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거래 (4)
스스슥!
‘제길! 들켜도 너무 빨리 들켰어! 혈검과 폭시 테일의 시선이 돌아간 사이, 증표를 강탈한다! 아니, 가능하다면 아티팩트까지도!’
프랑과 수하들은 E구획 내에서도 가장 활발한 스캐빈저에 속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좋아했다.
증표를 빼앗는다는 핑계로, 플레이어가 가진 재물이며 아티팩트까지 모조리 약탈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모은 아티팩트는 그들의 무력 수준을 대폭 상승시켜 주고, 이따금 스킬북을 손에 넣는 쾌거를 얻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증표는 아주 비싼 값에 상위 주자들에게 되팔 수도 있었다.
또한.
플레이어라는 몸뚱이를 필요로 하는 곳도 많았다.
노예. 성노. 일꾼. 가축. 실험체.
목적도 필요성도 다양했으니 판매처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또 어디 있을까?
하물며 칸과 도일 같은 상급 플레이어들이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다.
얼마나 많은 증표를 갖고 있을지. 또 어떤 아티팩트를 두 사람에게 받았을지. 아무도 몰랐다.
비록 다른 수하들이 칸과 도일의 이목을 따돌리는 사이에 기습을 해야 한다는 위험도 있었지만, 그만큼 돌아올 대가도 아주 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칸과 도일은 미처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고.
먹잇감은 잔뜩 겁에 질렸는지 모닥불만 매만질 뿐, 이쪽은 발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팟! 이윽고 프랑과 수하들이 풀숲을 헤치면서 하얀 가면을 쓴 자의 뒤를 급습하려던 때.
프랑은 ‘됐다!’고 생각을 하려던 찰나, 도중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칼을 휘두른 자리. 거짓말처럼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보고 말았다.
하얀 가면이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고.
가면 너머로 두 개의 눈이 도깨비 불처럼 시퍼렇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
알 수 없는 오한이 등골을 따라 쫙 퍼지고.
촤아악!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짙은 붉은 선이 쭉 그어졌다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무, 뭐야!”
“대, 대, 대장!”
프랑을 따라왔던 스캐빈저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 사이.
연우가 몸을 돌리면서 녀석들에게로 몸을 던졌다.
쐐애액-
밤하늘 아래,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귀신을 연상케 했다.
새카만 어둠 속을 하얀 가면만 둥둥 떠다니는 듯한 괴기함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습이 스캐빈저들에게는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먹잇감이 프랑을 단칼에 죽일 정도로 강했으니까.
게다가 도깨비불 같은 두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따앙!
가장 선두에 있던 스캐빈저가 연우의 첫 공격을 겨우 막아 냈다.
그러자 뒤로 주춤 물러서던 스캐빈저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잖아? 프랑이 당한 건 방심해서 그런 거였나? 아니더라도 우리 쪽 머릿수가 훨씬 많으니까 충분히 잡을 수 있지 않을 까?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고, 동시에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연우를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들었다.
쉬쉬쉭!
“이 새끼가!”
“죽어!”
하지만 그건 녀석들을 안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에 지나지 않았으니.
연우는 칼을 맞대던 그대로 우측으로 몸을 돌리면서 녀석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동시에 왼손으로 허리춤에 꽂혀 있던 대검을 역수로 뽑으면서 목을 그대로 그어 버렸다.
촤아악!
경동맥이 끊어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위로 튀고.
연우는 그사이로 대검을 던져 뒤따라오던 녀석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리고 땅을 박차 반대쪽으로 쭉 달리면서 뒤를 노리던 세 명의 허리, 목, 어깨를 빠른 속도로 베어 버렸다.
“어, 어떻게 된…… 쿠르륵!”
“제기랄!”
스캐빈저들은 그제야 연우에게 속아서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
그들은 머릿수를 믿고 어떻게든 연우를 압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우는 도리어 녀석들 사이를 미친 듯이 날뛰고 다녔다.
날아오는 칼을 옆으로 쳐 내고 목과 허리와 심장을 꿰뚫어 버린다. 사각지대를 노리는 창을 겨드랑이로 잡고, 그대로 부러뜨리면서 목을 갈라 버린다.
연우는 마치 몸 곳곳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았다. 공격을 날리는 족족 피해 내고 반격까지 가해 버리니.
그리고 그럴 때마다 족족 스캐빈저들은 피를 뿌리면서 쓰러졌다.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도, 도망쳐어!”
녀석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에 도망치려고 했지만.
쐐애액-
퍼억!
연우는 가장 먼저 도망치던 녀석의 뒤통수에다 대검을 던져 꽂아버리고, 다른 녀석들을 쫓았다.
속도도 너무 빨랐고 방향도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질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공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그들의 정신을 좀먹었다.
* * *
세 사람이 잡은 스캐빈저는 총 21명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
칸은 문득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놈들이 오는 걸 내버려 둔 이유가 뭐냐?”
“증표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증표가 부족하니 처음부터 도망칠 수 없게 한 곳에다 발을 묶어 버릴 생각이었단 뜻이 아닌가.
물론 E구획에도 연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일일이 플레이어를 찾는 것도 귀찮으니, 괜히 혼자서 낙오된 척 위장했다가 덫에 걸려 달려드는 스캐빈저들만 전문적으로 노리는 자들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건 숫자가 적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지.
이렇게 스무 명이 넘도록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은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상위 주자라 하더라도 머릿수는 당해 내지 못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건 전혀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칸과 도일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믿고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둘 다거나.’
칸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동안 연우는 마지막 남은 시신에서 증표를 찾아 뽑아내고 있었다.
“총 81개인가? 어지간히도 해 먹었군.”
연우는 스캐빈저들을 털고 나온 증표의 숫자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숲을 가로지르면서 얻었던 증표의 개수가 다섯 개였을 텐데.
