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거래 (1)
연우는 더 이상 던전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칸, 도일과 함께 던전을 빠져나왔다.
“저 빌어먹을 천중수를 또 보네.”
칸은 천중수의 연못을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 역시 난이도4의 블랙 루트를 선택하면서 어렵게 연못을 통과했었기 때문이었다.
부력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밀도. 몸을 억누르는 강한 수압. 연못에서 사는 희귀한 수중 몬스터들까지.
다시 통과할 생각을 하니 짜증부터 났다.
그러면서도 연우는 어떻게 통과할지 내심 궁금해졌다.
던전에서 연우의 실력을 유추할 만한 흔적들은 많이 봤었지만, 직접 바로 앞에서 눈으로 목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연우의 실력이나 앞으로 성장 가능성에 따라 추가 인력을 구할지 말지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라?’
연우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연못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야, 너!”
“왜 그러지?”
연우가 무슨 문제 있냐는 얼굴로 칸을 돌아봤다.
“너 그냥 들어가려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슨 문제라도 있나?”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다 큰 코 다치……!”
하지만 연우는 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칸은 연우가 어마어마한 수압에 격통을 겪으면서 아래로 내려앉을 것이라고 생각해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굳이 걱정할 필요 없어 보이는데?”
“……그러게.”
연우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너무 가뿐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도일이 슬쩍 웃음을 던지자, 칸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던전에서 제법 실력이 좋다는 것은 확인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놈이 걸린 것 같았다.
‘고작 B구획만 통과했는데도 저 정도인데. 앞으로 남은 구획을 전전하면서 더 성장을 한다면?’
칸은 수면 위를 올라오면서 너무 능숙하게 헤엄치는 연우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튜토리얼이 다른 이유로 또 한 번 들썩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강자의 등장은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 * *
하지만.
칸이 놀라거나 말거나.
연우는 천중수 위를 돌아다니면서 육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불꽃의 심장과 서리의 문장. 이게 아주 좋아.’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사람의 육체쯤은 아무렇지 않게 짜부라뜨릴 수압이었지만.
강화골을 획득한 육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꽃의 심장은 쉴 새 없이 뛰면서 육체 곳곳에 어마어마한 활력을 불어 넣었고, 서리의 문장은 피부 아래에서 작동하면서 단단해진 골격으로 아무렇지 않게 천중수의 수압을 밀어냈다.
이만하면 연우로서는 지구의 평범한 저수지에서 멱을 감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연우는 칸과 도일이 어떻게 건너나 싶어 연못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육체파인 칸은 주머니에서 천을 하나 더 꺼내더니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단단히 묶어 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반면에 도일은.
‘뭐지? 스킬?’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자, 동굴 벽에 달라붙어 있던 하루살이들이 갑자기 연못 위로 떼를 지었다. 마치 그 모습이 먹구름을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도일은 벌레로 이뤄진 먹구름 위를 밟으면서 앞으로 이동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벌레들도 같이 움직이면서 다리를 형성했다.
신기하면서도 묘한 광경이었다.
하루살이들은 밟혀서 죽더라도, 죽는 숫자만큼 추가가 되어서 이동이 수월했다.
‘테이머 계통, 충술(蟲術) 쪽인가?’
테이머는 대상자와의 교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보통 특정한 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벌레를 다루는 충술은 지능이 낮은 벌레와 하루살이를 다루기 때문에 그보다 더 어렵고 복잡했다.
그런 충술사를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째서 튜토리얼 랭킹이 11위나 되는 녀석이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뛰어난 건 스킬과 충술일 뿐이지, 육체적인 능력은 거기에 미치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블랙 스컬이 충술에 능통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순간, 탑 내 랭커 중 어떤 존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연우는 머리를 털어 지웠다.
언젠가 만나게 될 자이긴 했지만, 지금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연우는 칸과 도일이 이동하는 걸 확인한 뒤, 숨을 크게 들이켜고 깊숙하게 잠수했다.
연못 안은 심해에 들어선 것처럼 온통 칠흑색으로 가득해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감각을 최대로 강화시키면서.
쾅!
연우는 물살을 걷어차며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간만에 빠르게 움직여서 그럴까.
기분이 상쾌했다.
* * *
아랑단의 간부, 빌드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블랙 루트로 사라졌다던 녀석. 카엔 일당을 망가뜨렸던 흉수에 대한 행방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B구획의 천중수 연못.
난이도가 높아 아직도 발목이 묶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움직이려는데.
수하가 추가로 가져온 보고가 도중에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칸과 도일이 녀석의 옆에 붙었다고 합니다.”
“뭐? 그놈들이 왜? 아니, 그보다 놈들은 원래 E구획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칸과 도일은 청람가의 남매와 함께 탑에서도 유독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놈들이었다.
특히 아랑단의 배후, 청화도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놈들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거지?
아니. 그런 것을 떠나 흉수 녀석은 뒷배가 없던 녀석이 아니었나?
