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1화 (21/862)

21화. 거래 (2)

스걱. 스걱.

“대체 그것들은 어디다가 쓰려는 거냐?”

칸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연우는 들기 좋게 자른 트롤의 가죽을 정리하다 말고 칸을 올려다봤다.

“말하지 않았나. 피는 포션의 재료로…….”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굳이 그런 걸 챙겨 둘 필요가 있냐는 거지. 너 공적치도 제법 많이 모아 놨을 거 아냐? 앞으로도 계속 모을 거고. 그럼 굳이 재료 수급이 따로 필요하냐고.”

탑에 입성하게 되면 공적치, 즉, 포인트는 그때부터 화폐로 쓰일 수 있게 된다.

필요한 물건이나 아티팩트가 있다면 포인트를 지불해서 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흔히 플레이어들은 ‘잡템’으로 취급되는 몬스터들의 시체나 재료 등을 모으는 걸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신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일꾼으로 고용하거나, 따로 포인트를 지불해서 구매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엘더 드래곤 같은 희귀하고 대단한 몬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런 건 대개 거대 클랜이나 공략팀에서 취급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 플레이어들이 잡템을 취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고블린을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구획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면서도 괜찮다 싶은 시신이 있으면 해체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손길도 얼마나 섬세한지.

병에다 피를 담을 때에는 자칫 이물질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담고, 특정 부위는 따로 모아서 가죽으로 싸서 차곡차곡 담았다.

덕분에 연우가 들고 있던 백팩은 어느새 빵빵해져서 금방이라도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분명히 비싼 재료들만 엄선해서 골라 담았는데도 불구하고.

“전부 따로 쓸 데가 있다.”

“그런 거라면야, 뭐.”

칸은 더 이상 연우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가 봤을 때, 연우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는 철저한 계획과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플레이어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들.

연우가 하려는 일이 궁금하긴 해도 굳이 터치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오지랖이 넓은 그답게 궁금한 건 참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한 걸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너 그 많은 재료들을 한꺼번에 취급할 만한 사람은 알고 있냐? 괜히 사기꾼 만나서 눈탱이 맞고 질질 짜지 말고.”

연우는 모든 정리가 끝난 백팩을 어깨에 이었다.

백팩은 여러 구획을 전전하면서 곳곳이 찢어지고, 찢어진 부위마다 가죽으로 대충 덧댄 덕분에 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대장장이라면. 어느 정도.”

“오. 실력이 좋은가 보지?”

“글쎄.”

연우는 슬쩍 어깨를 으쓱이면서 칸의 옆을 쓱 지나쳤다.

더 이상 말해 주기는 귀찮다는 뜻.

칸은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가까워지기 더럽게 어렵네.’

여태껏 칸이 연우의 옆을 따라붙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라면, 정말이지 연우는 절대 속내를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같이 붙어 다니다 보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눌 법도 하건만.

하지만 연우는 절대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냥 필요한 말만 꺼낼 뿐이었다.

이따금 하얀 가면과 무덤덤한 눈빛이 사람 같지 않아서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다.

물론, 밀림 같은 튜토리얼과 탑의 세계에서 그런 점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절대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세였으니까.

게다가 아직 칸과 연우 사이에는 아직 이렇다 할 접점이나 친분도 없었으니, 경계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벽을 치는 것 같은 느낌.

칸은 스스로가 타인과의 공감이 뛰어나고, 사교성이 아주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도 저만한 실력이라면 웬만하면 옆에 가깝게 두고 싶은데 말이지.’

칸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여태 연우를 관찰하면서 느낀 점을 간단하게 표현하라면 딱 하나.

등을 맡길 만하다는 것.

속내는 내비치지 않을지언정, 그는 절대 타인의 일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은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두 구획을 단번에 돌파할 만큼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칸으로서는 앞으로 ‘큰 계획’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욕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옆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가까워지기가 힘드니, 원.

‘저 가면 때문에 그런가?’

칸이 그런 생각을 가지거나 말거나.

연우는 어느새 D구획의 보스룸을 가로막고 있던 철문을 강제로 열었다.

그그긍, 쿠쿠쿠!

여태껏 각 구획을 구분 짓던 철문보다 훨씬 두터운 문이 움직이니 동굴 전체가 금방 무너질 것처럼 위아래로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여태껏 단순한 조명으로 앞을 겨우 분간했던 동굴 안쪽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동굴 밖.

푸른 하늘이 보였다.

[D구획을 솔로 플레이로 통과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E구획에 입장했습니다.]

[바깥 영역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추가 공적치를 1,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햇빛과 함께 시원한 바깥바람이 불어왔다.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으으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좀 아쉬운데. 어두워서 자기 딱 좋았었는데.”

칸이 한껏 기지개를 펴고, 도일은 다시 졸린 눈빛으로 눈가를 비볐다.

튜토리얼은 크게 2개의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안쪽’과 ‘바깥쪽’.

안쪽은 흔히 갓 튜토리얼에 입장한 플레이어들이 실력을 자각하고, 부족한 능력을 빠르게 수련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가 마련된 A구획부터 D구획까지를.

바깥쪽은 안쪽에서 쌓은 실력을 가감 없이 발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격을 증명해 보이는 E구획부터 G 구획까지를 의미했다.

