생물을 살폈을 경우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존재는 결이 옅어지고, 부정적인 사고나 적의를 갖고 있는 존재는 결이 짙어지면서 개수도 잔뜩 불어났다.

이를 토대로, 연우는 상대의 사고나 감정에 대해서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칸과 도일을 따라 감도는 결은 옅은 색을 갖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뜻.

연우는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런 플레이어들이, 구획 시련을 통과하면서 공적치를 쌓기 바쁠 양반들이, 굳이 후반 지역으로 되돌아와서 나를 스카웃하려는 이유는 뭐지?”

도일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연우를 설득하기 쉽지 않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느 정도 정보를 풀고자 했다.

만약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물리적으로 제지할 생각까지 가졌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쭐게요.”

“뭐지?”

“혹시 소속된 팀이나 클랜, 있으신가요?”

“없다만.”

순간, 도일의 안색이 밝아졌다. 칸도 ‘오’하고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도일이 말했다.

“그럼 잘됐네요. 사실 E구획에서 저희가 꼭 구해야만 하는 아티팩트가 하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최소 3~4인 이상의 파티 플레이를 이뤄야만 해서요.”

“그럼 거기서 참가할 사람을 구해도 되지 않나?”

“E구획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쯤 되면 대개 소속이 정해졌거나, 같이 다니는 팀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연우는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튜토리얼 내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하는 주자들.

당연히 히든 피스를 수습하려면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력이 괜찮다 싶은 이들은 대게 소속이 정해져 있고, 고용해 봤자 소문만 나기 쉬우니, 아예 솔로 플레이어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B구획으로 이동해서 팀원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B구획으로의 이동은, 티켓이라도 썼나?’

보아하니 연우가 구했던 것처럼 리셋 티켓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패스 티켓의 일종이겠지.

물론,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클 테니 1회용으로 한 것이겠지만.

‘A구획은 실력을 점검하기 힘들고. 그래서 B구획의 대기실에서 죽치고 있던 중에 나를 발견한 건가?’

아마 A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하고, 카엔 일당들을 박살 내놨던 게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연우는 이런 식으로 이목을 끌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E구획에는 3위와 11위, 둘이서 손을 잡아도 손에 넣기 힘든 아티팩트가 있고, 그것을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나?”

“예. 더 자세한 건 말씀드리지 못하지만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 했다.

‘하르간의 왕관을 필요로 하는 거군.’

E구획에도 여러 가지 히든 피스가 있었다. 다행히 이들이 노리는 건 연우가 노리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E구획의 세 나무가 헝클어지는 지점 아래에, 하르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리자드 킹이 머무는 레어(Lair, 둥지)가 있었다. 우연찮게 찾게 된 녀석은 성질이 포악해서 레이드를 하는 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동생과 팀 아르티야도 우연찮게 발견했던 히든 피스.

E구획에 자주 출몰하는 리자드맨 부족의 수장으로,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편이라고 했다.

특히 녀석을 호위하는 리자드맨 워리어가 너무 많아서 효율적인 사냥이 힘들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난이도와 시간 소모에 비해서 녀석이 주는 보상은 보잘것 없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동생도 상당히 짜증 났었다는 일기를 남겼었는데.

때문에 연우는 하르간의 레어는 일부러 피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시간은 촉박하다. 그런데 굳이 별 보잘것없는 구역에서 발이 묶일 필요가 없었으니.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히든 피스를 열어서 더 높은 공적치와 보상을 얻는 게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하르간이 주는 보상, ‘하르간의 왕관’은 연우에게 별 필요가 없는 아티팩트였다.

‘하르간의 왕관은 위엄과 통솔력을 높이는 옵션을 지니고 있다. 딱히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아.’

연우가 추구하는 전투 스타일은 일인군단(一人軍團).

제아무리 많은 적이 있다고 해도, 혼자서 상대들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것이었다.

많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

아니면 많은 동료들을 두는 것?

편할 것 같아도 연우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뛰어다닐 때에도 마음 맞는 수하들만 옆에 뒀을 뿐, 대규모 작전을 직접 지휘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동생은 믿었던 팀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탑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뒤가 노출되면 언제 뜯어먹힐지 모른다.

그런 사나운 정글에서 괜히 약점을 노출하기 쉬우니 굳이 동료나 수하들을 둘 이유가 없었다.

두더라도 한두 명쯤.

부담이 되지 않고, 여차하면 치우기 쉬울 만큼만.

그러니 연우로서는 군주 클래스에나 도움이 될 것 같은 하르간의 왕관에 관심을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보상은 저희가 섭섭지 않게 해 드 릴 수 있어요. 원하시는 게 있다면 따로 지불도 가능하고요. 어떠신가요? 그쪽에도 절대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요.”

칸과 도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E 구획으로 넘어가고 싶어 할 테니, 연우를 어떤 식으로라도 도와줄 것이다.

빠른 공략을 통해 순위도 빠르게 올릴 수 있을 테고, 덤으로 히든 피스까지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나면 탑 내에서 슈퍼 루키가 될 두 사람과의 친분이 줄 이점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이룬 팀에 소속되어서 하나의 큰 파벌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

‘물론, 내가 평범한 후발 주자였을 때에나 혹할 만한 이야기라는 거지만.’

연우는 딱히 두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팀을 이룰 필요성은 더더욱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앞으로 치고 나가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앞으로 다른 히든 피스도 계속 찾아야 하는데 방해꾼들이 있어서야 될까.

그래서 연우는 거절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돕는 것이라면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C와 D구획은 바로 스킵을 할 예정이었다. E구획에서 거둘 만한 게 있긴 했지만, 그 전에 이 두 사람을 돕는다면?

하르간의 사냥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튜토리얼 랭킹 3위와 11위와 함께 뛸 수 있다면 빠른 공략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리 별 탐이 나지 않아도 히든 피스는 히든 피스.

주는 공적치가 절대 적지 않다.

잠깐의 짬을 내서 그만한 공적치를 쌓을 수 있다면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좋아.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도일이 잘 생각했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뭔가요?”

“너희들이 꼭 얻어야만 한다는 아티팩트. 그걸 제외한 나머지 보상은 내가 전부 챙기고 싶은데.”

“음.”

쉽지 않은 대답.

하르간의 왕관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하르간의 레어에서 또 다른 어떤 보상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도일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칸을 슬쩍 돌아봤다.

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조건이 되었건 간에 그들에게 중요한 건 빠른 공략.

왕관 외에 눈독 들이는 건 없었다.

결국 도일도 알겠다고 눈빛을 보내고 연우에게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좋아요. 대신에 그만큼 실력을 보이셔야만 해요.”

“어차피 실력이 안 된다면 내치거나, 다른 사람을 추가로 구할 생각이지 않나?”

정곡을 찔린 도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저희가 꼭 그렇게 잔인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때 여태껏 뒤에 서 있던 칸이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여태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해 많이 답답했던지 방긋 웃으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하하! 하여간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마저 나누자고, 브로(Bro).”

연우는 칸이 어떤 성격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뻑도 심하고, 말도 많은, 상대하기가 너무 피곤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같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꾹 참고 녀석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여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단 사실에 이름을 말하려다가 잠깐 멈칫거렸다.

이곳은 전장.

굳이 본명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 콜 사인을 입에 담았다.

“카인.”

연우의 눈빛이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나는 카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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