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24화 (24/862)

24화. 거래 (5)

“전투가 치러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연우는 자세를 숙여 핏자국이 남은 흙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러면서 나무나 바위에 남은 흔적도 체크했다.

누가 보더라도 전문가적인 자세.

“다섯 시간? 아니, 여섯 시간 정도. 반나절 정도 될 것 같다.”

“반나절이라.”

칸이 작게 중얼거렸다.

도일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우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 성공했을까요?”

히든 피스는 말 그대로 히든(Hidden), 숨겨졌을 때에나 가치를 발한다.

튜토리얼 곳곳에 숨어 플레이어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계속 집중해서 낙오가 되지 않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튜토리얼 내에서 발견된 히든 피스는 절대 같은 회차에서 두 번 다시 발동하지 않았다.

만약 하르간의 둥지라는 히든 피스를 다른 플레이어들이 찾았다면?

하르간의 왕관을 필요로 하는 칸과 도일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칸과 도일은 연우에게 아직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단순히 왕관만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다.

왕관을 이용해서 또 따로 얻을 것이 있었다.

그것은 큰 계획을 치르고자 하는 두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

때문에 타인의 침범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일어서서 흔적을 더 살피더니 그들이 안도할 수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들어간 흔적은 있지만, 나온 흔적은 없어. 그리고 보아하니 여기 온 놈들도 이곳을 찾으려고 찾아온 게 아닌 것 같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길 봐라.”

연우는 짙게 땅이 움푹 파인 자국을 가리켰다.

“이건 쓰러진 누군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표식이다. 아무래도 리자드맨이 어떤 미끼를 가지고 플레이어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인 것 같은데.”

“그렇다는 건?”

“그 뒤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음.”

칸과 도일은 인상을 찡그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우가 굳이 거론을 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몬스터들은 단순한 플레이어들의 사냥감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이 포식자가 되어 플레이어들을 사냥할 때도 더러 있었다.

이곳은 몬스터들의 터전이었고, 지리는 몬스터들이 훨씬 더 빠삭하게 외우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저런 함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것도 그런 사건의 연장선으로 봐야겠지.

“빌어먹을 것들.”

다행히 칸은 욕지거리만 내뱉을 뿐.

이 일에 어떻게 개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단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도 냉정할 때는 냉정한 편이군.’

여태 칸을 단순하게만 여기고 있던 연우로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칸이 여기서 단순한 감정에 휘둘러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선수금으로 받은 증표를 되돌려주고 그냥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도일이라는 동생이 있기 때문에 형으로서 자신을 추스르는 거겠지.

그러다 연우는 의외로 생각이 깊고 감정이 무딘 편이었던 도일의 안면이 살짝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도일도 뒤늦게 연우의 시선을 눈치채고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그리고 눈짓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눈빛.

연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지만,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무리할 수는 없지. 카인.”

연우는 자신의 콜사인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우리가 아직 여기에 대한 내용, 말하지 않았지?”

연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으니 계속 모른 척해야만 했다.

이들이 가진 정보량이나 계획에 대해서도 들어야만 했고.

칸은 깊게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는 하르간의 둥지란 곳이야.”

“둥지?”

“그래. 우리가 여기 오면서 여태 상대했던 리자드맨 부족들의 총수? 부족장 중의 부족? 왕? 뭐, 하여간 그쯤 되는 녀석이 머무는 장소야.”

“세겠군.”

“세지. 엄청. 나와 도일이 나서도 당해 내지 못할 만큼.”

튜토리얼 랭킹 3위와 11위가 공략하지 못하는 보스 몬스터가 있는 소굴.

연우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내가 끼어든다고 해도?”

“그런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야. 수컷 외에 안쪽에 암컷이 한 마리 더 있거든. 그놈이 진짜배기야.”

다행히 예상했던 대로, 칸과 도일은 하르간의 둥지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장담하지. 우리가 아무리 미친 듯이 날뛰어도 셋이서는 절대 그놈들을 잡지 못해. 오히려 개죽음만 당할 뿐이지.”

“그럼 뭘 하자는 거지?”

“물건 탈취.”

“탈취?”

“어.”

