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2화 (22/862)

22화. 거래 (3)

그늘이 진 밤.

연우 일행은 가볍게 노숙 준비를 했다.

안쪽 구획에 있을 때에는 낮밤의 구분이 없어서 지칠 때만 잠깐 눈을 붙이고 피곤이 풀릴 때쯤에 다시 깼었지만, 낮밤이 생긴 이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는 건 칸의 주장이었다.

“앞으로 상대할 놈은 꽤 까다롭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

연우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연우는 칸과 도일이 무엇을 노리는지를 알고 있었다.

리자드킹 하르간.

E구획에 포진한 보스 몬스터 중 하나답게, 녀석은 보통 플레이어쯤은 쉽게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을 자랑한다.

최상위권인 칸과 도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한 마리가 아니란 거지.’

리자드킹은 총 두 마리였다. 수컷과 암컷.

수컷의 이름이 하르간이기 때문에 히든 피스의 이름이 ‘하르간의 둥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둥지의 진짜 주인은 수컷이 아닌 안쪽에 있는 암컷이었다. 수컷만 사냥하고 나서 안심했다가는 큰 일이 날 수 있었다.

‘리자드킹의 왕관을 갖고 있는 녀석도 암컷이었지. 이 녀석들도 그걸 알아낸 게 분명하고.’

왕관을 탈취하려면 수컷과 암컷을 각각 전담할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칸이 맡을 수 있는 숫자는 한 마리가 전부.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만 할 일이었다.

그러니 다른 한 마리를 맡아 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거겠지.

상대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약한 도일은 두 리자드킹의 이목이 딴 곳에 집중된 사이에 왕관을 탈취할 역할을 맡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칸과 도일도, 연우도 녀석들의 레어를 찾기 전에 최상의 컨디션을 찾아 둬야만 했다.

칸과 도일은 이런 경험이 많았는지 제법 능숙하게 노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일은 모닥불을 피울 때 신기한 광경을 보였다.

충술을 이용, 어떤 벌레를 부르더니 장작 위에 서게 했다. 벌레는 스스로 몸을 터뜨리면서 화려한 불꽃을 틔웠다.

“신기하군.”

연우의 짧은 감탄에 도일이 배시시 웃었다.

“화염충이라고, 자신을 먹으려는 천적이 있으면 죽으면서 저절로 발화해서 천적까지 태워 버리는 녀석이에요. 탑에는 이런 신기한 곤충들이 많죠.”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꽃에 사그라지는 화염충의 잔재를 눈여겨봤다.

‘역시 탑에는 정우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 아주 많아.’

동생이 남긴 일기장이라고 해서 탑에 대한 모든 정보가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체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모닥불이 타오르고.

세 사람은 저마다 침낭을 둘렀다.

그리고 한 사람씩 순서대로 번갈아 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결정하고, 각자 잠에 들었다.

* * *

연우가 가장 처음으로 불침번 순서를 맡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서 그랬을 뿐.

타닥.

타닥.

연우는 고요한 눈길로 모닥불에 타 들어 가는 장작을 응시하다, 한쪽 손을 활짝 펼쳤다.

푸른색 구슬 다섯 개가 손바닥 위를 굴렀다.

증표였다.

‘내가 가진 것까지 합쳐서. 여태까지 가진 건, 총 6개인가?’

하르간의 둥지로 이동하는 내내, 연우는 그냥 이동만 한 게 아니었다.

숲 속 곳곳에 숨겨진 증표도 같이 찾았다.

증표는 저마다 다른 위치에 있었다.

바위 틈. 개울가. 나무 위. 새 둥지. 등등.

찾는 건 아주 손쉬웠다.

‘예민해진 감각이 증표의 위치까지 포착해 낼 줄은.’

증표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어떤 특정한 힘이라도 담아 놓은 건지,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는 특성이 달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증표는 최대한 많이 모아 둬야 한다. 보유하는 개수가 많아질수록 공적치도 같이 올라가니까. 특히 100 개 이상부터는 상승폭이 남다르니 더 집중해야겠지.’

물론 증표를 찾는 건 아주 비밀리에 진행했다.