“저희도 아직 거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해 면밀히 파악 중입니다. 다만, 최근에 E구획에서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B구획의 대기실에서 그들과 똑같은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들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빌드는 수하를 잔뜩 노려봤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 알았다고?”
수하는 어깨가 움츠러든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초반 구획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 행색은 비슷해도 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쾅!
빌드는 주먹으로 탁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럼 뭐지? 두 사람이 그놈을 스카웃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수하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그렇게 추정 중입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건드린 거였군. 칸, 도일. 이 빌어먹을 것들이.”
빌드는 꼴통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로서는 지금 이 상황을 놈들의 선전포고라고밖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면을 쓴 녀석이 자신들과 분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대로 둔다는 것.
이건 명백히 아랑단을, 아니, 청화도를 무시하는 행태였다.
“일단은 가면 쓴 놈이 있다는 곳으로 간다. 단원들 집합시켜.”
“현재 전원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빌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안쪽으로 다른 수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방금 전 새로운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현재 놈들이 B구획을 통과, C구획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쪽으로 이동…….”
하지만 빌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하들이 연거푸 찾아왔다.
“다른 보고입니다! 녀석들이 C구획을 돌파했습니다!”
“현재 D구획의 초입에 발견되었……!”
“아닙니다! D구획을 돌파해 E구획으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현재 돌파를……!”
“그 뒤를 칸과 도일이 따르고 있……!”
영문을 모를 정도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보고.
튜토리얼 내에 설치된 아랑단의 정보망은 아주 촘촘하다.
그러니 절대 오류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갑자기 보고가 물밀 듯이 계속 쏟아진다는 뜻은 하나.
일점돌파(一點突破).
하지만 아무리 칸과 도일이 도와준다고 해도 이렇게 빠른 돌파가 가능하던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빌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269:36:55_41]
[B구획, 블랙 루트를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
[C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
[D구획을…….]
……
‘뭐야, 대체 이거? 저놈, 진짜 얼마 전까지 B구획에서 놀던 놈 맞아? 어떻게 이런 빠른 성장이 가능한 거지?’
칸은 연우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면 새로운 강자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던 생각.
선두 주자들을 위협할 만한 다크호스가 새롭게 등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나타났던 거였어!’
처음 천중수의 연못을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좋은 물건을 찾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C구획에 들어선 순간, 생각이 확 바뀌고 말았다.
콰앙!
쐐애액-
“인간! 인간이 나타났…… 쿠르륵!”
“인간, 너무 강하다! 대장, 필요하…… 컥!”
연우는 너무 손쉽게 C구획을 돌파하면서, 걸리적대는 몬스터들을 말 그대로 ‘휩쓸 듯이’ 쓸고 지나갔다.
C구획은 길이 하나만 나 있던 앞선 두 구획과 다르게 수십 개의 굴이 거미줄처럼 서로 난잡하게 연결된 미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당연히 길이 아주 복잡했고, 출구는 딱 한 곳에 불과했다.
게다가 미로의 끄트머리에는 홉고블린과 함께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머무는 소굴이 있었다.
당연히 녀석들은 플레이어를 자신들의 소굴을 침범한 적으로 규정하고, 소굴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정 시간에 걸쳐서 정찰 부대를 보내어 플레이어의 전진을 막았다.
그럼 플레이어는 이들을 피하거나 몰래 해치우면서 전진해야만 하는 구조였다.
만약 들키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에 수십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 부족을 통째로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머릿수는 당해 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이를테면, C구획은 술래인 고블린 들을 피해 숨바꼭질을 하면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게 시련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게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공략법을 모두 무시했다.
누가 덤비더라도 아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쭉 밀고 나가면서 고블린들을 모두 베고 또 했다.
당연히 미로는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학살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고블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고, 연우는 정면에서 녀석들과 부딪쳐서 승리를 얻어 냈다.
그리고 끝내 홉고블린의 목까지 허공으로 튀었다.
D구획도 마찬가지.
석실을 지키고 있던 트롤마저 단칼에 베어 버렸으니.
촤아악!
완력과 맷집만 두고 본다면 5인 이상의 파티 플레이로도 당해 내기 힘들다던 트롤이 찢어진 북처럼 터져 나갔다.
도일만 하더라도 절대 자신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에 깊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연우를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선보이고도, 연우는 별다른 기색 없이 태연하게 트롤을 빠른 속도로 해체했다.
왜 굳이 죽은 몬스터를 그렇게 처리하느냐는 질문에.
“트롤의 피는 체력 포션의 중요한 재료가 되지. 힘줄과 가죽은 중요한 재료가 되고.”
“…….”
뭐가 잘못 되었냐며 태연하게 반문하기까지 했다.
돌파부터 마무리까지.
연우는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챙기고 있었다.
* * *
[튜토리얼 내 랭킹이 갱신되었습니다.]
[튜토리얼 랭킹]
1위. 에도라(57,987Point)
2위. 판트(56,342Point)
3위. 칸(50,475Point)
……
192위. 비공개(15,700Point) (본인)
……
281위에서 192위까지.
연우는 90개에 가까운 계단을 단번에 뛰어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