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둥지는 수컷이 밖을, 암컷이 안을 담당하고 있어. 내가 수컷의 발목을 묶는 사이, 너는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암컷의 시선을 끌어 줘. 그럼 그사이 도일이 암컷이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을 탈취할 거야.”

“그 뒤에는?”

“당연히 뭐 빠지도록 뛰어야지.”

칸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피식 웃었다.

“말했지만 암컷은 엄청 강해. 너 혼자서는 절대 엄두도 내지 못할 거다. 그러니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말고, 약 올리기만 하면 돼.”

“그러지.”

연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칸이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렇게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거냐?”

“어차피 하기로 한 일 아닌가. 뭐가 문제지?”

칸은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아니. 아무래도 제일 어려운 일을 시키니까. 네가 수컷을 맡겠다고 할 줄 알았지.”

“그러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내가 바로 내뺄 수 있으니 그런 거지 않나?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은 마라. 한 번 한 약속은 지킨다. 대신에 원래 약속했던 다른 보상들은 챙기지 못할 테니, 그만한 대가를 따로 치러 줬으면 한다.”

연우의 말에 칸이 씩 웃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하여간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단 말이지. 너라면 정확하게 할 일을 파악하고 도와줄 줄 알았어.”

연우는 귀찮다는 듯이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아프리카의 전장을 겪으면서 임무 수행은 숱하게 해 보던 일이다.

이런 것도 거기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다면, 그때는 단순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보수를 받고 움직이는 용병에 가깝달까.

“그럼 시작하자.”

칸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칼날이 햇볕이 부딪쳐 불길하게 붉은색으로 번들거렸다.

* * *

연우 등은 칸이 앞장 선 품(品)자 대형을 갖춘 채로 전진했다.

그 순간.

[필드에 입장했습니다.]

[히든 피스, ‘하르간의 둥지’를 발견했습니다. 공적치를 500만큼 획득했습니다.]

부스럭!

풀숲이 흔들린다 싶더니 둥지 주변을 정찰 돌던 리자드맨이 소리를 질렀다.

“취리릭! 인간! 인간이다!”

이때부터 연우 등은 지면을 세게 박차 일직선으로 빠르게 관통하기 시작했다.

하르간은 리자드맨들의 왕이었다.

당연히 왕궁에는 왕을 지키는 수많은 근위병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리자드맨 내에서도 손꼽히는 전사들.

앞을 가로막는 녀석들의 실력은 앞서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차창!

그리고 돌파를 시도하는 사이.

수컷, 하르간이 나타나 포효를 내질렀다.

“카아아악! 인간! 감히 인간이 내 영역을 침범했다!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하르간은 2미터쯤 되는 보통 리자드맨보다도 덩치가 두 배쯤 더 컸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비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미터(날이 굽은 칼).

괴성을 질러 댈 때마다 위압적인 느낌이 잔뜩 풍겼다.

[숨겨진 보스 몬스터, 하르간(리자드킹)이 나타났습니다.]

[히든 퀘스트 / 리자드맨의 왕]

내용: E구획 내에는 숲을 다스리는 다섯 마리의 왕이 존재합니다. 하르간은 그중에서 북쪽 지역의 늪지대를 다스리는 리자드맨들의 왕. 근위병들의 보호를 물리치고, 하르간을 처치하십시오.

보상: 하르간의 왕관. 푸른 비늘의 칼. 레어의 소유권.

크라라라!

‘괴물이군. 정말로.’

연우는 단순히 기세를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예민한 감각 영역을 한가득 물들여 버리는 하르간을 보면서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퀘스트창도 같이 떠올랐다지만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콰아아-

‘너무 크다.’

이런 어마어마한 압박감은 처음 겪는 것 같았다.

튜토리얼에 처음 입장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건만.

마치 처음 아프리카 전장에 투입되었을 때의 기분.

긴장감으로 대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에 식은땀이 잔뜩 배 나왔다.

분명 하르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하르간과 마주했을 때. 우연히 둥지까지 흘러왔던 우리들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동료 중에는 주눅 드는 녀석도 있었다.