괜히 칸과 도일에게 보여 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두 사람은 연우가 자신들의 일을 돕느라 증표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도일은 슬쩍 흘러가듯이 원한다면 보상으로 증표를 내주겠다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게 진담이건 거짓이건 간에 둘 다 괜찮은 녀석들인 건 틀림없었다.

이기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튜토리얼의 세계에서는.

‘그나저나.’

연우는 다섯 개의 증표도 입 안에 털어 넣으면서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봤다.

이곳이 지구와는 다른 세계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크고 작은 달 두 개가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나? 시간도 참 빨라.’

간만에 이렇게 멍하니 밤바람을 쐬고 있자니 뭔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

여태 그동안 너무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서 그럴까?

이렇게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맞지 않는 옷처럼 조금 불편했다.

튜토리얼에 들어온 뒤로 여태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까.

매번 구르고, 찌르고, 달리기만 했었다.

그동안 잠을 자는 것도 잠깐 피로를 쫓기 위해 눈을 붙인 게 전부였을 뿐.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여태 얼마나 빡빡하게 달렸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튜토리얼에 갓 들어왔을 때가 엊그제 같기만 하건만.

그 때문일까?

피로가 조금씩 몰려오는 것 같았다.

육체적인 피로는 몰라도, 정신적 피로는 상당히 쌓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화골의 육체는 그렇게 무디지 않다.

여전히 감각은 세밀하게 주변을 쉴 새 없이 탐색하고 있었으니.

그저 머릿속에 담긴 잡념을 해소하고자 했다.

쏴아아!

고요한 밤하늘을 쳐다보고, 밤바람을 즐기기만 한다.

이것만 하더라도 여태 자신도 모르게 쌓였던 정신적 피로며 압박감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의 하늘도 이랬었지.’

그러다 연우는 문득 지금쯤 지구에서 자신을 대신해 열심히 뛰고 있을 부대원들과 부대장이 언뜻 떠올랐다.

특히 자신을 아들처럼 아껴 줬던 부대장을 떠올리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정우 녀석도 이런 조용한 적막을 좋아했었고.’

그러다 문득.

연우는 칸과 도일 쪽으로 시선이 갔다.

녀석들은 많이 피곤했던지 침낭을 뒤집어쓰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참 신기한 놈들이란 말이지.’

연우가 봤을 때, 칸과 도일은 평범한 플레이어들과는 많이 달랐다.

언제나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행동 하나하나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들에게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없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이런 생활들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걸까?’

이곳 늪지대로 오면서 연우는 두 사람의 실력을 얼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따금 칸이 짤막짤막하게 선보이던 검술은 대단했다.

강하고, 날카롭고, 매서웠던 검술.

기술과 실전. 딱 중간쯤에 있는 것 같았다.

절대 하루 이틀 연습으로 완성될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경험과 대련을 겪으면서 터득한 게 분명한데.

겉으로는 말 많고 푼수 같은 모습도 있었지만,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뜻이었다.

도일도 마찬가지.

언제나 흐리멍덩한 눈빛에 잠 오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눈빛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연우조차 놀랄 만한 판단력과 예리함을 보일 때도 있었으니.

주로 칸이 육체파로서 전면전에서 활동한다면, 도일은 두뇌파로서 뒤로 빠져서 상황을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특히 간간이 선보이는 충술은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게 보여도, 몬스터들을 상대로 선보이는 실력을 보면 섬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벌레는 크기가 아주 작다.

그런 녀석들이 코나 귀, 입 같은 구멍으로 들어 가버린다면?

피부로 파고들어 가 혈관을 파먹고, 근육의 생기를 빼앗는다면?

실제로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차라리 칸에게로 달려들지, 도일과 부딪치는 건 꺼려하는 편이었다.

그럴 때면 칸이 또 자신에게 달려든다면서 신경질을 내면서 단번에 쓸어버렸지만.

그래도.

잘 맞물리는 두 톱니바퀴처럼 두 사람이 선보이는 합격술(合擊術)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따로 합격술을 배우거나 연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또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설지, 서로 간에 아주 익숙해서 나오는 모습들이었다.

절대 하루 이틀 정도만 같이 손발을 섞어 본 사이가 아니었다.

최소 오 년. 많게는 십 년 넘게 같이 붙어 다닌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

친형제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텐데.