보통 안쪽은 빛이 들지 않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좁은 동굴과 통로에서 시련이 이뤄지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감을 받기가 쉬웠다.

하지만 바깥쪽에서부터는 그런 점이 전혀 없었으니.

연우 역시 간만에 바깥세상을 보니 조금 갑갑했던 것들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바깥쪽은 오히려 안쪽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으니.

‘D구획까지는 그래도 막다른 벽이 있었으니 일정 범위만 경계하면 그만이었지만. E구획부터는 전혀 그런 게 없으니까.’

사방이 탁 트인다는 건 그만큼 적에게서 노출이 되기 쉽다는 뜻.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은 사이.

망막을 채우던 메시지는 다른 문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E구획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그때, 연우의 손바닥 위로 빛이 번쩍였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손가락 절반만 한 굵기의 작은 구슬이 생겨났다.

[방금 전, 당신의 손에는 한 개의 ‘증표’가 주어졌습니다. 증표는 E구획 곳곳에 숨겨져 있으며, 찾은 증표는 타인에게로의 양도 및 거래도 가능합니다. 99개의 증표를 모아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연우는 증표라는 이름을 받은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칸이 으윽, 학을 떼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볼 때마다 짜증이 나네.”

연우는 가만히 증표를 살폈다.

E구획은 따지자면 일종의 데스 매치에 가까웠다. 구획 곳곳에 증표가 숨겨져 있다지만, 어렵게 그것을 찾는 것보다는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강탈하는 게 훨씬 순조로웠다.

그래서 E구획은 편집증에 걸리기에 딱 좋았다. 언제 어디서 기습이 있을지 모르는 데다가, 얼마 전까지 같이 웃고 지내던 동료도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증오스러운 건…….

연우는 타인에게로의 양도 및 거래도 가능하다는 문구에 집중했다.

이 말은 곧, 타인을 겁박해 증표를 갈취하거나 죽여서 강탈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숨겨진 증표를 98개나 더 찾는 건 아주 어렵다. 하지만 타인이 갖고 있는 걸 빼앗아 99개를 만드는 건 아주 쉬웠다.

플레이어들이 어느 쪽을 택할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동생도 그 때문에 상당히 힘이 들었다고 했었으니.

하지만 팀 아르티야가 대단했던 건, 그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대한 배신 없이 꿋꿋이 숨겨진 증표들을 모두 찾아 구획을 통과했다는 점이었다.

‘승냥이들이 적지 않게 꼬이겠군.’

승냥이. 통칭 스캐빈저.

E구획에는 숲 지대를 이용한 여러 떠돌이들이 가득했다. 그런 녀석들을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연우는 일기장에 남아 있던 최악의 놈들이 떠올랐다.

증표를 양식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산 채로 잡아 두던 녀석들.

동생와 팀 아르티야가 나서서 해치우긴 했다지만, 만약 녀석들이 남아 있거나, 비슷한 놈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면.

그러다 연우는 머릿속을 털었다.

정의롭고 의기가 넘치던 동생과 다르게 자신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설사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한다고 해도 무시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는 당장 앞으로 달리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괜한 데에 정신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연우는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칸과 도일은 연우의 증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반 관심 있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 패스 티켓으로 B구획의 대기실로 오기 전에 상당히 많은 증표를 모아 뒀겠지.

‘아니면 이미 99개를 모두 모아 뒀거나.’

연우는 갖고 있던 증표를 매만지다가 입 안으로 넣어 꿀꺽 삼켰다.

칸과 도일이 조금 묘한 눈빛을 떴다.

증표를 삼켰다는 건 죽기 전까지는 절대 타인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

연우가 가진 독기를 다시 엿볼 수 있었다.

“시련도 받았고. 이만 이동하지. E구획에 히든 피스가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빨리 그쪽 일을 처리해야 나도 증표를 찾아다니지.”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다만, 거리가 좀 있어서. 상당히 시간이 걸릴 거야.”

“그럼 이동하면서 증표도 같이 찾도록 하지.”

“그러던가.”

칸은 앞장서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연우와 도일도 뒤를 따랐다.

* * *

E구획은 앞선 4개의 구획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크고 넓은 영역을 자랑했다.

덕분에 각 영역마다 지형이나 지물, 환경도 제각각 달라 독특한 생태계를 구성했다.

남쪽에는 자잘한 구릉이 포진해 있었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넓은 숲지대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북쪽 끄트머리에는 질퍽한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동쪽은 메마르고 검은 바위산이 뾰족하게 늘어서서 병풍을 쳤고, 서쪽은 강이 흐르는 평원이 있었다.

그래서 각 구역마다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의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

숲의 외곽에는 주로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자잘한 것들이 부락을 이루지만,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들도 돌아다녔다.

북쪽 늪지대에는 리자드맨이 서식했고,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샌드웜이나 오크 부락 같은 녀석들도 있었다.

이런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곳곳에 숨겨진 증표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이런 몬스터들보다 더 위험할지 모르는 플레이어들을 피해 다니면서 증표를 지켜 내는 것.

모두 다 중요했다.

그리고.

연우 일행은 북쪽 지점, 늪지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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