그만큼 하르간이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마치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 느낌. 공포심과 함께 두려운 마음이 자꾸 들었다. 이를 악물고 무서움을 어떻게든 물리치려고 해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연우는 동생이 겪었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아무리 E구획까지 정면으로 돌파했다고 해도, 이런 ‘느낌이 다른’ 강자는 처음이었으니까.

본능을 자극하는 살기(殺氣)란, 그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이제 신물이 나.’

연우는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눈에 잔뜩 힘을 줬다.

갑자기 그를 둘러싼 기백이 하르간의 기세를 일부나마 밀어냈다.

화아악!

“……!”

그러자 하르간이 포효를 지르다 말고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선이 저절로 연우에게로 쏟아졌다.

하르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가면을 쓴 녀석이야말로 숱한 전장을 나뒹굴면서 살기를 품게 될 줄 알게 된, ‘진짜’ 투사라고!

“죽인다, 인간!”

하르간은 시미터를 세게 움켜쥐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2미터도 훨씬 넘는 덩치를 가진 녀석이 뿔난 황소처럼 달려드니 살기가 더 무섭게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너무 빠르게 움직여 앞에 있던 리자드맨 중 몇몇은 녀석의 발길에 걷어차일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 역시 전장을 숱하게 넘나들면서 단련된 기백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밀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쉭-

까아앙!

시미터와 칸의 칼이 부딪친 자리.

불꽃이 튀면서 뜨거운 마력 열풍이 불었다.

하르간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인가안, 비켜라아! 넌, 내 상대가 아니다아!”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은 그때와 달라서!”

칸은 차갑게 웃으면서 시미터를 세게 밀어냈다.

이미 그는 하르간과 한 차례 부딪치고 위험하다 싶어 물러선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르간의 전투 패턴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었다.

하르간의 커다란 덩치가 살짝 휘청이더니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다 인상이 더더욱 일그러지면서 칸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시미터를 횡대로 휘둘렀다.

하지만 칸 역시 처음 녀석과 부딪쳤을 때보다 능력치 계수가 대폭 오른 상태.

절대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정면에서 다시 한 번 더 부딪쳤다.

쿠우웅!

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팽팽하게 달아오른 근육 위로 하얀 증기가 샘솟고, 두 눈에 핏대가 잔뜩 섰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거친 단내가 토해졌다.

하지만 칸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하르간이 강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이전처럼 절망적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힘들더라도 부딪쳐 보고 싶다는 검은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칸은 억지로 욕망을 눌렀다.

지금은 자신의 호승심을 채울 때가 아니었다.

연우와 도일이 입구를 돌파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줘야만 하는 시기.

칸은 하르간과 다시 부딪치는 척하면서 옆으로 슬쩍 빠졌고, 하르간은 이미 분노로 두 눈이 뒤집힌 채로 그를 잡기 위해 몸을 측면을 크게 돌렸다.

“어딜 가려 하느냐아!”

역시 지능이 제법 높다고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

칸은 아슬아슬하게 하르간을 피해 다니면서 리자드맨 무리 쪽으로 유도했다.

하르간이 아무렇게나 돌리는 시미터 때문에 리자드맨 세넷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근위병들은 제발 진정하라며 그들의 왕을 애타게 불러 댔지만, 칸은 쉴 새 없이 치고 빠지면서 하르간과 근위병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둥지의 입구는 소란스러워지고.

그사이.

연우와 도일은 혼란을 틈타 둥지 안쪽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 * *

둥지의 통로 곳곳에는 다른 근위병들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나타나는 족족 연우가 던지는 대검에 미간이 꽂힌 채로 뒤로 나자빠져야 했다.

두 사람은 돌파하는 내내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도일도 친형처럼 따르는 칸이 걱정될 법도 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집중했다.

자신이 빠르게 왕관을 탈취해야만 칸도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등지의 가장 깊숙한 곳, 왕비의 보금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연우와 도일이 목격한 건.

“사, 사, 사람이다!”

“살려 주세요! 제, 제발!”

“도, 도와…… 도와줘요! 사람이!”

아무렇게나 뜯겨 널브러진 사람의 사지와 고통에 가득 찬 표정의 머리, 곳곳에 남은 핏자국과 살점 등, 처참하기 짝이 없는 식인의 현장.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 가축처럼 우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

바로 인간 농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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