‘대체 둘이서 무슨 관계인 거지? 형제가 아닌 건 분명할 텐데.’

이만한 실력자들이, 그것도 배경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한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째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하나.

‘보기가 너무 좋아.’

둘은 이미 전혀 스스럼없이 자신의 목숨을 서로에게 맡기고 있는 중이었다.

웬만한 신뢰가 없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우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 부러웠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거나, 그곳에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의 모습에서.

누군가가 자꾸 비쳐져서 그랬을 뿐이었다.

“…….”

밤이 깊어지다 보니 연우는 자신이 왠지 불필요한 감상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의 잡념을 털어 버리려고 했었는데.

도리어 더 많은 잡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이라도 쉬어서 그런가?’

오히려 머릿속은 더 개운해져 있었다.

마치 소나기가 한 번 거칠게 내리고 난 뒤의 하늘처럼.

그래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연우의 두 눈은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칸이 부스럭대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뜨인 눈에 졸린 기운이 가득했다. 으하암, 가볍게 하품까지 해 댔다.

“왜 그러나? 아직 불침번 순서가 되려면 멀었는데.”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넌 잠이 오냐?”

연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칸의 말과는 다르게 주변은 오히려 너무 조용했다.

마치 억지로 숨소리를 죽인 것처럼.

풀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어느새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칸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적대면서 머리맡에 놔뒀던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래도 여전히 주변은 고요했다.

그때.

어느새 도일도 일어나서 늘어져라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곤히 자다가 방해를 받은 게 짜증이 났던지, 고운 눈가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으하암! 저것들, 언제까지 놔둘 생각이세요?”

“조금 귀찮아서. 좀 더 다가오면 치울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하군.”

연우의 말에 도일이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한동안 몸을 너무 안 써서 그런가, 조금 뻐근했었는데. 간만에 달밤 체조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도일은 칸을 돌아봤다.

“그리고. 형,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런데.”

“어.”

“저놈들, 형이 있는 걸 알고 온 걸까, 아니면 모르고 온 걸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칸은 검집에서 천천히 검을 빼 들면서 차갑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팟!

갑자기 칸의 그림자가 아래로 움푹 내려앉는가 싶더니.

촤악!

“아아악!”

피 튀기는 소리와 함께 풀숲 안쪽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젠장!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분산해라! 분산해! 뭉쳐 있으면 더 위험하다!”

곧 고요하던 풀숲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플레이어들 여럿이 나타나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몰래 접근해 단번에 달려들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한 번 들켜 버린 이상, 더 이상 기습의 이점은 없었다.

도리어 한데 뭉쳐 있으면 위험했다.

상대들은 다름 아닌 혈검과 폭시 테일. 직접 부딪쳤다가는 전멸밖에 없었다.

그러나 칸은 단잠을 깨운 놈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칼을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풀숲에 피가 뿌려지면서 시체가 바닥에 누웠다.

도일도 허공에다 손을 거세게 흔들었다.

우우웅-

풀숲은 벌레와 하루살이들이 머물기에 아주 훌륭한 장소.

녀석들이 한데 뭉치면서 저마다 가까이 있던 플레이어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젠장! 이 귀찮은 것들이!”

“떨어져! 떨어져어!”

플레이어들은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달라붙어 살갗을 파고들자 어떻게든 털어 내기 위해서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지만, 그럴 때마다 벌레들은 꾸역꾸역 그들의 체내로 파고들어 가 살점을 파먹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풀숲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칸과 도일이 빠른 속도로 해치워 나가더라도 풀숲에는 여전히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으니.

샤샤샥!

뒤쪽으로 어떤 집단이 몰래,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각지대를 노리고 달려들 생각인 것 같았다.

도일은 조금 짜증 섞인 얼굴로 그 쪽으로도 벌레들을 부리려다가.

“어?”

뒤늦게 놈들이 정확히 어디를 노리는지를 깨닫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연우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기척들.

아무래도 자신들에 비해 이름값이 덜해서 처음부터 노렸던 것 같은데.

아니면 자신들의 무기를 갖고 있을 짐꾼 같은 거라고 여겼거나.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과연 그들은 알까?

지금 자신들이 노리는 자리는.

‘저 병신들. 하필 가더라도, 저길.’

오히려 더 잔혹한 범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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