여긴 거의 백 개가 된다.
이마저도 수하들은 두어 개에 불과했고, 리더로 보이던 놈들만 가지고 있던 게 대부분이었다.
“E구획이 열린 지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요. 사실 그것도 대부분 팔아 치우고, 비상용으로 남은 걸걸요? 천여 명도 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찾고, 부딪치기를 반복했으니 당연히 그 정도는 기본으로 모일 수 밖에 없죠.”
도일이 피식 웃으면서 연우의 의문에 답변을 달았다.
“아마 이들도 스캐빈저라서 그동안 이렇게 모을 수 있었던 거지, 증표가 열 개도 안 되는 플레이어들이 태반일 거예요.”
“빈익빈 부익부라는 거군.”
“그렇죠.”
연우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E구획은 승자 독식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소수의 강한 플레이어들은 다수의 약자들을 상대로 증표를 갈취하면 그만이었다.
약자들도 살기 위해서는 내놓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 뒤에는 어떻게든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샅샅이 숲을 뒤지겠지만, 이건 다시 다른 강자들에게 빼앗기고 말겠지.
‘아니면 강제로 약자들을 구속시켜서 증표를 찾아오게 만든다든가.’
어떤 방식이 되었든 간에 강자들은 가만히 앉아 증표를 빠른 속도로 쌓을 수 있다.
반면에 약자들은 언제나 한없이 증표가 부족해진다.
튜토리얼 랭킹에서 위로 갈수록 공적치의 격차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우도 이런 시스템을 알고 스캐빈저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증표는 최대한 많이 모아 두세요. 공적치를 쌓기도 좋고, 나중에 신비 상인을 만나면 화폐로도 쓸 수 있고요. 보통 상위권 플레이어들도 99개를 모아도 바로 F구획으로 넘어가지 않아요. 최대한 증표를 많이 쌓아 두고 가지.”
연우가 일리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E구획이 끝날 때쯤에 한 번 더 신비 상인을 만날 수 있다고 했었나?’
동생의 일기장 내용이 잠깐 떠올랐다.
딱히 신비 상인에게서 살 만한 물건이 없어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숙지해 놓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 뜻에서 지금 모은 증표는 형이 다 가지세요.”
“음?”
연우는 뜻밖의 말에 도일을 돌아봤다.
81개나 되는 증표는 절대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걸 하나도 챙기지 않겠다고?
도일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저희가 거래하면서 선수금도 안 드렸었잖아요?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칸은?”
“저 형이야 단순해서 제가 그러자고 하면 당연히 따를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너희들도 공적치가 필요하지 않나?”
“하핫! 저희 걱정을 해 주시는 건가요? 저희는 충분히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고맙게 받도록 하지.”
호의를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연우는 트롤의 가죽을 엮어서 만든 주머니에다 증표를 넣었다.
이전처럼 입에 넣어 삼키려니 이제는 양이 너무 많아 그럴 수도 없었다.
‘벌써 이만큼이라니.’
연우는 너무 손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마음을 먹는다면 F구획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당장 그럴 생각은 없었다.
F구획에는 공적치를 올릴 만한 큰 사건들이 없다.
사실상 공적치를 대거 쌓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장소가 E구획인 셈이었다.
게다가.
‘그 놈도 여기서 나타날 테니까.’
처음 연우가 튜토리얼에 들어오기 전부터 잡기를 바랐던 녀석.
꼭 이 시기에 출몰하기 때문에 반드시 잡아야 하는 녀석이 바로 E구획에 있었다.
‘그것이라면 지금 부족한 마력 계수를 대폭 상승시킬 수 있겠지. 용체 계승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고.’
B구획에서 연우가 얻으려고 했던 것이 단단한 그릇이라면, E구획에서 얻어야 할 것은 그런 그릇을 채울 만한 내용물이었다.
연우는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가볍게 축였다.
‘리자드킹을 잡고 나면 바로 ‘그 놈’을 잡으러 간다.’
이미 이동 경로와 계획은 머릿속에 잡혀 있었다.
* * *
이튿날.
연우 등은 목적지였던 북쪽 늪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늪지대는 발을 옮기기가 버거울 정도로 땅이 너무 물렀다.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데다가, 안쪽 영역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늪도 점차 깊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늪 위로 난 나무 위를 뛰어다니면서 이동해야만 했다.
그런 중에 리자드맨 부락과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리자드맨은 직립 보행하는 도마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검술에 능통하고 지능도 제법 뛰어나 ‘사냥’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연우 일행의 힘을 최대한 빼 놓으려고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한꺼번에 달려들어 침입자들을 죽일 계획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 일행은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딪치는 족족 녀석들을 모두 쓸어 내고, 연우는 오히려 녀석들에게서 필요한 재료들만 골라낼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 가져가려는 거냐?”
“눈. 리자드맨의 안구는 특정 버프용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효과가 아주 크지.”
“아, 네. 여기 널린 게 리자드맨이니까 원하는 대로 가져가세요.”
칸은 이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그러다 연우가 리자드맨의 꼬리침까지 수거하자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 눈들은 기에스의 눈을 만들 때 중요한 재료들이 된다.’
수십 개의 눈과 수백 개의 손을 가졌다는 거인, 기에스의 이름을 따 온 무구.
연우는 언젠가 손에 넣고자 하는 아티팩트를 떠올리면서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러면서 증표도 착실하게 모아 어느새 증표는 89개로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리자드맨의 부락을 두어 개 정도 전멸시킨 다음에야, 드디어 하르간의 둥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 이거?”
“어. 아무래도 선객이 있는 모양이다.”
도일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칸을 돌아봤다.
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도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하르간의 둥지로 통하는 숲 안쪽 지대를 따라 핏자국과 함께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